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살이가 어려워도 지방으로 내려오는 사람보다는 서울로 가는 사람이 많다. 재미있는 사실은 어제까지 지방에 주소지를 두었던 사람들이 서울로 입성하자마자 태도가 묘하게 돌변한다는 사실이다. 뭐랄까 그동안 촌에서 살았던 자격지심을 벗고 환골탈퇴하고 싶은 모양인지 엊그제까지 서울에 대고 삿대질하던 사람들이 서울시민이 되자마자 지방에 대고 손가락질한다. 촌것들이, 촌놈들이, 촌스럽긴…….

나는 내 고향 전라북도 남원을 매우 사랑한다. 고향이 나에게 준 풍요로움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벅차다. 남원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한 후 전주에 있는 신문사에 입사했을 때 선배들은 나에게 “남원 촌년이 개천에서 용났다” 고 놀렸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전주나 남원이 뭐가 다를까 의아했다. 여고동창이 자모회에 갔다가 “시골에서 고등학교 나오셨느냐?”며 놀림감이 됐다는 얘기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친구의 딸은 그 중학교에서 전교 수석을 하던 재원이었는데 일테면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은 당신같은 엄마한테 어쩜 저렇게 공부 잘하는 딸이 나올수 있느냐?’는 뜻이란다. 내 친구 역시 국립대 사학과를 나온 미모와 지성을 두루 갖춘 나무랄 데 없는 여성임에도 단지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는 것이 자모회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는 것 또한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내 친구의 딸에 비해 우리 아들은 절대 자모들의 관심을 받을 만큼 뛰어나지도 않을 뿐더러 나 또한 자모회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어서 그러한 분위기를 잘 모르겠다.)

서울과 지방, 지방에서도 지역에 따라 이렇게 촌스러움을 구별짓는 사람들의 스테레오타입이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사대문안 정통 서울 토박이가 대한민국 인구에서 얼마나 차지할까? 잘 나가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촌에서 태어나서 누님들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가방공장 섬유공장 다니면서 번 돈으로 중소도시에서 중등교육 마치고 시골 논 팔고 밭 팔아서 대학 마친 사람들이 대다수 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촌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고 정겹고 고마운 은혜의 대상이 되어야 할 터인데, 작금의 현실에서 폄하되고 무시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 라디오 마당놀이 '대한민국 촌놈'. ⓒ김사은

“대한민국에서 촌놈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에 흥미를 갖고 있던 차 이 소재를 마당놀이로 풀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접근했고 <방송문화진흥회 2008 방송문화진흥사업 공모>에 선정되어 제작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라디오 마당놀이 - 대한민국 촌놈>. 지난 9월10일 오전 10시5분부터 11시까지 전북원음방송으로 송출되었다.

풍자와 해학으로 치자면 전라도 사투리만큼 맛깔스런 게 없으니 마당놀이에 제격이며 걸쭉한 촌놈의 입담으로 풀어내는 카타르시스와 흥겹고 유쾌하면서도 찡한 감동이 있다면 그보다 더한 성과는 없을 터인데, 이것을 어떻게 라디오와 접목시킬 것인가가 실험대상이었다. 일단 다양한 취재를 통해 촌놈의 의미와 지역 차별정책으로 인한 대한민국에서 촌놈으로 산다는 것의 실체를 조명하고 촌놈이어서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사람들의 노력, 세계로 가는 지방화 정책의 사례를 인서트 컷으로 구성했다. 내러이션 대신 마당놀이 특성을 살려 극의 흐름을 주도할 마당쇠와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해낼 향단의 캐릭터를 부여하고 국악기를 도입해서 마당놀이와 유사한 틀을 세웠다. 관객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는데 추임새와 댓거리가 극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녹음 당일 방송국 옆, 익산시 신동과 신용동의 주민 10여명을 초대하여 간단히 프로그램 성격을 소개하고 녹음에 돌입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반응은 놀라웠다. 일단 ‘마당놀이’라는 형식과 ‘촌놈’이라는 소재가 주민들의 경계심을 풀었고 자기가 가진 그대로 말하고 웃고 떠들고 노래부르며 그야말로 ‘한바탕 놀고 가는’ 마당이 되었다. 무엇보다 마당쇠 역할의 국악인 정민영(33)과 향단역의 이용선(30) 젊은 친구들이 기획의도에 맞게 잘 ‘놀아’줬고, 아쟁과 대금, 장구, 북과 같은 악기들도 튀지 않게 극을 드나들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관객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극에 몰입하자 아예 의자를 밀쳐내고 신발을 벗고 스튜디오에 주저앉아 즐기는 것이 역력했다. 무엇보다 관객들에게 어떤 연기력을 요구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편안했던 것 같다. 두시간 여 동안 진행된 녹음은 리액션 없이 바로 편집에 돌입했다. 마당놀이여서 부담스러웠던 제작이었으나 반대로 마당놀이여서 재미있는 작업이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것은 “잘 만들었다”고 자찬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다만 ‘라디오 마당놀이’라는 실험적 장르에 도전하면서 우려했던 것보다 더 건설적인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대부분의 방송이 사회적 공공성과 유익함을 목표로 지역의 공통 관심사를 반영한 것도 많을 텐데 <대한민국 촌놈>도 비슷한 맥락에서 전라북도 익산에서 익산 시민 몇 명과 방송했지만 같은 주제로 전북도청 앞에서 마당놀이를 펼쳐도 좋을 것이고 경상도나 강원도 충청도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주제라는 것이다. 각계 전문가와 활동가를 만나 취재한 결과 결국 지역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화합을 창출한다면 지역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지역 색에 맞는 새롭고도 독특한 라디오 마당놀이가 계속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평소 라디오 대본도 연극 대본처럼 콘텐츠화해서 확대 재생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왔는데 이러한 측면에서도 실험대상이 될 수 있겠다. 선명한 주제는 무엇이든 ‘라디오 마당놀이’로 구성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도 엿보았다.

특히 소출력 공동체 라디오에서도 주민들과 함께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학시절 노래패와 탈춤반을 기웃거리며 공동작업에 참여해 본 경험이 있는데 학생들도 민요나 유행가 등을 접목시켜 상상력을 발휘해 볼 수도 있겠다. <라디오 마당놀이 - 대한민국 촌놈> 방송 이후 청취자들도 “신선하다, 새롭다, 재미있다, 감동이었다, 다음에는 나도 참여하고 싶다”며 격려를 해주어서 1년간의 과제를 무사히 해결한 듯 하다.

이번 대한민국 촌놈을 취재하며 촌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각종 혜택으로부터 소외된 사각지대에서 제도권에서 하지 못한 일을 발벗고 나서 실천하는 농민운동가, 교육가, 행정가 등 각계 다양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큰 소득이다. 주민들과 더불어 뭘 해볼까를 고민하며 또한 라디오 세계의 무한한 상상력을 어떤 프로그램과 연관지어 볼까 고민하는 지역방송사 피디들이 많다는 것을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다시한번 확인했다. <대한민국 촌놈>을 제작하면서 더욱 촌을 사랑하게 되었다.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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