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모 일병 구타 사망 사건이 사회적으로 쟁점화되면서 모처럼 군 인권문제의 심각성 및 군 개혁 논의의 장이 열렸다. 그런데 이 모처럼 펼쳐진 장에 그간 군 개혁 논의를 좌초시켜왔던 제안이 또 끼어들었다. 바로 ‘모병제’ 제안이다.

보수언론에서도 모병제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12일자 <조선일보> 8면 기사, 13일자 <중앙일보>의 2면 기사, 같은 날 <동아일보>의 10면 기사가 그 예다. 그러나 13일 <조선일보>는 18면 기사에서 일본의 징병제 불가피론을 보도하면서 다른 시선도 전하고 있다. 결국 ‘모병제’와 ‘징병제’를 양자택일의 선택지로 두고 씨름하다 ‘징병제 불가피론’으로 돌아가 실익없이 끝나는 그간의 패턴이 반복될까 우려할 수밖에 없다.
<중앙일보> 기사는 “전문가들은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한 프랑스·이탈리아 등 다른 국가들의 사례를 들어 모병제 전환의 조건을 ‘병력 30만 명 이하, 1인당 GDP 3만 달러 이상’으로 본다. 국제통화기금(IMF)이 2012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2017년에 1인당 GDP가 3만 달러를 넘어서게 된다. 병력을 30만 명 선으로 유지하는 것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육군을 중심으로 군은 병력 감축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라고 전한다. 이러다간 모병제를 위한 경제성장 담론이 나올 판이다. 3만 달러가 넘어봤자 우리는 분단 상황이니 병력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고 반론하면 그만이다.
▲ 13일자 중앙일보 2면 기사
군 내부적으로 해야 할 개혁 세 가지
실질적인 군 개혁을 고민해야 할 때다. 징병제는 한국 사회에 오래도록 뿌리박힌 현실이다. 모병제를 논의하는 이들은 결국 한참 장단점을 비교하다가 ‘시기상조’라고 말한다. 군 개혁이 없다면 영원히 시기상조일 것이다. 모병제를 소리 높여 주장하기에 앞서 ‘모병제로도 전환이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그래야 ‘시기상조’론을 벗어날 수 있다.
먼저 군 내부적으로 해야 할 개혁 방안을 몇 개 짚어보자. 일단 사병월급을 확실한 목표치를 가지고 급속도로 인상해야 한다. 모병제 찬성론자들은 대만마저 모병제로 돌아섰다며 한국도 모병제로 전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만의 징병제 사병들은 2천년대 중반에 이미 한국돈으로 25만원에서 30만원 가량의 월급을 받고 있었다. 사병월급 인상안을 주도했던 열린우리당 임종인 전 의원의 설명이다.
우리 사병들은 현재 8만원에서 10만원 가량의 월급을 받고 있다. 이를 들으면 90년대에 군대를 다녀온 이들은 “그렇게나 많이?”라고 놀라기도 한다. 17대 국회 회기(2004~2008년)에 임종인 전 의원의 주도로 병장 월급 기준 4만여원에서 10만여원 수준까지 상승했다. 임종인 전 의원은 당시 독일 및 대만 등의 사례에 비추어보았을 때, 징병제 사병도 또래 평균임금의 25%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봤고 그 기준이 25만원에서 30만원 수준이었다. 임종인은 징병제 사병들의 노동력 값을 2.5배나 올렸는데도 기억되지 못 했고 예비역들은 그가 이지스함 도입에 부정적 의견을 표시했다는 기사에 악플을 달아댔다. 예비역이 징병제 사병의 삶에 그토록 관심이 없는 사회에서 군 개혁이나 모병제가 가능할 리 만무하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었고 사병월급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동결되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물가상승률을 반영하여 소폭 오른 것이 전부다. 국방부가 말하는 ‘현실성’이 이것이다. 당장 10만원짜리 월급으로 싸게 사람을 부리는 이들에게, 갑자기 200만원짜리 직장을 만들어내라고 하면 기득권을 내놓을 수 있을까? 징병제 사병의 월급도 적어도 20만원에서 30만원까지 올려 국방부 관계자들도 “이 돈 주고 얘들 유지하느니 병력 줄이고 고용하는게 더 전투력에 낫겠다”고 푸념할 지경이 되어야 모병제도 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로, 휴가와 외출 및 외박이 각 개인에게 인권의 차원에서 권리로서 지급되어야 한다. 군 편제를 혁신적으로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현행 병력을 유지하려면 군 복무기간을 줄이기는 어렵다. 군대 문제에 대한 성찰 없이 군 복무기간을 줄이겠다는 포퓰리즘을 벗어나, 징병제 사병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 휴가와 외출·외박을 늘리고 기본권이 되게 해야 한다.
한국 군대처럼 휴가가 적은 군대가 없다. 게다가 휴가든 외출이든 외박이든 상벌제도와 연동되어 있어 소위 ‘관심병사’들이 사회로 나오지 못하는 역설적인 폐해가 생긴다. 지휘관들이 휴가와 외출·외박을 통해 병사를 통제하는 관행을 없애거나 줄여야 한다. 사병 휴대폰 소지 허가 문제도 큰 틀에서 이 문제의 하위범주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물론 휴대폰 소지 허가 건은 미세한 각론이지만, 일개 각론치고는 매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계속 논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세 번째로, 군 인권 문제를 제대로 적발하기 위한 군 사법체계의 개편이다. 특히 여군 간부의 유입으로 증가세인 성폭력 문제에 대한 대책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는 전문가의 논의 영역이 되어야 할 것이므로 상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13일자 중앙일보 2면 기사
사회적 차원에서 시행해야 할 개혁 두 가지
또한 군대를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실시되어야 할 시급한 두 가지 개혁과제가 있다.
하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들만을 위해 대체복무제를 제시하여 찬반격론에 휘말리게 하기 보다는 참여정부 시절 잠깐 추진되다 중단된 사회복무제처럼 큰 틀의 정책을 짜는 것이 좋다. 이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문제와 함께 일각에서 제기되는 여성 징집 문제까지 품을 수 있는 정책 디자인이다.
현재의 한국 사회는 양극화와 고령화를 통해 돌봄노동이 필요한 빈곤층과 노년층이 늘어난 상태다. 적절한 교육을 받은 후 이들에 대한 돌봄노동을 시행하는 것이 군복무를 대체할 수 있는 의무가 된다면 남성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문제도 해소되고 군복무에 대한 오랜 역차별 논란도 해소될 수 있다. 참여정부 시절 사회복무제가 논의되었을 때 기획재정부에선 오히려 좋아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는 ‘여성 노동력’을 값싸게 착취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정책을 잘 디자인할 경우 예산의 제약 안에서도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두 번째 과제는 상비군과 예비군의 편제에 대한 전면적인 개편이다. ‘30만 군대’가 되어야 모병제가 가능하다고 입으로만 떠들게 아니라, 30만으로도 지탱할 수 있는 군 체제를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휴전선과 해안선의 대치 경비 병력이 정말로 상시적으로 필요한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CCTV 등의 설치로 대체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이미 수 십 년 전에도 있었다. 경비 병력의 배치가 정말로 안보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군 장성 등 간부 일자리와 ‘60만 대군’에 물건을 납품하는 기업의 이해관계를 위해서인지 따져봐야 한다. 국방부에게 판단에 필요한 자료를 요구하고 외부 업체에게 용역을 주어 다시 디자인을 해야 한다.
13일 아침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온 진호영 예비역 공군 준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교훈을 삼을 수 있는 독일의 경우를 보면 모병제로 운영한 병력들의 복무기간이 7개월이었습니다. 이건 무슨 얘기냐면, 교육을 잠깐 시키고 나머지 몇 개월만 복무하고 바로 사회로 내보냅니다. 그 친구들은 다시 동원하면 바로 전력화해서 쓸 수 있는 전력이 되거든요. 그래서 저희들도 그런 형태의 짧은 기간에 징병제로 잠깐 복무를 시키면서 예비군 병력으로 활용해도 되고요. 아니면 예전에 방위병이나 보충역 제도를 이용해도 되고요.”
전쟁이 났을 때 징병을 하지 않는 국가는 없다. “모병제냐 징병제냐”의 논쟁은 결국 평시의 것이다. 한국 사회는 개념적으론 휴전의 상태로 전쟁 중이라는 것이 보수파의 견해다. 현역군을 철책 경계와 주둔 진지 유지를 위한 ‘노가다’의 군대에서 전투를 대비한 교육 및 훈련 위주의 군대로 바꾸고, 이를 예비역 체제와 효율적으로 연동하면 군 규모를 줄이고 복무기간도 줄일 수 있다는 제안은 매력적이다.
▲ 13일자 조선일보 18면 기사
이런 군대를 가능하게 할 전면적인 제도 개편을 현실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만일 복무개월 10개월, 10만으로 유지되는 징병제 군대가 가능해진다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징병제의 폐해의 대부분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고 “모병제냐 징병제냐”의 논쟁은 지금과 전혀 다른 논거를 활용한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회초리 다섯 개, 하나하나 부러뜨리자
이상의 다섯 가지 과제는 모병제를 하자고 서명하는 것보다 훨씬 구체적인 관심을 요구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군 개혁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 다섯 가지 과제도 결코 하나 하나가 쉬운 것이 아니다. 각 과제마다 이해관계가 있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유발할 것이다.
그런데 모병제를 주장하는 것은 당장 내지를 때는 화끈해 보일지 몰라도 결국 이 다섯 가지 과제에 얽힌 기득권 세력을 한꺼번에 묶어 그들의 반발을 이겨내야 한다는 얘기와 같다. 이솝 우화의 비유를 따른다면, 회초리를 하나씩 부러뜨리지 않고 다섯 개를 묶어서 부러뜨리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시민사회가 그 정도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면 군 인권 문제가 아직도 이 지경일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엔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부러뜨려야 한다. ‘모병제’ 논의에 빨려 들어가는 것은 어쩌면 회초리를 하나도 부러뜨리고 싶지 않은 기득권세력의 음모에 말려들어가는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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