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오전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도 그 도를 넘고 있다. 이것은 국민에 대한 모독이면서 국가의 위상 추락과 외교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라며 “가장 모범이 돼야 할 정치권의 이런 발언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혐오감을 주고 국회 위상 추락과 외교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는 지난 12일 새정치민주연합 설훈 의원이 국회 의장단 및 상임위원장단 연석회의에서 “대통령이 연애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새누리당 의원들이 크게 반발한 상황에 대한 논평으로 여겨진다.

또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삼권분립과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대통령으로 할 수 없고 (대통령이) 결단을 내릴 사안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이어서 박 대통령은 “이런 기본원칙이 깨진다면 앞으로 대한민국의 법치와 사법체계는 무너져 끝없는 법치주의의 근간을 훼손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대통령의 발언은 여러 모로 생각해볼 부분이 많다. 먼저 “대통령으로 할 수 없고 (대통령이) 결단을 내릴 사안이 아니다”란 발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는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할 일이라는 그간의 해명과는 다르게 대통령이 이 문제에 관해 뚜렷한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박 대통령은 세월호 특별법의 수사권과 기소권 문제에 관한 양보가 불가능하다는 가이드라인을 이미 제시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 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통령이 그랬을 것이란 것은 이미 부인에도 불구하고 예측된 일이기에 놀랍지는 않다. 그러나 대통령의 견해가 그렇다면 지금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세월호 유가족들 앞이다. 본인이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는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특별법으로도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철저히 할 것임을 스스로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설득하려고 노력해야 마땅하다.
대통령은 그럴 일이 아니라는 양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가장 선의적으로 해석하자면, 국회의 역할을 존중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대통령은 국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세비를 반납해야 한다” 국회가 공전하는 것은 세월호 특별법 때문이고 자신이 ‘가이드라인’을 내린 사안에 대해 유족들을 설득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국회 탓만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현재 경제 활성화의 불씨가 다소 살아날 기미가 보이고 있는데 경제 활성화 법안들이 통과되지 못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경제회복은 요원하게 될 것”이라고 “국민을 대신해 선택받은 국회와 정치권에서는 제 기능을 찾고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니 아무리 ‘유체이탈’ 화법의 달인이라지만 육체를 이탈한 유체가 안드로메다 은하계까지 날아간 것 같다.
설훈 의원의 발언에 대한 논평 역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일) 연애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는 설훈 의원의 발언이 뜬금이 없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이것이 ‘모독적인 발언’이라면, ‘대통령’과 ‘연애’가 붙어 있는 것이 모독이란 의미일까? 대통령은 ‘모태 솔로’들을 대변하는가? 혹은 ‘연애가 거짓말’이라고 하니 대통령의 연애할 수 있는 능력을 의심했다고 발끈하는 것일까? 대통령은 미혼이며 연애는 전적으로 그의 사생활의 문제다. 여기에 대체 어떤 종류의 모독이 있단 말인가.
▲ 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오후 청와대에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이완구 원내대표, 주호영 정책위의장,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 등 지도부를 접견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장 모범이 돼야 할 정치권의 이런 발언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혐오감을 주고 국회 위상 추락과 외교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란 벌언 역시 어이가 없다. ‘자라나는 세대’와 ‘국회 위상 추락’은 윤리적 보수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해 볼 수 있지만 ‘외교관계에도 악영향’은 어디서 튀어나온 맥락일까. 짐작가는 바가 하나는 있다. 한국 검찰의 일본 <산케이신문> 한국 지국장에 대한 수사 상황 말이다. 외교관계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런데 이것은 설훈 의원 탓인가, 아니면 대통령에게 과잉충성하는 검찰 탓인가. 박 대통령의 유체는 안드로메다를 넘어 기어이 우리 우주를 이탈할 셈인가.
누리꾼들은 당연히 과거 참여정부 시절의 새누리당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비하연극 <환생경제> 등을 호출해낸다. 박 대통령 본인이 야당 대표 시절 박장대소하며 즐긴 그 연극이다.
물론 참여정부 시절엔 사람들이 ‘대통령이 경박’하다 생각했는데 박근혜 정부 시절엔 ‘대통령 욕하는 이들이 경박’하다 생각하게 된 상황은 야권에선 단지 논리적 일관성의 문제로만 따질게 아니라 유권자의 심리를 분석해야 하는 사안이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이런 엄청난 말 뒤집기 속에선 ‘그 대통령’과 ‘이 대통령’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따져 물을 수밖에 없다. 참여정부는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정부가 아니었던가? 국정원이 댓글로 충성하지 않은 정권은 우습게 보였던 것인가? 박 대통령의 발언이야말로 대통령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과도한 조롱을 유발하면서 우리 사회의 갈등의 골을 더 깊게 만들고 있다.
▲ 세월호 참사 가족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16일 오후 국회 본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가 놀고 있기에 “세비를 반납해야 한다”고 일갈한 대통령은 근무시간 중 7시간의 행방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한다. 그 뒤에 무슨 큰 음모가 숨겨 있다고 믿지는 않을지라도 대통령의 ‘권위’를 챙기는데 급급해 유권자들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다. 그런 태도를 보이니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해 연애 스캔들 비슷한 것을 접목하려는 시도가 생긴다. 전형적인 ‘권위가 없는 권위주의’의 모습이다.
청와대에서 유유자적하는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누리꾼들은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라는 발언을 포개기도 한다. 그런데 대통령의 지금 행태는 절대왕정의 그것과도 거리가 멀다. 대통령을 임금에 비유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지만, 기껏해야 통치를 회피하는 ‘통나무 임금님’으로 보일 따름이다. 입헌군주제하 영국 군왕을 가리키는 말인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가 더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이대로라면 “짐이 곧 국가”이기는커녕, 대통령이 “국가의 짐”으로 보일 상황이다.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국회를 비난하는 것 외에 할 일이 없다면 세비만 챙기지 말고 광화문 광장으로 나오실 일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실 거란 것을 너무 잘 아니,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의 임기를 존중하는 기자는 ‘가장 모범이 되어야 할 정치권의 언어’를 빌려 딱 한 마디 하겠다.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행하다. 대통령 눈에는 (야당이 패배한) 선거(결과) 밖에 안 보이느냐”
-2007년 1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원포인트 개헌안’에 대한 정치인 박근혜의 발언. 현재의 맥락에 맞춰 괄호안을 채워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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