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일방적인 패주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은 “조총 때문”이란 것이다. 당시 조선 선비들의 기록 역시 그렇다. 하지만 최근 전쟁사를 공부하는 이들은 조선군의 초기 패전의 여러 가지 원인들을 당시 사람들이 조총이라는 신문물을 핑계로 대며 분석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면밀히 분석하기는 어려움이 있지만, 전쟁사를 살펴보면 이런 종류의 ‘인지적 왜곡’이 적지 않다.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군 참모부는 패전의 원인을 “전차가 없기 때문”으로 돌렸다. 그들은 단지 전쟁사학도가 아니라 실제로 전쟁을 수행한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진심이었다. 그들은 독일군은 전술기동에 장점이 있는데, 참호전이 전개되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경우 그들은 끝없는 물자소모가 강요되는 총력전 양상의 현대전에 대한 '뒷바라지'에 관한 대비가 부족해서 졌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발휘하지 못한 전술기동의 장점을 극대화시키지 못한 걸 문제 삼고, 결국엔 전차가 없어서 패배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허무개그 같지만 발화자에겐 진심이다. 한국 야구의 발전이 지연되는 원인을 “돔구장이 없기 때문”으로 간단하게 정리하고 매사 ‘기승전돔’의 논리를 구사하는 어느 해설자의 말이 진심인 것처럼 말이다. 가령 햇볕정책의 옹호자와 대북강경책의 옹호자가 싸운다고 해보자. 햇볕정책의 옹호자는 햇볕정책이 지속적으로 추구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과의 화해협력과 평화협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반면 대북강경책의 옹호자는 그간 대북강경책이 지속적으로 추구되지 않았기에 북한 정권이 현재 핵을 가지고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현실세계에선 햇볕정책과 대북강경책이 교대로 추구되었기 때문에 서로의 말을 검증할 길이 없다.
정치영역에서 대부분의 문제는 이렇게 검증할 길이 막막하기에 옳고 그름을 확연하게 가릴 수는 없다. 그러나 ‘현명한’ 길과 ‘우둔한’ 길은 있다. 대부분의 문제는 총체적인 체질에 의해 발생한다. 현명한 분석은 그 체질을 개선할 길을 찾고, 우둔한 길은 체질개선을 대안으로 삼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원흉 내지 알리바이로 삼는다.
앞서 소개한 독일군 참모부의 경우, 총력전을 수행하기 위한 군수 보급 관리에 자신들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점을 숨기기 위해 전차 탓을 했다는 해석이 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인지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인지적 왜곡’이 된다. 트리플악셀로 주니어 시절을 제패한 한 피겨선수가 성인이 된 후 자신의 라이벌에게 자꾸 지는 이유를 “트리플악셀이 안 되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줄구장창 트리플악셀만 하다가 은퇴하게 되는 심리도 그러하다.
25일자 <한겨레> 8면 기사에 보도된 <야권은 ‘카톡전쟁’서 패했나>(인터넷 판 기사 제목은 <‘카톡방 정치’가 뭐길래…새누리에 무릎꿇은 새정치>)는 그렇게 볼 소지가 충만하다. 기사는 “1차 ‘트위터 대전’에서는 시민 자발성을 바탕으로 (진보세력이) 보수세력에 우위를 보였으나, 2차 ‘카카오톡 대전’에서는 심각한 열세를 보이고 있다.”라는 자료집 인용으로 출발한다. 새정치민주연합 홍보위원회가 24일 공개한 <그들은 어떻게 ‘카카오톡’을 ‘카더라톡’으로 변질시켰나>라는 자료집 일부라고 한다.
▲ 25일자 한겨레 8면 기사
전문가들은 여기까지만 들어도 화를 낸다. SNS 전문가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는 이에 대해 “기본적으로 소셜미디어에 대한 기본이해가 없다”고 일침을 놓았다. 유승찬 대표는 “소셜미디어와 SNS를 구분하지 않고 쓰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특징이다. 소셜미디어는 그야말로 미디어다. 자신이 작성한 글을 누군가가 구독하고 공개된 콘텐츠가 소비되는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이 소셜미디어다. 그런데 카카오톡은 기본적으로 폐쇄된 메시지다. 트위터가 문자메세지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공개한 미디어 플랫폼이라면 카카오톡은 문자 메시지를 공짜화한 메신저 플랫폼이라고 봐야한다. 그런 점에서 트위터와 카톡을 동일선상에 놓고 상관성 분석을 하는 것 자체가 오류라고 봐야 한다. 카카오톡에서 제한적으로나마 미디어 플랫폼이라 할 만한 것은 카카오스토리와 플러스친구(상업용) 정도인데 이 보고서는 그저 카톡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새누리가 카톡을 조직적으로 하는 것은 주목할 점이지만 ‘그래서 어쩌라고’란 반응이 나올 수 있다. 해법은 달리 나와야 하는데 온오프라인 통합 전략은 짜지 않고 카카오톡 탓만 하고 있다”라며 보고서를 세게 비판했다.
익명을 요구한 복수의 SNS 전문가들은 이 보고서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구구절절하게 지적한다.
첫째, 그들은 ‘트위터 대전’에서 이겼다고 말한다. 하지만 민주당은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트위터 대응 전략을 갖춘 적이 없다.

둘째, 카카오톡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결론은 새정치민주연합도 카카오톡으로 유언비어를 만들어 대응하자는 것인가? 대응책이 애매하다.

셋째, 재보선 패배와 세월호 특별법 불발이 카카오톡 여론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비약을 하고 있다.

넷째, SNS 분석 보고서에 데이터가 단 한 개도 보이지 않는 전무후무한 보고서다. 가령 ‘심재철 메시지’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몇 명한테 전달됐고 그 파급력이 얼마인지에 대한 조사결과가 필요하다. 그런 언급도 없이 보고서를 쓰는 것은 새정치민주연합이 얼마나 어이없는 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섯째,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이 보고서는 현재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의 면피용으로 기획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 카카오톡 홈페이지 화면 캡쳐 사진
다시 한번 말한다면, 문제는 기초체력이다. 중년들이 카카오톡을 대중적으로 사용하게 되고 이를 선거에 적극 결합하는 경향은 이미 2012년 대선 때부터 나타났다. 그렇다면 문제는 새정치민주연합이 중년 이상 대중에 접근할 조직과 논리가 없다는 것이지 ‘카카오톡 유언비어’가 패배의 원인은 아니다. 새누리당이 뭔가 공작을 했다 치더라도, 새누리당이 여론전에 있어 공중전 수중전 육박전을 다할 때 왜 새정치민주연합은 공중전만 했는지를 묻는게 정상이다. 아마도 그것은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역조직의 붕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지난 대선 이후 가진 토론회에서 나온 견해 일부를 인용한다면 이렇게 된다.
정당조직의 문제에 대해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의 비판도 뜨거웠다. 그는 “지역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보면, 대체로 자영업자와 노인과 주부가 중심이다. 그리고 자영업자의 경우 세대로 보면 50대 중반 정도가 많다”면서 “그런데 지구당이 사라진 이후 이들에게 접근할 방법이 사라진 것이 민주당의 현실”이라 설명했다. 그는 “이런 사람들에게 민주당의 당원들이 접근해서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설득할 논리를 당이 제공했는가? 아니면 당원이 자발적으로라도 논리를 계발하여 그런 이들을 설득할 열망을 당이 제공했는가?”라고 물은 후 고개를 저었다.

이소장은 “그렇기에 그 50대 중반의 자영업자들은 종편의 정치코너를 보면서 거기에 나온 논리들로 자신의 지지를 정당화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종편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이 있었기 때문에 반대투쟁을 했을 텐데도 막상 종편이 실행되고 난 다음엔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고 민주당의 안이한 대응을 질타했다.

그는 “민주당 대표는 리더십의 죽음이다. 한 명도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고 민주당 대표 거쳐 정치적으로 더 잘 된 사람이 없다”고 혹평했고 “지금껏 민주당이 추구한 개혁이 당원들에게 ‘왜 민주당의 당원을 합니까?’란 질문에 답변할 수 있게 해줬나. 그런 자긍심을 모두 앗아가 놓고 안철수에 대해 얘기할 때는 정당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한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이소장은 “민주당은 기본으로 돌아가 정당다운 정당으로 스스로를 재건해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자세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관련 기사 링크)
정치영역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내세우는 ‘패배의 알리바이’들이 명확히 잘못됐다고 단정할 증거는 없다. 애초에 정치영역은 그런 판이 아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이 자꾸 이상한 알리바이를 내세울수록 이들이 거듭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전망을 하는 것 역시 합리적이다.
그들의 주장을 돌이켜본다면, 그들 중 아무도 잘못한 것이 없다. 다만 새누리당이 카카오톡을 활용해 유언비어를 잘 살포하고, 우매한 대중이 그것을 믿었을 뿐이다. 그저 그것 뿐이라면, 어차피 ‘정의로움의 패배’가 결정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그 정당은 대체 왜 존재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째서 각자의 인생을 돌보는 것을 넘어 정치영역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말을 덧붙일수록 한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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