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민주연합 기동민 후보가 정의당 노회찬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사퇴하면서 진보정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감동의 단일화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다. 진보정당 지지자들 사이의 감동이야 뭇 언론에서도 많이 다루는 것이므로 우리는 무슨 불평이 나오는 가에 주목해봐야 할 것인데 그 중에는 ‘차라리 새정치민주연합과 합당을 하라’는 것이 있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새정치민주연합 기동민 후보가 정의당 노회찬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사퇴한 후 공동유세에 나선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정의당에 ‘새정치민주연합과 합당하라’는 주문을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제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과거 민주당을 포괄하는 ‘제1야당’들의 좌측에 위치한 정당으로서의 진보정당의 역할을 정의당이 내용 없는 야권연대를 통해 포기함으로써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의 변별점을 스스로 없애버렸다는 차원의 문제제기이다. 큰 차이도 없는데 따로 당을 하지 말고 차라리 하나의 당으로 활동하는 게 유권자들이 겪는 혼란을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둘째는 어차피 정의당이 제1야당과 명백한 변별점을 찾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제1야당의 한 분파로 활동하는 것이 더 나은 실력을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선거 때마다 제3당의 처지에서 당선권으로부터 먼 상태의 후보들이 각개약진하는 것보다는 제1야당의 후보로서 30% 내외의 기본 지지율을 획득하고 선거전을 치루는 게 진보주의자들의 국회 진출에 더 많은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지적이다.

일리가 없는 말들은 아니지만 이러한 주장들의 유효성을 따지기 위해 우리는 한 단계 더 사고를 심화시켜볼 필요도 있다. 그간 제1야당 내에서 ‘진보블록’을 만들기 위한 구상이 수차례 시도됐다. 이는 당권선거를 앞두고 각 정파 간의 합종연횡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고 소위 외부인사의 영입을 통한 자연스런 수순의 세력화로 논의되기도 했다.

이전 정부에서 제1야당의 내부에 존재했던 ‘진보행동’이라는 이름의 단체는 소위 ‘486’ 정치인들이 당 내의 거물 정치인들을 정점으로 한 계파에 휩쓸려가지 말고 정책적으로 단일한 목소리를 내며 세력화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정파적 결사체였다. 이들은 독자적으로 당직선거에 후보를 내기도 하고 지지후보의 결정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면서 제1야당의 전반적인 좌경화를 이끌 것으로 주목받았으나 정계개편을 거치고 총선과 대통령 선거 등을 계기로 한 당내 권력의 재편을 겪고 나서는 어디서 무슨 ‘진보’를 말하는 지 알 수 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들 세력의 주축을 이뤘던 486 정치인들은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등의 시기에는 ‘젊은 피’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제1야당 내부의 개혁을 이끌고 진보적 의제를 전면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결과적으로 당의 외관을 바꿔 중도층에게 ‘신선하다’는 이미지 전략으로 어필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거두지 못한 채 당 내 정파 질서의 한 부속품으로 끌려다니는 결과가 초래됐다.

그 외의 몇 가지 사례를 더 들 수 있겠으나 이정도만 언급해도 제1야당과 정의당이 세력을 합칠 경우 어떤 비극이 일어날 지를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집권경험을 갖고 있는 제1야당 내부의 정파 질서는 상당한 정책적 전문성을 지닌 중앙부처 관료나 검찰·경찰 등의 수사기관, 심지어 국가정보원 등의 정보기관에까지 뻗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구성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해본 경험이 없는 정의당 등의 입장에서는 제1야당 내부의 정파 질서를 극복하고 이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과제를 수행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수 있다.

때문에 순전히 정치공학적 차원에서 당분간 정의당에게 합리적인 선택이란 여당과 제1야당과는 독립적 지위를 갖는 제3당으로서 일정 정도 이상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가 주요한 선거 과정에서 선거연합을 통한 실질적 지분을 확보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7월 30일 치러질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정의당이 서울 동작구 을 지역구에서 노회찬 후보로의 단일화를 성사시키고 경기 수원시 정과 병에 출마한 천호선, 이정미 후보를 사퇴시킨 것은 나름의 합리적 판단을 통한 전술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노회찬 후보가 얼마나 성공을 거두느냐에 따라 정도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이를 통해 정의당 지지자들은 차기 총선에서도 제1야당과의 야권연대를 통한 선거구 흥정을 기대해볼 수 있겠다는 구체적 확신을 갖게 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노회찬 후보가 패배할 경우 논의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농후하지만, 어쨌든 지금 시점에서 제기해볼 수 있는 문제는 결국 ‘진보정치’가 제1야당의 협력과 양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지경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즉, 7·30 재보궐선거를 기점으로 ‘야권연대’란 단지 진보정당의 힘이 모자라기 때문에 잠시 힘을 빌리는 수준의 선거전술이 아니라 진보정치의 존재양식 그 자체가 된 것이 현실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간의 진보정치가 제1야당을 포함한 보수정치로부터 독립적인 정치적 전망을 추구하는 것이었으며 실제 이를 통해 한국사회의 많은 변화를 추동해냈다는 점에서 정의당과 지지자들이 만들어 낸 현재 정국은 장기적으로는 진보정치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타당한 측면이 있다. 결국 진보정치의 본질은 ‘꿈을 꾸는 것’일텐데, 이는 현재와 같은 구도 속에서는 정의당 왼쪽에 있는 정당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갖춰지지 않으면 결국 형해화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다. 정의당은 제1야당이 점하고 있는 정책적 바운더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진출할 수 없는 운명에 빠져있다. 지나치게 좌경화된 이슈를 제기할 경우 제1야당을 지지하는 중도층의 비토를 받게 돼 야권연대의 전망에 먹구름이 끼게 되기 때문이다.

정의당이 제1야당으로 들어가 하나의 정당을 이뤄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구도를 전제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정의당은 내용적으로는 제1야당과 큰 변별점을 보이지 않으면서 형식적으로는 독립된 형태의 조직을 갖춘 정당이다. 따라서 정의당은 제1야당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 지위의 진보정당을 원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포괄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정의당이 갖고 있는 제3당의 지위를 무력화시켜야 정의당의 왼쪽에 있는 정당들이 성장하고 진보정치가 발전할 수 있을 거란 얘기다. 정의당이 없어진 자리에서 새로운 제3당의 지위를 점해 과거 민주노동당과 같은 위상을 갖춘 진보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정의당의 제3당 지위는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닌데다 이들과 다른 세력이 제3당의 지위를 갖는 것만으로 진보정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즉,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문제는 제1야당으로부터 독립된 내용과 지위를 어느 정도 갖추고도 생존할 수 있었던 민주노동당을 어떻게 평가하고 극복할 것인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결국 진보정치의 부활이란 제3당으로서 정의당의 소멸이 아니라 정의당의 좌측에 있는 진보정당들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혁신하면서 자신의 노선을 명확히 할 때에야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아마 민주노동당의 실패 이후 진보정치에 지워진 질곡을 돌파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