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돌림병이 돌고 있다. 엄청난 유행이라고 해야 하나? ‘소통’이라는 담론, ‘소통’이라는 수사, ‘소통’이라는 이데올로기다. 이쪽으로 가면 ‘소통’, 저쪽으로 가도 ‘소통’. 하도 서로 공명하고 상호 동조해, 귀가 먹먹할 정도다. ‘소통’은 이제 일종의 보편적 규칙, 상식적 원리, 일반적 도덕률이다. 대통령과 일반 대중 구분 없이 ‘소통’, 진보와 보수 상관없이 ‘소통’이다. 조중동과 비판매체 무관하게 ‘소통’이고, 좌와 우를 초월해서 ‘소통’이다. ‘소통’ 만만세다! ‘멋져요 ‘소통!’이다. 얼마나 ‘소통’의 말이 넘치는지, 짧은 연구를 해 보도록 하자. 우선 <다음>을 검색했다면 또 뭐라 할지 모르니 <네이버>를 고른다. 그리고 작위적으로 선별했다고 시비할 수도 있으니, 이번 주 딱 3일을 샘플 기간으로 정하자. 그래도 기사가 엄청 많고 지면도 제한되어 있으니, 일부만 고를 수밖에 없음을 양지해 주시길.

국방부가 누리꾼과의 소통에 나섰다. 경호처가 ‘국민소통’의 일환으로 <문화일보>의 ‘1사1촌’에 앞장서고, 사법부도 ‘국민과의 소통’을 늘리겠단다. ‘소통’의 대통령을 배출한 한나라당이 어찌 이 판에서 빠질 수 있겠는가? “원활한 소통구조를 형성”하기 위한 현역의원 호남 ‘명예지역구’ 제도를 추진한다. 자유무역 추진 전략 관련 당 정책토론회 이름을 ‘수요 정책 마당’으로 바꾼 것도 “국민과의 소통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참으로 친절한 여당씨. <세계일보>는 “환경단체 등으로부터 제기되는 ‘안전성’을 이해시키기 위해 국민과의 소통에 온힘을 쏟고 있는” 한국수력원자력을 소개하기에 말 그대로 온힘을 쏟고 있다. 이렇듯 모두가 소통에 분주하다. ‘소통의 장’을 마련하며, ‘소통구조’를 활성화하기 위해 힘쓴다. 브라보, 소통! 찬란한 민주주의가 이 땅에 굳건히 축조되고 있다. 희망찬 구호, 벅찬 감격!

▲ 10월 1일자 동아일보 30면 칼럼.

모두가 멋진 ‘소통’의 전도사로 나서셨다. 우후죽순 설립되고 있는, 공영방송을 ‘좌파’로부터 되찾아 ‘정상’으로 회복시켜 놓겠다고 벼르는 단체들도 ‘소통’을 내세운다. “좌파의 죄과에 대해 응징은 하되 어찌됐든 이들과의 대화와 소통에 나설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논리의 모순인가, 아니면 상황의 딜레마라고 해야 하나. 아니다. 말 그대로 읽는 게 맞을 성 싶다. ‘응징’하면서 ‘소통’하겠다는 거다. ‘소통’을 내세우면서 응징하겠다는 말일지도 모르고. 좌파식으로 말한다면, 물리적 지배와 환상적 이념의 기제를 동시 활용하겠다는 이야기다. 혹은 조셉 나이 같은 우파 국제정치학 교수의 말투라면, 딱딱한 권력(하드파워)과 말랑말랑한 권력(소프트파워) 둘 다를 병행하는 체제관리, 제도경영의 방법론. 그래도 일단 엑센트는 ‘소통’이다. ‘대화’에 방점이 찍힌다. 그렇게 보이도록 한다.

그런 모임 중 한 군데 적극 참여하고 있는 변희재씨께서 <동아일보>에 발빠르고 친절하게 취지를 밝혀놓으셨으니 꼼꼼히 챙겨 읽으시길. <미디어포커스> 폐지와 개선을 위해 좌파가 먼저 칼을 들어라, ‘폭력적 안티조선 운동’ ‘타락한 운동 방식’을 당장 폐기하라. 이러는 ‘실크로드 CEO포럼 회장’한테 그래도 마음에 드는 진보좌파는 있는 모양이다. “좌우언론 간의 벽을 허물자는 제안을 하고 나섰다”는 “최근 진보적 소장 언론학자”들을 가리키시나? ‘진정한 상생적 대화’를 꿈꾸시는 변 선생께 ‘소통포럼’ 발제내용이 꽤나 흥미롭게 들리셨나 보다. 하기야 “분열보다는 통합과 상생을 추구해야 한다”는 <미디어오늘> 김창룡 교수의 칼럼, 이에 “좌파와의 대화에 최선을 다한다”고 기꺼이 화답하는 미디어발전국민연합(미발연)의 변씨 공히 ‘소통’의 화두를 짊어지고자 나선 ‘소통포럼’과 잘 통할 것이다.

강준만 교수 등이 꾸민 ‘소통포럼’은 <한겨레>에게도 통하고 <중앙일보>로부터도 칭찬 받는다. 진보·보수합작의 착한 사마리안 집단? 물론 ‘소통’을 강조하는 게 어찌 ‘소통포럼’의 사람들뿐이겠나? 미발연이 아닌 미미연, 즉 민족미술인협회에게도 ‘사회소통을 위한 미술’이 화두고, 위기의 영화 제작자들에게도 관객에게 ‘소통되는 콘텐츠’가 문제인 모양이다. 위기의 전교조 위원장도 인터뷰에서 “학부모와 소통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PD수첩> 또한 이 시대의 소통 문제를 긴급하게 다룬다. ‘소통’을 통해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이념대결을 소화해내는 게 맞고, ‘소통’을 통해 대중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게 옳다는 지극히 당연한, 그래서 귀에 익숙한 말투다. 매우 착하고 선량하게 들리나, 끝나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공허한 약속들. 올바른 말씀의 올바른 반복, 그 지겨움. 다성적 언어의 일음적 수렴.

대중교통 저지, 민주언론 마비, 공개토론 불능의 현실과의 극명한 대비. ‘해피 투게더’. ‘소통’을 이 시대의 키 워드로 설정한 대통령께서도 한참 ‘소통’ 열공 중. <데일리안>은 “최근에 시골에서 오신 어떤 분이 ‘국민소통, 국회소통 얘기하던데 소통이 아니라 대통해야 한다”고 하더라는 대통령의 이야기를 옮긴다. 그럴 정도로 자신감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통령은 ‘국민’과의 좀 더 빈번한 ‘소통’을 위해 라디오에 출연하실 계획이란다. ‘노변담화’ 캠페인의 역사적 차용. 간혹은 사르코지를 닮고, 때때로는 부시와 비슷하며, 자주 대처를 떠올리게 하시더니만, 이번에는 대공황 당시의 루스벨트를 닮고자 함인가? 하기야 경제상황이 그 때와 많이 닮아있으니까. “국회와 소통할 자세 돼 있다”는 점도 빠트리지 않는다. 말 그대로의 전방위적 소통, 아 그래서 ’大通’하겠다는 거겠지.

‘소통’, ‘대통’. ‘소통’. 진보와 보수를 가로지르고, 좌와 우를 초월할 것 같은 ‘소통’. 대통령과 ‘국민’을 잇고, 먹물과 대중을 묶는 ‘소통’. 아, 그렇게 ‘소통’이 ‘대통’이 말처럼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행복한 나라’로 가기 위해서라도 ‘소통’의 원칙을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한다고 하겠지. 그런데 왜 내게는 이 셀 수 없는 ‘소통’의 담론, ‘소통’의 원리, ‘소통’의 도덕률이 공허하게 들릴까? 왜 그리 허무하고 허접하게 다가올까? ‘소통’의 중요성을 지각할 수 없는 둔감함? ‘소통’의 대세를 좇지 못하는 구태의연함? 인정과 관용의 태도 부족? 민주적 자질 미비? 모르겠다. 모든 게 불통의 현실을 왜곡하는 공허한 구호처럼 들리고, 먹통의 현실을 은폐하는 수사로 보이며, 침통의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처럼 느껴질 뿐.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사변적 유희, 현실과 무관한 말장난으로 이해될 뿐.

내게는 차라리 “여기는 증오의 비행기가 날고 있어요”라는 이길준 이경의 편지 이야기가 더 훨씬 더 실감나는 소통론이다. 교통대중을 위한 대중교통의 멋진 실천이다. 촛불집회 진압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선 그가 고발한다. “편견이 만든 편견에 의해 통제하여 통제되는 폭력적인 소통의 연계들을.” 아울러 엇나간 ‘소통’의 폭력, 일방적 폭력의 소통을 예리하게 간파한다. 그렇다. ‘소통’의 신화학, 폭력의 물리학을 정확하게 꿰고 있다. 그러면서 “소통은 삶의 기본 단위”라고 말함으로써, 이 이경은 매우 현실적이다. “소통을 하고 그 속에서 주체로 서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쓸 때, 지극히 현실적이다. 참으로 매혹적이면서 이론적이고 현실적인 소통론이다. “굴하지 않는, 야릇한 입자들의 꿋꿋한 활약을 응원합니다. 얍!”이라고 할 때, 인간을 위한 명랑한 소통 사회학은 감동적으로 마무리된다.

그래 ‘소통’을 말하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되야지. ‘소통’을 억압하는 현실의 권력과 대적하고, ‘대통’을 가로막는 현실 속 선전을 베어내며, 교통을 방해하는 현실적 폭력을 예방하는 활동과 함께 가며 떠들어야지. 왜 표현하는 대중이 잡혀가고, 교제·회집할 공간들이 폐쇄되며, 양심을 내건 기자와 피디들이 징계 받는지 우선 다그쳐야지. 대중교통을 침탈하는 권력의 증오, 시민사회를 제압하는 ‘공권력’의 공포, 민주언론을 방해하는 선전매체의 폭력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체 당신들이 말하는 소통론의 실체는 뭔가? ‘소통’을 원하고 말하고 갈망하는 자가 있다면, 먼저 진정한 대중교통이 가능할 조건, 참된 민주언론이 허락되는 환경, 올바른 공개토론이 허용된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하시라. 그러지 않고 ‘소통’은 단연코 불가능한 것. ‘소통’의 수사학을 줄이고, 민주적 교통의 물리학을 위해 매진할 것.

지금처럼 ‘비평의 무기’를 예리하게 연마하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할 때가 있을까? 벼락같은 이성의 도끼질, 결을 거스른 감수성의 대패질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래디컬’한 저널리스트로의 변신. 자본권력과 국가권력, 매체권력, 지식권력이 나의 상대다. 가끔 참패당하고 때로는 붙잡고 버티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왼손펀치 한방을 가진 선수로 남고 싶다. 인민은 착하고 또 무섭다. 이들과 함께하는 비평 말고 그 어떤 것이 후기근대, 후기자본의 불모지대를 넘어갈 수 있겠나? 목청 낮춘 채 예의주시하는 보통사람들의 삶, 이들의 언어에 스며들어 비평의 유격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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