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7회 BICOF(부천국제만화축제)의 메인 전시였던 ‘만화, 시대의 흐름’에서는 각 시대를 상징하는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열풍을 타고 출간된 다양한 만화들이 눈에 보인다.

한국에는 크게 두 개의 만화축제가 있다. 서울에서 열리는 SICAF(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과 부천에서 열리는 BICOF(부천국제만화축제)가 바로 그 유이한 만화축제이다. (강원도 춘천에서도 축제가 열리나 행사 규모 등의 문제로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BICOF는 한동안 SICAF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1995년 가장 먼저 막을 연 SICAF에 비해 규모나 행사의 질적인 수준에서 매번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한창 전성기 때는 매번 COEX에서 가장 큰 전시관인 태평양홀(현, A관) 전체를 대관하였고, 잠시 주춤했을 때도 SETEC 전관을 대여하는 등 압도적인 전시 규모를 자랑했다. 반면 BICOF는 2009년 전까지는 전문적인 전시 공간이 아닌 복사골문화센터 건물 일대 정도를 사용했을 따름이다. 당연히 참여하는 업체의 수나 전시의 규모에서도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점점 구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SICAF는 2000년대 중반 이후로 계속 규모가 축소되더니 한동안은 서울캐릭터라이선싱페어와 동시기에 열리면서 행사가 A관 대신 가장 작은 D관(구, 컨벤션홀)에서 개최되었고 행사에 참여하는 업체들도 SICAF보다 더 규모가 크고 인기가 좋은 캐릭터라이선싱페어로 대거 이동하였다. 2013년 이후로는 서울시의 지원도 대폭 축소되면서 현재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위치한 남산과 근처 명동 일대에서 열리고 있는 판국이다. 반면 BICOF는 2009년 행사를 주최하는 기관의 이름이 부천만화정보센터에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으로 바뀌는 동시에 새롭게 건물을 마련하면서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면서 전시나 부대행사를 준비하는 것에 여유가 생겼다. 점점 행사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고, 행사의 질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2014년, SICAF와 BICOF는 최소한 ‘만화축제’라는 점에 있어서는 위상이 역전당했다 평가해도 할 말이 없??것으로 보인다. 처음으로 남산-명동 일대에서 열린 2013년 SICAF에서는 구색을 맞추려는 티가 나도 최근 만화의 트렌드를 맞추려고 노력하려는 자세가 보였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윤태호의 만화 <미생> 특별전과 디지털 콘텐츠 특별전을 개최하는 등 줄어든 규모에 맞게 적응하려는 모습이 느껴졌다. 그리고 2013년 행사가 끝나고 몇 달 후 명동에 만화전시공간 ‘재미랑’이 개관해 최소한 내년 행사 공간을 마련하는 것에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터였다.

하지만 2014년의 행사는 오히려 작년보다 퇴보했다는 인상을 줄 뿐이었다. 장수 만화 <열혈강호>의 연재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제외하면 왜 이 전시가 SICAF에 존재해야하는지 이유를 알기 어려운 전시들로 가득했다. 물론 한국에도 잘 알려진 공포 만화가 이토 준지나 <맛 일번지> 등 음식에 대한 만화를 오랫동안 그려온 쿠라다 요시미에 대한 전시는 만화에 관심있는 이들은 물론 보통 사람들에게도 구미를 당기게 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둘이 유명한 것과 별개로 과연 이들의 작품이 현재의 경향에 맞냐는 것이다. 분명 두 만화가 모두 한국에서 잘 알려져 있으나 최소한 한국 기준으로 2014년에 책은 단 한 권도 나오지 않은 상태였고, 화제성도 상당히 떨어져 있던 상태였다. 과거의 만화를 보여주는 것에 적합할지는 몰라도, 현재의 만화를 보여주는 것에는 어울리지 않던 행사였다. 또한 SICAF는 이토 준지 작가의 사인회에 대한 신청을 받는 과정에서 많은 실수를 보여 과연 SICAF가 한국에서 오래된 만화축제가 맞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들게 만들었다.

▲ BICOF에 맞추어 임시로 제작된 특설 전시관에서 개최된 ‘특설만화마켓관’에서는 다양한 만화 관련 회사나 단체와 함께 아마추어, 동인 작가들의 부스도 함께 설치되어 한국 만화의 경향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하였다.

반면 BICOF는 한국 및 세계 만화의 다양한 경향을 보여주면서 작년보다 확실히 진전한 모습을 보였다. BICOF의 전시를 크게 정리하자면 역사와 경향을 설명하는 전시, 작품 자체에 초점을 맞춘 전시, 그리고 기술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 전시로 구분지을 수 있다. 올해 BICOF의 메인 전시인 ‘만화, 시대의 울림’이 바로 한국 만화의 역사와 경향을 모두 담은 전시였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각 시대를 상징하는 만화를 소개한 이 전시는 실제 한국의 역사와 함께 당대 어떤 만화들이 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며 만화가 시대상을 어떻게 담고 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었다.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몇 안 되는 즐길거리에서 반공 등 권위주의 국가에서 전파하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로써, 그리고 노동-사회단회나 사회 참여적 시각을 갖고 있던 작가들이 주장을 전달하고 사회를 그려내는 역할로 변해가는 맥락을 전시는 짚고 있었다. 또한 세월호 사건에 맞춰 편성된 ‘노랑, 희망을 노래하다’ 전시는 비록 별다른 해설이 없어서 아쉬었지만 사건이 터진 이후 지금까지 어떤 만화가 나왔는지를 한번에 볼 수 있던 장이 되었다. 독고탁 시리즈로 유명한 이상무 작가가 소장하던 자료를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기증한 것을 기념하여 열린 ‘돌아온 독고탁!’ 전시는 BICOF 이전에 단독으로 개최되던 전시를 임시 편입시킨 것에도 불구하고 독고탁 시리즈의 역사를 다룸으로써 한국 만화와 사회의 역사를 알 수 있던 전시였다.

작품 자체를 다룬 전시로는 세 가지의 작품을 대상으로 한 전시회가 열렸다. 작년에 완결된 동시에 부천만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한국에 내한해 필자와 인터뷰를 나누었던 (▷ 인터뷰 보기) 엠마뉘엘 르파주 작가의 <체르노빌의 봄>, 19명의 작가가 참여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만화 <지지 않는 꽃>이 전시를 통해 소개된 작품들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어린이가 아닌 일반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교양만화로써는 압도적인 판매고를 자랑한 작품인 동시에 단순히 실록을 만화로 그리는 차원을 넘어 시대의 맥락을 함께 그려낸 작품이었다. <체르노빌의 봄>은 작기가 직접 체르노빌에 다녀와 체르노빌의 현재와 원자력의 위험성을 경각시키는 작품이자 르포만화의 현재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지지 않는 꽃> 역시 현재진행형인 위안부 문제를 환기하는 만화이다. 주로 만화의 컷을 재구성한 방식으로 진행된 이들 전시는 작품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작품에 대해서 신속한 이해를, 작품을 아는 이들에겐 만화의 원화 등을 같이 전시해 더 깊게 빠져들 수 있는 장을 만들었다.

전시 외 행사에서도 BICOF는 만화에 더 충실한 모습들로 가득했다. 특히 컨퍼런스가 매우 중요했다. 올해 BICOF에서는 총 여섯 개의 컨퍼런스가 개최되었다. ‘학술대회’의 이름을 단 컨퍼런스에서는 한중일 만화 연구자를 초청해 각 국가별 만화계의 현재상을 다루는 동시에 박재동, 김성환, 박기정, 박순찬과 같이 신구 시사만화가를 초청해 시대정신과 시사만화 간의 관계를 조망하였다. 작가들을 초청하여 서로 간의 이야기를 듣는 ‘스페셜 대담’에서는 <체르노빌의 봄>의 엠마뉘엘 르파주, <어느 아니키시트의 고백>의 스토리를 맡은 안토니오 알타리바, <사람 냄새>의 김수박, <먼지 없는 방>의 김성희 작가를 초청해 그들이 최근 주로 작업하고 있는 르포 만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대담에서는 <나쁜 친구>의 앙꼬, <내가 결혼할 때까지>의 노란구미, <내 어머니 이야기>의 김은성을 초청해 여성의 삶을 다룬 만화이자 자전적인 자신들의 만화에 대한 이야기의 장이 열렸다.

실제 기술이나 테크니컬한 면에서도 충실했다. 최근 유행하는 3D 프린터가 어떻게 만화와 만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세미나와 미국 마블 코믹스에서 실제 활동하는 편집자와 만화가이자 만화를 대상으로 한 미디어믹스에 관여한 이들을 초청해 만화 생태계에 대한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기업들이 주로 참여한 ‘특설만화마켓관’에서도 실제 활동하는 만화 회사와 함께 동인 활동을 하는 부스를 함께 마련해 만화가 상업적으로, 그리고 향유자들이 자체적으로 어떻게 작품을 만들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BICOF는 후발주자라는 꼬리표에서 벗어나 모든 면에서 SICAF를 앞서는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이러한 결과는 많은 의미를 가진다. 199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만화 분야에 투자를 해온 부천이 시작은 창대했지만 2012년 이후 꾸준히 SICAF는 물론 다른 만화 관련 사업에 있어서도 계속 사업 규모를 줄여온 서울의 행사를 능가했다는 것은 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내실있는 행사와 정책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SICAF는 풀네임에서도 알 수도 있듯이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모두 포괄하는 행사이다. SICAF의 모든 부분이 갈 수록 축소되고 있지만 만화 부분에서의 변화가 너무도 커보이는 것은 SICAF의 축을 이루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균형이 급격하게 쏠릴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만다. 서울은 만화 정책에 있어 선구자적 존재이자 중심에 있었지만 어느새 만화 정책의 중심은 서울에서 부천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동시에 2014년에서야 다양한 경향을 보여주는 만화 전시가 나왔다는 것은 그간 만화에 대한 시선이나 연구가 종합적이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약간은 부끄러운 초상이기도 하다.

이렇게 SICAF에 강한 잽을 날린 BICOF는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수 있을까. 내심 그러기를 바라지만 여전히 불안한 점은 많다. 내외부 부스의 구성에서 사당과 판교에 위치한 메이드 카페 겸 여러 서브컬쳐 상품을 판매하는 매점인 ‘사보텐스토어’나 손오공의 완구 및 애니메이션 <탑플레이트> 같이 서브컬쳐라는 특성과 연관된 곳도 있었지만 ‘프린지’라는 이름을 달고 열린 잡다한 공연이나 ‘문화체험’ 등을 명목으로 열린 각종 민속놀이 체험 부스와 놀이기구들은 여전히 BICOF가 만화에 대한 축제라기 보다는 흔한 지역축제의 관점에서 열리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게 만든다. 특히 BICOF에 앞서 개최된 부천의 또다른 유명 행사 PiFan(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제가 내건 ‘판타스틱’이 희석되는 점에서 불안감은 여전히 남는다. 과연 BICOF는 내년에도 이러한 질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길은 부천시의 선택에 달려있을 것이다.

▲ BICOF가 열리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가기 위해 지하철 7호선 삼산체육관역에 내리면 만화에 관련된 내용 대신 ‘문화체험’ 등을 명목으로 설치된 각종 놀이기구들이 먼저 눈에 보였다. 이는 지방에서 열리는 각종 지역축제와 별반 차이가 없는 모습들이다. 충실했던 전시 행사와 구색으로 채워진 야외부스의 기묘한 조화는 BICOF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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