<중앙일보>가 22일부터 24일까지 사흘 동안 <학벌사회 깨진다> 특집 <상>, <중>, <하>를 게재했다. <중앙일보>의 특집은 22일 1면, 4면, 5면에 걸쳐 5꼭지의 기사, 23일 1면, 4면, 5면에 걸쳐 4꼭지의 기사, 24일 8면 3꼭지의 기사로 총 12꼭지로 구성되었다.

<중앙일보>의 특집은 취업응시가 한참인 가을 사람들의 주목을 끌면서 공익성 역시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몇 년 단위로 봐도 확확 바뀌는 한국 사회의 고단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22일 기사 <취업난에… 고졸로 학력 세탁하는 대졸>과 <대기업 “스펙 안 본지 오래"... 10명 중 3~4명은 지방대>, <삼성전자 현대차 임원도 SKY 퇴조> 등은 취업현장에서 학벌구조가 어떻게 해체되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연봉이 높은 생산직공장에 취업하기 위해 대졸 학력을 숨기고, 지방대공대 출신이 명문대문과계 출신보다 취업이 잘 되는 현실을 반영한다.
또 23일 기사 <간판보다 취업, 올 239명 서울대 포기>와 <서울대 포스텍 KAIST 붙은 창현이, 다른 대학 간 까닭>, <교수 사회도 능력 중심… SKY 출신 임용 줄어>, <취업강국 스위스, 비결은 기업들 직업교육과정 8만개> 등은 그와 같은 현실에서 상당수 학생들이 명문대간판보다 취업률이 높은 과나 장학금을 주는 대학을 선택하고 있는 세태를 전한다. 교수사회의 새로운 분위기를 전하면서 대학교육률이 낮지만 기업들이 원하는 인재를 양산하는 스위스와 한국을 비교하기도 한다.
▲ 24일자 중앙일보 8면 기사
▲ 24일자 중앙일보 8면 기사
24일 기사 <”영혼 없는 도전 필패...한 곳만 정조준하라”>, <당당한 고졸>, <대학은 융합교육, 청년은 창업에 눈 돌려야>에선 인문계 대졸자, 고졸 출신으로 취업에 성공한 이들의 수기를 전한다. 또한 이전 기사들에서도 전했듯이 대학은 인문계에게도 수학을 가르치는 융합교육을 해야 하고 청년들은 창업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중앙일보>가 전하는 세태는 분명 달라진 현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 기사에서도 상당수 나오듯 그 세태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은 당사자인 청년들이다. 명문대간판을 보지 않고 취업률이 높은 학과, 장학금을 주는 학교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이 교사와 학부모와 주변 어른들의 반대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이 경험한 세상대로 학벌이 좋은 것이 낫다고 여기고 있다. 또 ‘눈높이를 낮추지 않아 취업률이 낮은 것이다'라는 세간의 속설을 무시하듯 청년들은 연봉이 좀 되는 생산직이라면 대졸 학력을 고졸로 낮춰서라도 들어가려고 하고 취업에 성공한 이후 이에 만족한다.
그러나 <중앙일보>가 전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대학이 인문계 출신들에게도 공대의 기본과정을 가르치는 융합교육을 하더라도 그들 모두가 취업에 성공할 수는 없다는 현실 말이다. 현재 학벌체제의 붕괴는 뚜렷이 보이고 그럼에도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교사와 학부모라면 <중앙일보>의 특집이 ‘계몽'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붕괴가 신규 일자리의 뚜렷한 감소에서 나오는 기업들의 실용성의 증대란 걸 말하지 않은 채 ‘학벌사회'가 깨지고 ‘능력사회'가 왔다고 분석하는 것은 섣부른 일로 보인다.
▲ 22일자 중앙일보 1면 기사
▲ 22일자 중앙일보 4면 기사
개개인의 생존전략은 비록 몇 년씩 지체될지라도 각자가 경험한 현실을 반영한다. 교사와 학부모들의 학벌집착에도 그들 세대의 경험이 녹아 있다. 또한 <중앙일보>가 비판하는 대학생들의 ‘스펙쌓기'도 금융위기 이전 00년대 초반 학번까지의 취업준비의 경험이 녹아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안간힘을 쓰는 한국 사회에선 새로운 기준이 나타나면 또한 그 기준을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메뉴얼'이 등장하곤 했다. 이 메뉴얼은 물론 실질적인 실력의 향상을 담보하지는 못하지만 기업들 역시 그것을 분간할 수 없으니 “토익점수 높다고 영어 잘 한다는게 아닌 건 안다. 하지만 노력은 했다는 것 아니냐"란 식으로 반응해왔다. 현재의 아수라장은 이제 그 ‘메뉴얼'을 짤 수 있을 정도로 기업이 사람을 뽑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펼쳐진 지옥도에 가깝다. 또한 이런 상황을 반영한 메뉴얼이 곧 다시 등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앙일보>의 조언을 깊게 새겨야 할 이들이 있다. 십대 자녀를 둔 학부모들일 것이다. 그들이 자녀세대의 계층상승, 혹은 계층재생산을 위해 사교육비를 잔뜩 부어 명문대학벌을 추구한다면 <중앙일보>의 기사를 읽으며 현실을 반추할 일이다. 하지만 <중앙일보>가 말하지 않는 부분도 있음을 <미디어스>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학벌사회의 해체'는 능력주의나 실용주의의 증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능력'과 ‘실용'은 매우 당연하게도 결코 평등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의 산물이 아니다. 대학의 입학전형 담당자들을 만난 생활인들은 그들이 새로 만들어낸 전형이 “있는 집 아이들을 뽑으려는 의도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고 한다. 기자들이 취재할 때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종류의 냉소적 진실이다. “왜 그래야 하느냐"라고 물으면 그들은 “기업이 그런 애들을 뽑으니까. 대학도 애초에 그런 애들을 뽑아야 취업률이 높다고 선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고 한다.
▲ 23일자 중앙일보 1면 기사
▲ 23일자 중앙일보 4면 기사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최종면접에서 통과하려면 그 기업의 임원이나 임원의 지인 정도는 부모가 알아야 한다는 얘기가 들린지도 오래되었다. 공채로 서른 명 정도 뽑을 때는 ‘빽'과 ‘끈'이 없이 들어오는 이들도 수두룩했지만 한 명, 두 명, 세 명 정도를 채용하게 되고서부터는 ‘빽'과 ‘끈'이 없이는 통과하기 어렵게 됐다는 얘기다. 역시 기업이 언론사를 상대로는 말하지 않는 종류의 냉소적 진리다.
이런 얘기를 첨가한다면 서민층 학부모가 자녀의 학벌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쌩돈'을 투여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추가된다. 하지만 여기서 드러나는 현실은 “자녀의 능력을 증진한다면 학벌이 없어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라는 종류의 진전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이 ‘쌩돈'을 부어 자녀에게 학벌자본을 준다 하더라도 당신이 돈이 없다면 그게 그 아이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류의 냉소적 진실이다.
‘학벌사회'는 폐해도 컸지만 한국 사회에서 계층상승의 사다리 역할을 하는 바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사다리의 시대는 끝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장사를 한다. 잘사는 집 아이들을 뽑아 그들을 선호하는 기업의 행태에 편승하여 학과 취업률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선전하고 서민층 가계의 등골을 빼먹는다. 언론은 자신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대학평가니 뭐니 해서 그 대학의 등골을 빼먹는다. 고려대 총학생회로부터 시작된 언론의 대학평가거부 운동이 있었다. 그 언론사의 대학평가란 걸 한국 사회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곳이 바로 <중앙일보>다.
▲ 24일자 중앙일보 8면 기사
계층상승의 가능성이 사라진 사회가 반드시 최악인 것은 아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도 계층이동성은 약하지만 노동자들은 자녀가 노동자가 되어도 만족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대우는 미미했으되 그 폭력성을 ‘계층상승의 가능성'으로 정당화해왔다. 많은 이들은 자신들도 계층상승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그것에 성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게으른 이들이며 자신이 받아야 할 몫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디자인을 다시 해야 할 문제이지 취업철에 학부모와 취업준비생들에게 훈계를 하고 끝날 문제는 아니다. <중앙일보>의 <학벌사회 깨지다> 특집이 분명히 공익성이 있지만 가린 부분과 그 한계가 명확히 보이는 것이 그 까닭이다. 특히 인문계 대학졸업자들의 취업률을 높이겠다면서 창업 운운하는 것은 편의성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사실은 창업을 하려고 해도 이공계가 더 유리하다. 하지만 이공계는 창업보다 취업이 낫다는 현실을 아니 인문계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유리한 그 취업을 택한다. 그런 상황에서 인문계에게 창업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 중 상당수를 신용불량자로 만들겠다는 발상과 다를 게 없다.
<중앙일보>가 기업의 이해만 대변해서는 전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도 많다. 스위스 모델을 제시하려 했다면 개개인이 아니라 기업들에게 대학에게 요구만 하지 말고 스스로 돈을 들여 직능훈련과정을 만들라는 요구를 강하게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앙일보>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하는 시늉만 한다. 사람들이 더 이상 학벌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신규 채용자가 적고 경제의 활력이 하강하고 있으며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게 된 현실은 그대로 남는다. 투박하게 비유하자면, '학벌사회 해체'란 현상은 ‘20 대 80의 사회’가 ‘1 대 99의 사회'로 재편하면서 나타난 시대의 풍경이다. 그러니 중앙일간지라면 ‘학벌사회'란 껍데기에만 표피적으로 집착하지 말고 이 재편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살펴야 할 것이다.
▲ 23일자 중앙일보 5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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