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 가까이 목숨을 건 단식을 하며 유족이 원하는 수위의 세월호 특별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세월호 참사 유족 김영오씨가 있다. 자신들이 그어놓은 경계선 이상의 양보는 불가하다는 거대 여당 새누리당이 있다.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의 대응은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가족대책위가 ‘4.16 특별법’으로 내세운 제안은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족대책위 측 역시 현실적으로 기소권은 어렵더라도 수사권만큼은 반드시 확보되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이에 새정치민주연합은 고심 끝에 진상조사위원회 내부에 수사권을 가진 이를 참여토록 하는 절충안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유족들과 소통을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유족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예전에 그랬듯 자신들의 제안을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실질적인 진상규명을 바랄 뿐이었고, 자신들의 제안을 강제할 권력도 없었다. 그러나 새누리당이 버티고, 동력을 잃었다고 판단한 새정치민주연합이 ‘절충안의 절충안’ 내지는 ‘절충안의 절충안의 절충안’을 만들어내면서 문제는 심각해졌다.
▲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오른쪽)이 1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37일째 단식농성중인 故 김유민 양의 아버지 김영오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치명적이었던 8월 7일 합의, 박영선 리더십의 예고된 실패
8월 7일과 19일, 두 번에 걸친 양당 원내대표의 합의는 치명적이었다. 첫 번째 원내대표 간 합의와 그것의 파기는 원내대표 뿐 아니라 막 비상대책위원장을 겸임하게 된 박영선 의원의 리더십을 한방에 날려 버렸다. 두 번째 합의는 유족들을 더욱 고립시켰다. 이제 보수언론은 유족들이 세월호 특별법 합의를 막고 있다고 대응하기 시작했다.
물론 유족들이 받지 못할 제안을 거듭 독단적으로 합의한 박영선 원내대표의 실책은 치명적이다. 그러나 ‘강경파’의 이미지를 등에 업어 ‘선명야당’을 구현해줄 것으로 기대됐던 박영선 대표가 어찌해서 그런 실책을 범했는지, 새정치민주연합은 무슨 이유로 저런 궁지에 몰렸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앞서 박영선 원내대표의 합의를 ‘독단적’이라고 평했다. 유족들을 설득할 수 있는 안을 내지 못하고, 유족들이 합의하지 않는 안엔 동의하지 않겠다는 당내 목소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박영선 원내대표가 온전히 홀로 판단하여 일을 저런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믿은 건 아닐 것이다. 당내 강경파들과 의논한 것은 아닐지라도 새정치민주연합 내에서 새누리당과 그런 식으로라도 합의를 해야 한다고 본 이들은 복수일 것이다.
▲ 20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 세월호 희생자 정부 공식 합동분향소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세월호 특별법 여야 협상 과정에 대해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임원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한길-안철수-박영선의 문제가 아닌 정치세력 새정치의 문제
그런 과정을 무시하고, ‘김한길과 안철수’를 날려 보냈듯, 다시 한번 ‘박영선’만 날려 보내면 새정치민주연합이 정상화가 될 것으로 믿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여론을 끌어 오려는 대응이 어디서 잘못 되었는지를 따져봐야 새정치민주연합이 거대 야당으로서, 더 나아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대면할 수 있다.
새누리당 지지층 뿐만 아니라 소위 중도층 유권자에 이르기까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새누리당의 여론 대응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투박하게 정리한다면, 세월호 ‘특별법’은 ‘보상’의 문제로 만들고, 세월호 참사의 ‘책임’은 ‘유병언’에게로 몰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은 ‘교통사고’로 요약하는 것이었다 볼 수 있다.
‘특별법’=‘보상’, ‘책임’=‘유병언’, ‘진상’=‘교통사고’. 이 도식에서 세월호 참사 유족들은 깊은 슬픔을 겪고 있는 동정의 대상이지만, 보상은 유병언의 재산에서 나와야 하고, 별도의 진상규명의 필요성은 없게 된다. 새누리당의 이러한 논리는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 종편 방송과 카카오톡 메시지를 통해 무한재생산되었다. 야권은 이에 대해 제대로 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 20일 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 세월호 희생자 정부 공식 합동분향소에서 세월호 희생 가족대책위 유경근 대변인이 이날 열린 유족 총회 결과에 대해 밝히고 있다. 유족 총회 결과 유족 대부분은 그들이 만든 원안을 관철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연합뉴스)
'특별법=보상', '참사=교통사고', '책임=유병언'에 말렸던 새정치
이 세 가지 문제 중 새정치민주연합과 가족대책위가 적극적으로 대응한 부분은 ‘특별법’=‘보상’이란 등식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어쨌든 세월호 참사 유족들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질 거란 사실과 철저한 진상규명을 원하는 가족대책위와 다른 결을 지닌 유족들도 있을 거란 점에서 완전히 반박하기 어려운 논점이었다.
오히려 ‘보상’의 문제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말해야 했는데, ‘진실’이나 ‘진상’과 같은 추상적인 어휘에 무엇이 포함될 수 있는지를 새정치민주연합은 말하지 못했다. ‘책임’=‘유병언’이란 등식에 휘말려 들어가 ‘유병언 사체 가짜 음모론’이나 내세웠고, 이를 벗어나려 할 때도 ‘유병언’의 자리에 ‘박근혜’를 집어넣기 위해 ‘박근혜 7시간 공백’ 문제를 제기하기에 급급했다. 진실의 맥을 짚으려 하기 보다 정부나 국정원이 주도한 어떤 기획을 발견하기를 원했다.
물론 ‘박근혜 7시간 공백’은 제기해야만 하는 문제다. 그러나 진상조사위원회나 특별검사가 규명해야 할 다른 부분을 말하지 못하다 보니 사람들은 그런 문제제기에서 ‘끔찍한 참사의 책임을 맹목적으로 대통령에게 지우려고 작정한 정치세력’의 모습만을 보고 말았다. 진조위에 대한 수사권이나 기소권 부여 문제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이 사건에 청와대를 엮어보려고 작정한 이들의 요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20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위한 정의당 의원단 단식돌입 기자회견'에서 심상정 의원이 기자회견문을 읽고 있다. 왼쪽부터 김제남, 박원석, 심상정, 정진후, 서기호 의원. (연합뉴스)
결집한 새누리 지지층, 갈팡질팡한 새정치
이는 새누리당 지지층에겐 결집의 요인이 되었고, 중도층에겐 새정치민주연합과 가족대책위의 주장의 합리적 핵심을 알지 못하게 했다. 세월호 참사에 애도한 시민은 많지만 그 사건에서 어떠한 진실이 구체적으로 규명되어야 하는지를 미루어 짐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이들에겐 유족의 요구가 깊은 슬픔과 정서적 충격에서 나온 안타까운 것이라 이해될 뿐 찬동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유족들이 일각에서 흘러 나오는 황당한 음모론들에 동요되어 있으며 새정치민주연합이 그 비이성적인 요구에 부화뇌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기가 더 쉽다.
‘세월호 참사’라는 초유의 사건을 둘러싼 여러 가지 맥락들이 있다. 정부 부처의 규제완화와 선박에 대한 관리감독의 문제가 있으며, 배가 기울어가는 과정에서 생명을 걱정하기 보다 배의 침몰이 보험금 수령에 적합한 방식일지를 고민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존재한다. 해경은 어찌해서 배에 잠입하지 못했는지, 잠입을 요구하는 매뉴얼이 없었다면 그것은 왜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규명되어야 한다. 재난의 콘트롤타워는 어디여야 했는지, 그것이 명확하지 않았다면 교통정리를 해줘야 할 청와대는 무슨 역할을 했는지도 따져 물어야 한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이런 문제들을 회피하기 위해 인신공양의 제물을 끌어다댔다. 대통령은 세월호 선원들을 ‘살인자’로 규정했고, 검찰은 이를 충실히 따른 수사를 했다.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자 검찰은 ‘유병언 일가’로 범위를 확대했고 현재는 해경 개개인들을 단죄하는 중이다.
▲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이 지난 7월 27일 국회에서 유병언 청해진 회장의 사체 발견 현장 사진을 보여주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립된 새정치, 유가족마저 고립시키는 길 택하나
문제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대응이 이 ‘인신공양의 칼춤’에 제대로 맞서는 것이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인신공양에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시키만을 간절하게 바랐는지도 모른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맥락의 난맥상과 그것을 해부한 단면이 바로 한국 사회의 안전 문제란 것을 새정치민주연합은 보여주지 못했다.
지금의 검찰 수사가 밝혀내는 것도 있다. 구원파와 유병언 일가를 들쑤시고, 선원들을 처벌하며, 해경들도 처벌하려고 한다. 그러나 ‘선원 처벌’, ‘유병언 죽음’, ‘해경 해체’로 해결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그 무엇을 보여주는 것에 실패했고. 그 결과 대통령과 정부를 향한 ‘세월호 심판론’은 외면받았다. 말하자면 새정치민주연합은 먼저 고립되었고, 이제는 그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족들이 고립될지도 못할 길을 천연덕스럽게 택한 것이다.
‘고립됨’을 ‘고립시킴’으로 돌파하려고 한 새정치민주연합의 비윤리성을 질타하는 것도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사건의 책임을 개인의 인성으로 귀속시키는 그 사고방식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고립시킴’의 비윤리성의 근간에 있는 ‘고립됨’을 만들어낸 능력의 문제도 따져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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