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최고존엄’으로 칭하는 듯한 대통령의 발언에 분위기가 일신되는 듯했으나, 새정치민주연합 김현 의원과 일부 세월호 유족들의 대리기사 폭행 논란으로 다시 보수언론으로부터 질타를 당한 상황이다. 20일 토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두 시간여 진행된 ‘성역 없는 진상규명 특별법 촉구 전국동시다발 촛불문화제’가 열리는 시기 광화문광장엔 여러 모습이 보였다.

▲ 20일 오후 7시경, <동아일보> 사옥 근처 보수단체 집회의 풍경 ⓒ미디어스
광화문광장에서 일정 거리 떨어진 <동아일보>사 사옥 바로 옆에선 보수단체들의 집회가 열렸다. 보수단체들의 집회는 세월호 특별법 촉구 촛불문화제가 열리는 저녁 7시경까지 진행되었다. “국회해산·조기총선”, “국회선진화법폐기” 등의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내건 보수단체들은 대리운전회사 CM송 같은 것들을 틀어놓고 야당과 세월호 참사 유족들을 조롱했다.
▲ 20일 오후 7시경, <동아일보> 사옥 근처 보수단체 집회의 풍경 ⓒ미디어스
▲ 20일 오후 7시경, <동아일보> 사옥 근처 보수단체 집회의 풍경 ⓒ미디어스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순신 동상 앞에는 세월호 유족들과 동조 단식자들이 있는 천막이 있었다. 이순신 동상 앞 배 형상의 상징을 부착한 천막에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 단식 46일째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적혀 있었다. 이순신 동상 바로 앞에선 분수대의 물이 솟구쳤고 많은 시민들이 그 양 옆을 지나다녔다.
▲ 20일 오후 7시경, 이순신 동상이 보이는 곳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 요구 서명이 이뤄지고 있다. ⓒ미디어스
▲ 세월호 참사 유가족 단식을 알리는 천막의 모습 ⓒ미디어스
▲ 20일 오후 7시경, 이순신 동상 바로 앞의 분수대의 모습 ⓒ미디어스
촛불문화제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감시하는 듯한 시선의 이순신 동상을 등진 세종대왕 동상 앞의 공간에서 열렸다. 7시경에는 인파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수백명으로 보였다. 그래도 행사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점점 불어나더니 ‘주최 측 추산 1천명’이 되었다가 ‘시민들이 봐도 1천여명 이상’의 규모가 되었다.
▲ 촛불문화제 시작 직전 단상의 풍경 ⓒ미디어스
▲ 촛불문화제 모습. 사진 중앙에 솟아 있는 등진 이순신 장군 동상이 <조선일보> 사옥과 <동아일보> 사옥을 쳐다보는 듯하다. ⓒ미디어스
문화제는 ‘세월호를 기억하는 부산경남지역 대학생들의 아름다운 동행’ “노란버스”의 합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노란버스” 행사는 20일부터 21일에 걸쳐 부산에서 출발하여 안산합동분향소와 광화문농성장을 방문한 후 촛불집회에 참석하고 부산으로 돌아가는 행사로 기획되었다.
합창 이후에는 시인 허은실이 “제망매- 흰 꽃들의 노래”라는 시를 낭송했다. 허은실 시인은 “세월호 참사 직후 쓴 시인데 아직까지 특별법이 제정되고 있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허은실 시인의 시낭송 이후엔 광화문농성장에서 27일째 단식을 하고 있다는 김홍술 목사가 올라왔다. 김홍술 목사는 부산 노숙인의 대부로 알려져 있으며 2011년 기독교대한복음교회에서 출교당한 바 있다. 김 목사는 “신앙의 문제로도 단식을 15일 밖에 한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며칠이 더 될 지는 모르겠으나 정신이 있는 한 유족들과 함께 (단식)하려 한다”고 발언했다.
▲ 부산에서 올라와 27일째 단식을 하고 있다는 김홍술 목사 ⓒ미디어스
이후 단상에는 원맨 밴드이자 프로젝트 그룹인 ‘더 프로젝트’의 최휘영씨가 올라왔다. 최휘영씨는 작사, 작곡, 단편영화 연출 등을 하며 음악과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최휘영씨는 본인이 만든 <말야>란 노래에 대해 소개했다. <말야>는 세월호 참사 당시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친구에게 벗어준 후 다른 친구를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던 단원고 2학년 정차웅군을 짝사랑하던 여학생의 편지 내용을 가사로 만든 노래다. 최휘영씨의 소개 이후 보컬을 맡고 있는 김수정씨가 무대에 올라와 <말야>를 불렀다. 행사가 진행되는 중 가끔 지나가는 외국인들이 공연모습이나 시민들이 촛불이 든 풍경을 사진으로 찍기도 했다.
▲ <말야>를 부르는 보컬 김수정씨 ⓒ미디어스
이후 주최 측이 “영석 어머님”이라고 소개한 한 세월호 유가족이 단상에 올라왔다. 세월호 유가족이 소회를 밝히는 중 단상에 가까운 곳에 있던 한 청년이 “대리기사는 왜 부르셨어요!!”라고 외쳤다. 주최 측으로 보이는 몇몇이 경찰에게도 적극적으로 항의하며 청년을 단상에서 먼 곳으로 데려갔다. 발언하는 유가족은 물의에 대해 사과를 표했다.
▲ 촛불문화제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는 모습 ⓒ미디어스
유가족은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힘들다. 농성장에 있으면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어 쟤네들 밥은 먹네’, ‘어 쟤네들 웃네’라고 한다. 우리도 밥을 먹을 때도 있고 웃을 때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것조차 조롱한다”며 농성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 유가족은 “유족들은 기본적으로 집이 대여섯채는 된다. 진도에 한 채, 안산 분향소에 한 채가 있고 집이 비싸다는 이 서울 땅에도 세 채가 있다”고 호소했다. ’서울의 집 세 채‘란 국회, 광화문, 청운동의 세 농성장을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
▲ 촛불문화제 대열의 뒤편에서 찍은 촛불문화제의 모습. 세종대왕상 아래로 단상이 보인다. ⓒ미디어스
유가족은 “주변의 가족과 친구들을 사랑하고 나머지 사랑을 우리에게 달라. 여러분에겐 아직 많은 기회가 있다. 우리는 이제 그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유가족은 “저희들이 실수를 했더라도 저희들의 진심을 믿어주셔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어서 단상에 올라온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이호중 교수는 “안전사회를 만드는 것은 세월호 특별법을 통한 진상규명 이후에 이뤄질 수 있는, 단계적인 일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호중 교수는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안전에 대한 기준들을 정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시민들의 연대와 소통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강연성 발언을 했다. 이호중 교수가 사회적 위험요소들을 시민들이 통제 및 관리할 수 있어야 된다고 말할 때 문화제에 참석한 상당수 시민들은 박수를 쳤다.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교 이호중 교수 ⓒ미디어스
문화제의 마지막 순서에 올라온 박래군 인권중심 사람 소장 및 세월호 국민대책위 공동위원장은 “유가족들은 사건 이후 자신들이 알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내가 80년대부터 만나본 수많은 유가족들이 그랬다. 집에 가도 일상이 찾아 오지 않는다. 16년 17년을 길러낸 아이들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박래군 위원장은 “방금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 후원 일일주점을 다녀왔다. 밀양 할머니들이 처음에는 자기 터전을 뺏기지 않으려고 싸웠는데 그게 굉장히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임을 알게 됐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노동자들이 자살할 때 밀양 할머니들이 서울로 올라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손을 잡으며 ‘우리 살아서 싸우자. 살아서 계속 싸우자’고 하셨다. 그리고 밀양 투쟁이 빨리 정리되면 전국의 투쟁현장을 돌 것이라고 했다”라면서, “세월호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투쟁하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사람이 많이 오지 않았지만 세월호 참사 200일이 되는 11월 1일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