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의 수위와 내용 모두 심각하다. 웬디 커틀러. ‘그’는 한미 FTA 미국측 수석대표다. ‘그’가 16일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와 한미FTA 민간대책위원회와의 간담회 자리에서 이 같이 말했다.

“(한국) 쇠고기 시장의 전면 개방 조처가 없다면 의회의 핵심 의원들이 비준을 반대한다고 공언하고 있다. 일부 한국 단체들이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허용을) 반대하고 있지만 잘 되리라고 보며, 쇠고기 문제만 해결되면 의원들의 지지를 받아 (비준 동의가) 쉬울 것이다.”

사실상 한국 정부를 ‘협박’하는 웬디 커틀러

▲ 한겨레 10월17일자 1면.
커틀러 대표. 최근 미국산 쇠고기에서 등골뼈 등 광우병 위험물질이 잇따라 발견된 것에 대해 “유감스럽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속내는 그 다음이다. “뼛조각 발견은 통계적으로 미미한 수치일 뿐, 미국 쇠고기는 안전하고 국제수역사무국(OIE) 규정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반박 들어간다.

농림부와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이 미국 대형육류생산업체 스위프트사로부터 지난달 7일 수입돼 검역과정을 거치던 쇠고기 18.5t(618상자)에서 광우병 위험물질인 등뼈로 채워진 상자가 1개 발견됐다고 밝힌 것은 지난 5일이다. 이보다 앞서 지난 8월1일 미카길사 제품에서 처음으로 등뼈가 발견돼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한동안 중단된 적이 있다.

등뼈는 아니지만 현행 한-미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상 수입이 금지된 갈비통뼈가 발견된 것이 지금까지 9건이고, 작은 뼛조각이나 금속 같은 이물질, 검역증 표시 위반 사례 등을 모두 합치면 1년간 위생조건 위반 건수가 200건을 넘는다.

정리하자. 단순 실수로 보기엔 빈도 수가 지나치게 많다. 이 정도 상황이면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안전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수입중단 조치를 취하고 확실한 대책 마련을 미국에 요구하는 건 상식이다. 근거도 충분하다. 수입위생조건 21조다. 규정 위반이 광범위하고 반복적으로 발생하면 우리 정부는 수입위생조건 21조에 따라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전면 중단할 수 있다.

만약 한국산 쇠고기에서 광우병 위험물질이 발견됐다면

▲ 조선일보 10월17일자 B2면.
“뼛조각 발견은 통계적으로 미미한 수치일 뿐, 미국 쇠고기는 안전하고 국제수역사무국(OIE) 규정에 부합한다”는 커틀러 대표의 발언은 사실 ‘협박’에 가깝다. 입장을 한번 바꿔 생각해보자.

한국산 쇠고기에서 광우병 위험물질인 등골뼈가 두 번이나 발견되고 등뼈는 아니지만 현행 한-미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상 수입이 금지된 갈비통뼈가 발견된 것이 9건. 작은 뼛조각이나 금속 같은 이물질, 검역증 표시 위반 사례 등을 모두 합쳐서 모두 1년간 위생조건 위반 건수가 200건을 넘는다면 미국 정부는 한국산 쇠고기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까.

아니 작은 뼛조각 하나라도 발견됐다면 당장 수입중단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안 그런가. 만약 그때 한국측 수석대표라는 사람이 “뼛조각 발견은 통계적으로 미미한 수치일 뿐, 한국 쇠고기는 안전하고 국제수역사무국(OIE) 규정에 부합한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다면 미국 쪽 반응이 어땠을까. 한미 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해 협박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테지만 아마 ‘웃기는 인간’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공개적인 ‘협박’에 문제의식 없는 대다수 언론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자. 만약 그런 소리를 한국쪽 인사가 했다면 미국 쪽 입장에서야 ‘웃기는 인간’ 정도로 취급했겠지만 한국쪽 입장은 그게 아니다. 상대는 미국쪽 수석대표인 웬디 커틀러. 지난 14일 예고없이 방한해 공개적인 석상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하는 게 좋을 거야’라고 얘기했다. ‘웃기고’ 넘어가기에는 상대가 너무 세고, 발언 수위가 심상치 않다.

커틀러 대표의 발언보다 더 황당한 건 한국 언론이다. 벌건 대낮에 한국 정부를 대놓고 ‘협박’했는데도 이를 문제삼는 언론이 없다. 서울신문과 조선일보 매일경제 서울경제 파이낸셜뉴스 등이 커틀러 대표의 발언을 ‘소개하는’ 수준에서 언급하고 있고 나머지 언론은 아예 보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 오직 한겨레만이 오늘자(17일) 1면에서 발언의 문제점을 짚고 있을 뿐이다.

가끔씩 언론들이 국경일을 전후해 청소년들의 ‘애국심’ 부족을 질타하곤 하는데 그럴 게 아니라 언론 자신들의 ‘애국심’부터 점검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저런 '협박'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대체 자존심이라곤 찾아볼 길이 없는 한국 언론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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