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헌 ·천기흥 ·이진강 ·신영무 등 4명의 역대 대한변호사변회 전임회장들이 1일 대한변협을 방문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지원하더라도 법치주의에 입각해 하라"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전달했다. 의견서는 "세월호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는 것은 형사사법의 대원칙에 위반되는 것은 아닌지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며 "그런데도 변협 집행부가 편향된 시각을 담은 입법안을 제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의견서엔 이들 외에 김두현·박승서·함정호씨 등 다른 전직 변협회장 3명도 이름을 올렸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보수언론들은 그야말로 신이 나서 사설을 써댔다. 하지만 역대 변협 전임회장들이 보수적 정치성향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로서 표현에 신중을 기했다면 이들 사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앞뒤에도 안 맞는 ‘춤추는 필봉’을 선보였다.
▲ 2일자 동아일보 2면 기사
2일자 <동아일보>는 <민변이 접수한 변협, ‘反법치 세월호법안’ 만든 책임 크다>란 제목의 사설에서 “유족들이 강력히 요구하는 조사위의 수사권과 기소권 부여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직접 처벌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력구제(自力救濟) 금지라는 문명국가의 법질서에 위배될 뿐 아니라 대형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피해자들이 같은 요구를 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주장했다. 도대체 왜 역대 변협회장들이 세월호 특별법에 반대하면서도 “형사사법의 대원칙에 위반되는 것은 아닌지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고만 적었는지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일도양단, 무식의 칼춤사위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조선일보>는 조금 덜 막나갔다. <조선일보.는 2일자 사설 <대한변협, 편향된 입장 고수하려면 '시민단체'로 가야>에서 “세월호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기소권을 주는 것에 대해 법조계에선 반대가 많지만 일부 찬성 의견도 있는 게 사실이다. 피해자 단체가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에 그런 권한을 주는 것은 '피해자가 스스로 심판할 수 없다'는 형사법 원칙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많다. 그런가 하면 피해 당사자 측이 수사·기소권을 남용하지 못하게 차단 장치를 마련하면 수사·기소권을 줄 수 있다는 소수 의견도 있다”라고 주장했다. 대립된 의견에서 다수를 점유하려는 집요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런데 그들이 적은 바, 전임회장들의 의견서엔 7명의 변호사가 이름을 올렸다. 또한 그들이 적은 바, “위철환 회장을 비롯한 변호사 1044명은 7월 25일에도 ‘여당은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기소권을 주는 것이 형사사법 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건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는 특별법 제정 촉구 선언문을 냈다”라고 한다. 7명이 다수이고 1044명이 소수라는 논리다. 얼마나 궁색했는지 “무엇보다 전체 변호사 1만7800명 가운데는 변협 집행부와 다른 견해를 가진 변호사가 많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조선일보>도 물어본 적이 없으면서 ‘소수’와 ‘다수’를 멋대로 재단한다.
▲ 2일자 조선일보 2면 기사
물론, 변협이 회원들의 의견수렴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는 주장은 일리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이 지난한 세월호 특별법 정국에서 우리가 변협 현 집행부의 민주적 운영 여부까지 중앙언론사 사설에서 화제로 올려야 하는가. 현 집행부는 최초의 직선제로 선출된 집행부라 한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민주적 정당성은 있는 것인데, 박근혜 정부의 ‘여론을 무시한 불통’에 핏대를 올린 적 없는 조중동이 변협이란 일개 단체 내부의 민주주의에 이토록 관심을 쏟는가. <조선일보>는 “변협이 특정 세력에 편향된 주장을 하려면 법정 공익단체의 지위를 포기하고 시민운동 단체로 나서는 게 옳다”고 ‘막말’을 늘어놓았지만 이런 수준의 주장을 하려면 <조선일보>를 중앙언론사가 아니라 보수적 변호사들의 주장을 대변하는 변협 내부 소식지라고 선언할 일이다. 사설 말미에서 “변협이 내부 여론을 충분히 듣지 않은 것도 문제다”라고 말한 <중앙일보>도 대동소이하다.
그래도 <중앙일보>가 개중 제일 세련되었단 것은 분명하다. 2일자 <중앙일보>는 <대한변협의 경솔한 세월호특별법 추진방식>란 제목의 사설에서 “특위에 수사·기소권을 부여하는 것은 법조계에서도 논란이 일고 있는 부분이다. 법리 여부를 떠나 기존의 특별검사제도를 활용하면 충분하다는 의견도 많다”라고 지적했다. 문제제기를 한 이들이 있으니 ‘논란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형사사법의 대원칙에 위배되느냐 여부를 떠나 현행 특별검사제도로 충분하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현재의 지난한 세월호 특별법 정국에서 변협의 내부 운영 문제를 중앙일간지가 사설로 지적하는 것은 지나치게 지엽적인 문제제기다. 변협을 흔들어 유가족들이 지지하는 세월호 특별법의 정당성을 훼손하려는 정치적 의도 밖에 읽을 수 없다.
▲ 2일자 중앙일보 6면 기사
<동아일보>의 다음 사설 구절은 허탈함을 넘어 웃음마저 나오게 한다. <동아일보>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 인권 탄압에 성명을 발표하는 등 정치적 중립성을 인정받아온 변협이 편향적으로 바뀐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해 2월 직선으로 처음 당선된 위철환 협회장이 선거 과정에서 민변의 도움을 받으면서 집행부 구성과 운영에 민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게 됐다”라고 한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인권 탄압에 성명을 발표하는’ 행위를 보수언론이 언제 ‘정치적 중립성’으로 봐줬단 말인가.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했을 성향의 변호사들이 ‘민변’이 아니면 대체 누구란 말일까.
이들 신문의 사설을 읽지 못한 채 쓰여졌을 것이나 전임 변협회장들의 ‘흔들기’에 대한 <경향신문>의 사설은 음미할만하다. 2일자 <경향신문>은 <세월호 가족 돕는 변협을 흔들지 말라>란 제목의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변협은 세월호 참사 발생 직후부터 피해자와 가족들에 대한 법률지원을 맡아왔다. 그 일환으로 진상조사위에 독립적 지위를 부여하고 수사·기소권을 보장하는 내용의 세월호특별법안을 입법청원했다. 성역없는 진상규명을 염원하는 세월호 가족의 뜻을 반영한 것이었다. 변협의 이러한 활동은 지극히 온당하다. 변협 웹사이트를 보면 ‘변호사는 공공성을 지닌 독립된 법률전문직으로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할 사명이 있다’고 규정돼 있다. 영미권에서도 변호사를 지칭하는 ‘애드버킷(advocate)’은 본래 ‘옹호자, 지지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변호사는 누구를 옹호하고 지지해야 하는가. 강자, 부자, 다수자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약자, 빈자, 소수자는 그러기 어렵다. 변호사가 옹호하고 지지해야 할 사람은 바로 이들이다. 불의의 참사로 혈육을 잃은 세월호 가족이야말로 변호사가 손 내밀어 마땅한 사람들이다. 특별법 제정을 지원하는 변협의 활동을 정치적 중립성이란 잣대만으로 재단할 수 없는 이유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지난 8월 29일 세월호 유가족 뒤에 ‘배후조종세력’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들은 세월호 유가족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지는 진상조사위원을 추천하는 행위마저도 ‘피해자가 가해자를 조사하는’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유가족이 아닌 다른 이들이 나서야 될 텐데, 다른 이들이 끼어 있으면 ‘배후조종세력’이라고 한다. 피해자가 조사하는 건 안 되고, 다른 이가 끼어들면 ‘배후조종세력’이 된다면 남는 건 국가권력과 가해자들 뿐이다.
국가권력의 문제를 파헤치기 위해 시민사회가 성역 없는 수사의 권리를 요구하는데 ‘피해자’나 ‘배후조종세력’은 안 된다고 한다. 남는 것은 ‘셀프 조사’요 치부를 덮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일 뿐이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이 박근혜 정부로만 소급되진 않을 것이며, ‘과거 정부의 적폐’의 소산이라는 대통령의 발언은 충분한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래서야 ‘적폐’가 청산된다고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미래에 또 참사가 일어나면 박근혜 정부 역시 ‘적폐’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중앙일보> 사설의 주장처럼,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설득은 ‘상설특검제로도 유가족 안과 동등한 수준의 효과를 낼 수 있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이러한 예외적인 사건에서 유가족들이 정권도 여당도 야당도 불신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원하거나 납득하는 안을 받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굳이 다른 안으로 설득해야 한다면 어찌해서 정부 여당이 처음부터 최선을 다해 유가족에게 그와 같은 취지의 설득을 하고 양해를 구하지 않았는가. 눈물을 흘리던 대통령은 어째서 선거 한번 이기더니 딴 나라 딴 세상 사람인 것처럼 ‘나 몰라라’하고 있는가. 보수언론이 이와 같은 발언을 하지 못하고 정치적 이해득실이나 따지며 변협이나 때리고 있는 모습은 추하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조사가 대체 무슨 이념적인 부분이 있기에 이런 식으로 정파적으로 반목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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