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가 어떠해야 한다,는 최상의 합의는 사실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지금은 저널리즘에 대한 냉소와 뉴스 외면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MBC ‘뉴스데스크’의 경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위상이 지금과 전혀 달랐다. 그 사이 MBC 뉴스의 무엇이 아주 정량적이고 세밀하게 달라졌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형식적으로 그 뉴스는 10년 전에도 그런 꼴이었고, 수년 전에도 엇비슷한 꼴이었으며, 지금도 꼴은 비슷하다. 범위를 넓혀, 못하기는 마찬가지인데 KBS 뉴스와 SBS뉴스와 그 뉴스의 차이는 결정적이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난망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뉴스의 거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허물어졌다, 뒤바뀌었다고 느낀다. 그 체감은 냉정하고, 보편적이다.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뉴스의 이름은 이제 ‘뉴스룸’이다. 제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의도는 명확하다. ‘미드’ 좀 본다는 이들에게 선풍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그래서 오피니언 리더들도 알게 된, 드라마의 제목이다. 설왕설래가 많았다. 소위 ‘선수’라고 불리는 방송가 사람들은 현재, JTBC 인력 구조에서 100분짜리 뉴스는 무모하단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러나 종편은 그 중에서도 JTBC는 그 무모함에 도전해봄직 했고, 한 가닥 기대로 또 도전해볼 수밖에 없는 상황임도 분명하다. 시청자들에겐 손석희가 곧 JTBC인 호의적 상황에서 연착륙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 채널의 안착은 끝내 불투명할지 모른다.

▲ JTBC는 뉴스룸을 홍보하며, 원제를 갖고 있는 드라마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왼쪽은 손석희 앵커, 오른쪽은 뉴스룸.

게다가 그 드라마에 열광했던 이들은 대체적으로 손석희 뉴스가 ‘타킷 오디언스’로 삼고 있는 시청층과 문화적으로 또 세대적으로 겹쳐진다. 다른 종편이 노인층을 위한 위무 채널로 어쩔 수 없이 굳어지고 있는 때에 JTBC가 다른 선택을 했다는 걸 이보다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또 없다. 손석희라는 불세출의 스타 앵커와 그(가 존재하기에) 자체를 시스템으로 해 길러질 수 있는 아이템들을 버무릴 최대치의 엔터테인먼트 포장지가 바로 ‘뉴스룸’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전의 뉴스에 비해 다소 헐거워졌다는 비판도 있었고, 시선집중과 백분토론을 합쳐 놓은 어정쩡한 포맷이라는 더한 비판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뉴스가 가장 볼만하다는 평가는 대세로 유지됐다. 평가 면에서는 순항 중이었고, 그 평가가 곧 방송의 그 밖의 가치들(시청율, 광고 등등)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 또 화제였다. 일각에서는 그 불일치가 손석희 뉴스에 대한 권력의 불편함이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니겠느냐는 추측과 추론들을 막 내놓기 시작한 상황이다.

20일 JTBC 뉴스룸에 서태지가 출연했다. 생방송 스튜디오에 나와 손석희 앵커와 약 30여 분간 대담을 나눴다. 손석희 앵커는 특유의 목소리로 “뉴스에서 생방송으로 인터뷰하는 건 처음이실 것 같은데, 모시게 됐습니다”고 소개했다. 그러자 서태지는 손 앵커에게 곧장 동안 비결을 물었다. 손 앵커는 “인터뷰는 제가 하기로 되어 있다”며 받았고, 이후 둘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갔다. 한국적 관습에서 그건 확실히 뉴스의 형식이 아니었고, ‘한 발 더 들어간다’는 심층 저널리즘을 표방하고 있는 JTBC 뉴스룸의 정체성에 견줘 봤을 때도 매우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 20일자 JTBC 뉴스룸 캡처

앞서, 서태지가 유재석이 진행하는 ‘해피투게더3’에 출연했을 때, 그 프로그램도 기존 형식을 허물어 서태지를 맞았다. 이를 두고 아이즈의 위근우 기자는 ‘거인과 거인의 대화’로 꾸며졌다고 평하기도 했다. 서태지와 유재석이 능히 예능프로그램에서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15일 JTBC 뉴스룸은 아예 서태지라는 ‘그레이트 거인’을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방송인 ‘그레이트 손석희’를 상정한 구성과 흐름 그리고 편성이었다, 이 전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뉴스의 능동적 변화인가.

이걸 그저 까칠하게 혹은 어떤 원론적인 입장에서 보려는 것은 아니다. 서태지가 능히 그럴 대접을 받을 위상을 갖고 있느냐 그렇지 않는가도 이 글에선 부차적인 문제다. 둘 사이의 대화가 종합뉴스를 표방한 프로그램의 소재와 정도로 적당했는가도 일단 제쳐두자. 다만, 손석희 등장 이후 타사 뉴스의 몰락 속에서 상대적 호평 일색인 JTBC 뉴스에 어제 그 선택이 어떤 위험한 신호는 아닌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상대평가의 강자가 된 JTBC 뉴스지만, 그 상대평가라는 것이 뭔가 왜곡된 기준이거나 혹은 상대평가에서 유리한 요소들을 JTBC가 무리하고 과도하게 끌어다 쓰고 있음이 간과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질문이다.

전체 뉴스의 1/3 가량을 서태지에게 할애하고, 그 할애된 시간의 상당수를 신변잡기류의 그러니까 아침 방송 토크쇼 수준의 정보와 재미로 버무려 개인에 대한 찬사와 호의로 범벅한 뉴스는 무슨 의미인가. 그가 ‘문화 대통령’이어서 그런 정도가 가능한 것이라면 거꾸로 그 ‘문화 대통령’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방식의 저널리즘 복무는 정당한 것인가. 지금 가장 많은 저널리즘적 찬사를 받고 있는 손석희 앵커는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단언컨대, JTBC 뉴스룸의 어제 선택은 다른 방송사의 뉴스들이 연성화의 길로 접어들며 택한 ‘시청률 집착’의 가장 극적인 형태였다. 타 방송사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담대한 편성을 JTBC가 한 것이 아니라 타 방송사가 그나마 눈치를 보며 조금씩 보폭을 그리로 옮겼던 데 비해 JTBC는 손석희라는 스타 앵커를 지렛대로 한 번에 훌쩍 뛰어넘은 셈이다. 손석희와 서태지를 경유하며 그것이 ‘시청률 집착’과 별 상관없는 문제처럼 보이게 만든 착시를 일으킨 점을 세련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편성을 ‘시청률 집착’외에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그 한 번의 선택으로 JTBC 뉴스의 시청률이 근본적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은 높지 않다. 서태지를 보기 위해 어제 JTBC를 틀었던 사람들이 오늘도 JTBC를 틀 것이란 보장은 없다. 다만, 하루하루의 어떤 요소들이 모여 방송이 만들어지고, 뉴스 전체의 색깔이 결정되며, 저널리즘의 수준으로 각인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선택은 당장의 것을 취하게 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선택이 여과 없이 채택되었단 점에서, 그 찬사 받는 뉴스룸의 앞날은 그만큼 위태로워진 게 아닐까.

▲ 뉴스 생방송 직후 손석희 앵커와 가수 서태지가 찍은 기념사진 (사진=JTBC)

앞서, 말했듯 찬사를 받던 시절의 MBC 뉴스와 지금 MBC 뉴스의 꼴이 얼마나 다른 것이냐는 쉽사리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지금 MBC 뉴스에서 관급 기사의 비중이 좀 더, 날씨 관련 보도의 배치가 좀 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정보의 위상이 좀 더, 그렇게 조금씩 더 미세하게 하루하루 조정되는 과정을 거쳐 완전히 다른 뉴스가 됐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연예 뉴스’로 당장의 화제를 쫓는 것은 ‘시청률 집착’에서도 가장 일차원적인 선택이다. 손석희 앵커가 모를 리 없는 저널리즘의 기본이다. 그 말초적 재미, 대중적 흥미에 복무하며 어떤 ‘재미’들을 달콤함을 느끼는 순간 뉴스는 그 유혹에서 하염없이 퇴행할 수밖에 없다. 연예인의 상품성이 곧 정보의 값으로 환산되는 방식의 회로라면, 좋은 뉴스의 척도는 곧 시청률 추이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데스크의 그 얄팍한 사고방식이 권력보다, 자본보다 더 무섭게 지상파 방송의 뉴스를 갉아먹은 ‘원흉’이었고, 손석희는 대중들에게 그걸 피한 ‘망명자’로 추앙받았다. 그런 그가 난데없이 그 경쟁의 전위에 선 모습은 불안해 보였다. 엔터테인먼트의 포장지 속에서도 손석희는 끝내 찬사에 부응하는 저널리즘의 실체를 지속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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