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시간을 돌아온 <더 기버:기억전달자>

북미 박스 오피스 소식에서 말했다시피 <더 기버: 기억전달자>는 시류에 편승한 영화입니다. 많은 영화처럼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고, 최근만 하더라도 <헝거 게임>부터 <호스트>와 <다이버전트>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세계관 또는 주제를 가진 걸 자주 접했습니다. (조금 더 멀리 가자면 소설이 원작은 아니지만 <이퀼리브리엄>도 있습니다) 물론 원작은 <더 기버: 기억전달자>가 훨씬 더 전에 나왔지만 영화화가 되기까지 오래 걸렸다는 건 악재입니다. 지도자들이 청소년들을 다스리면서 동일한 복장을 입히고 각자의 의사와는 전혀 별개로 일방적으로 정해진 직업을 부여한다는 설정은 <다이버전트>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주인공의 성별이 여자에서 남자로 바뀌었을 뿐이지 눈이 가려진 세상에서 구원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도 동일합니다. 이런 영화는 죄다 청소년에게 영웅 노릇을 시키고 있는 걸 보면 기성세대를 향한 신세대의 심리를 대변한 건지, 빌어먹을 세상을 제발 좀 바꿔달라고 비겁하게 뒷짐 진 채로 주문하고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더 기버: 기억 전달자>는 여기에 <매트릭스>가 촉발시켰던 '세상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섞었습니다. '커뮤니티'라고 불리는 영화 속 세상은 평화와 공존을 기본 질서로 하여 이뤄진 유토피아와도 같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스스로 자초할 참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거의 모든 구성원의 감정과 감각을 거세하고 얻은 성과였습니다. 덕분에 전쟁, 고통, 차별, 가난, 기근 등의 비극은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반면 가장 인간다운 감정이자 성장과정에 있어 필수적이랄 수 있는 희로애락도 덩달아 없어졌습니다. 없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존재한 적조차 없는 것처럼 됐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막 학교를 졸업한 조나스는 기억보유자라는 직업을 받고 기억전달자를 만나서 인류의 역사를 사사합니다.

중과부적

이제부터 <더 기버: 기억전달자>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추정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조나스는 제프 브리지스가 연기한 기억전달자로부터 '인간다운 것'의 정의를 배우면서 자신의 의식을 일깨웁니다. 이내 그는 불만이라곤 없는 세상이었지만 모든 것이 강제로 이뤄졌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저항하고 봉기하기에 이릅니다. 일전에 말했다시피 사실 이런 이야기는 이제 진부할 대로 진부합니다. 고로 <더 기버: 기억전달자>처럼 색다를 것이 별로 없는 이야기를 가진 영화에 가장 필요한 건 당연히 연출입니다. 설사 완벽하게 같은 이야기일지라도 어떻게 보여줄지에 따라서 다른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건 각종 리메이크에서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필립 노이스에게 이 영화는 꽤 버거웠던 것 같습니다.

감정과 감각 등의 보유 여부를 흑백과 컬러의 전환으로 표현한 건 조금 돋보입니다. 물론 이 역시도 아주 새로운 건 아닙니다. 당장 떠오르는 영화만 해도 1987년의 <베를린 천사의 시>와 1998년의 <플레전트빌>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는 영상을 '인간다운 감정의 생성'과 연결지어서 표현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1991년의 <카프카>에서 사용한 방식과 닮기도 했습니다. 세 영화와 다른 게 있다면 <더 기버: 기억전달자>는 조나스가 인류의 역사와 이를 통한 감정 및 감각을 습득할수록 차차 색을 더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를 제외하면 필립 노이스에게는 칭찬할 게 별로 남지 않습니다.

우선 <더 기버: 기억전달자>에는 한 가지 커다란 구멍이 있습니다. 커뮤니티는 어디까지나 철저한 통제와 관리로 유지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싹을 틔울지 모를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매일 주사까지 맞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최상위 지도자는 조나스가 전달받기로 한 '기억'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면서도 주시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어린 시절에 기억전달로부터 겪었던 것인데도 말입니다. 곳곳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카메라도 있지만 수수방관이었고 나중에 일이 터진 후에야 그걸 확인하고 수습하려 합니다.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굳이 이걸 지적하는 건, <더 기버: 기억전달자>는 그만큼 세계관의 통일이나 일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지자면 족히 십여 개는 더 지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가족간의 것이든 연인간의 것이든 '사랑'은 없으면서도 친구와의 '우정'은 있습니다. 정말 미래가 오면 이렇게 선별적으로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가능한 걸까요? 아니, 그게 가능하다면 왜 부정적인 감정만 없애지 않았을까요? 탐욕, 질투, 증오 등만 사라져도 충분하지 않나요? 설상가상 결말에 다다르면 이 우정은 상당히 중요한 장치로서 작동하지만 참 뜬금없는 변심에 기대고 있는 게 고작입니다. 이를 비롯해서 필립 노이스의 연출에서는 성의라곤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더 기버: 기억전달자>의 원작이 아동문학이라고는 하지만, 철학적이고 심오한 소재와 주제를 품었으면서도 영화는 지극히 할리우드스럽고 편의주의적인 연출로 얼버무리고 있는 격입니다. 인물의 심리변화를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이지 않는 게 결정적이고 절정부는 그야말로 심각한 수준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만병통치제?

조나스는 기억전달자로부터 아주 오래 전의 인류가 어떤 생활을 영위했었는지를 봅니다. 단지 이것만으로 그는 과거가 현재보다 낫다고 받아들이면서 혁명을 꾀합니다. 전쟁의 참상을 통해서 인류의 폭력성을 봤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고자 목숨을 건 도박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이건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저는 오히려 <더 기버: 기억전달자>의 세상을 보면서 "어? 저런 세상이면 꼭 나쁘지만은 않겠는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이 영화는 허울 좋은 현실과 극단적 이상의 차이에 대해서 그 어떤 고뇌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오~ 인간의 아름답고 다채로운 감정이 있던 과거야말로 진짜 삶이다!!!"하고는 단숨에 현재를 부정합니다. 과연 정말 그럴까요? 길게 말할 것도 없고, 당장 몇 푼의 생활비가 없어서 동반 자살을 택해야 했던 일가족의 영정에 가서 한번 그렇게 얘기해보세요.

더 가관인 건 기억전달자가 지도자를 설득하면서 하는 말이라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야!"가 고작이란 것입니다. 다른 대책 따위는 전무합니다. 그냥 사랑이 필요하니 세상을 바꾸자고 합니다. 맙소사!, 정말 그걸 호소하지 못해서 다들 까마득한 시간을 통제와 관리로 살아왔다는 걸까요? 더군다나 기억전달자는 조나스 같은 사람이 오길 바라면서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고 합니다. 마지막에 조나스가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는지 보시면 기억전달자의 태도에 콧방귀만 뀌실 겁니다. 그가 무력한 기성세대의 상징이라고 치부하기엔 결말이 참으로 허무맹랑해서 도통 공감할 수가 없습니다. <더 기버: 기억전달자>가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으려면 <헝거게임>과 <다이버전트>처럼 나눠서라도 밀도를 높였어야 합니다.

그래요, 세상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건 저도 100% 동의합니다. 하지만 정말 세상에는 오직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까요? 따라서 영화 속의 지도자는 마냥 악당일까요? 천만에요. <더 기버: 기억전달자>를 보면서 사랑만이 전부라고 믿게 된다면 둘 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순백의 눈으로 뒤덮인 벌판에 티끌이라곤 하나 없는 것 같은 순진한 심성의 소유자거나, 이 영화가 자신의 힘은 보잘것없으면서도 거의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 다큐멘터리 화면에 현혹되신 탓일 겁니다. 다시 말해서 <더 기버: 기억 전달자>는 신중히 접근해야 할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오로지 관객의 감성에만 호소합니다. 아기까지 동원했기 때문에 호응을 얻을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비유자하면 작금의 대한민국이 바다에 수백 명의 청소년을 수장시키고도 단숨에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발표한 것으로 얻은 효과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적폐'를 운운하면서도 정작 문제와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할 의지는 보이질 않고, 아주 손쉽게 그 싹을 괴멸시키는 것으로 충격요법을 가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젠 군대에서 참상이 일어나자 해당 부대를 없애겠다고도 엄포를 놓았습니다. 참 재미있는 나라에요. 이게 영화 속 세상이 인간의 감정과 감각을 모두 없앤 것과 다를 게 무어란 말입니까.

★★☆

덧 1) 테일러 스위프트가 깜짝 등장합니다. 얼굴을 제대로 보여줘서 모를 리는 없겠지만 찰나라서 아쉽더군요.

덧 2) 원작 덕분에 근사한 은유가 더러 있습니다. 썰매를 타고 눈이 수북하게 쌓인 언덕을 내려가는 것이 처음 전달받은 기억이란 게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억'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하지만, 어쨌든 조나스가 받는 수업을 통해서 본연의 인간됨을 알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 눈썰매를 타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그가 기억전달자로부터 얻는 모든 것은 눈이고, 썰매를 타고 그 눈이 쌓인 언덕을 내려가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눈썰매를 타면 짜릿한 기운에 환호성을 지르지만 역으로 크게 다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을 알아간다는 것도 바로 그렇습니다. <더 기버: 기억전달자>가 이것만 충실하게 담았더라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야기의 정수를 완전히 간과했습니다.

덧 3) 영화든 원작이든 성경을 모태로 삼고 있습니다. 평화롭기 짝이 없는 커뮤니티는 에덴이고, 조나스와 그가 흠모하는 친구인 피오나는 아담과 이브의 현신과 다름없습니다. 획일과 몰개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세상에서 조나스는 자유의지를 갈구했고, 지도자는 인간이 결정권을 가지면 잘못된 행동을 하기에 그것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노아>가 뭘 말했었는지와 연결지어서 생각해보세요) 조나스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한 최초의 대상은 피오나였지만, 그것이 붉은 색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사과였습니다. 그는 자유의지를 얻기 위해서 사과를 이용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성경의 선악과와는 달리 이 사과는 남자(조나스)에게서 여자(피오나)로 건네집니다. 반대로 지도자는 또 여자인 걸 보면 관점이 참 독특합니다. 조나스가 지키려고 한 아기의 이름이 가브리엘이란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죠.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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