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5일. 대한민국선수단이 돌아와 서울 세종로에서 퍼레이드가 약속된 날. 화창하던 하늘이 갑자기 비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올림픽의 정치적 악용에 반대하는 수많은 목소리에도, 갑자기 내리는 비에도 행사는 열렸습니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를 전통군악대가 앞서고 그 뒤를 태극기가 따랐습니다.
박태환과 장미란 선수가 선수단의 대표기수로 앞장 서고 그 뒤로 선수단이 각 종목별로 팻말을 들고 뒤를 따랐습니다. 거리는 선수들의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나선 시민들로 가득했지만 길 옆에 매달린 현수막은 시민들의 시선을 가려버렸습니다.
현수막 안쪽 도로는 촛불을 대비하는 경찰들의 날선 시선과 선수들의 사진을 찍겠다는 기자들, 그리고 그 기자들을 저지하려는 경호인력과 행사진행 인력이 뒤엉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선수들도 시민들도 퍼레이드의 주역은 아니었습니다.
선수단이 시청광장에 도착할 즈음 간간히 뿌리던 비는 다행히 멎었습니다. 급하게 만들어진 탓인지 약간 어수선했지만 선수들도 즐거워했고 시민들도 즐거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프로그램은 선수단장의 인사말, 선수단 소개, 인기가수들의 공연, 일부선수단의 노래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행사장 주변은 경찰들로 빼곡했습니다. 넓은 시청앞 광장을 울타리와 경찰통제선으로 둘러치고 일부 통로만 연 것은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촛불을 막으려는 의도인 듯했습니다. 행사장 주변을 돌아보다 반가운 모습을 봅니다. 촛불입니다.
어둠이 점점 짙어져 갈 무렵. 행사장 주변의 경찰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경찰들이 움직이는 방향은 프라자호텔 쪽. 그곳에 거꾸로 게양된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쫓아가 봤습니다.
경찰이 시민 연행을 시도하고 있었고 많은 시민들이 경찰을 가로막고 연행을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거리고 삽시간에 모여든 시민들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 폭력경찰 물러가라" " 연행자를 석방하라" 구호는 다시 변해서 " 명박퇴진, 어청수 퇴진" 등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구호는 점점 더 커졌습니다. 무대의 엄청난 앰프소리를 누를 만큼 소리가 커졌을 때 쯤 경찰들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날도 연행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 어르신이 경찰 앞에서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연행하려 하느냐고 조곤조곤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태극기를 거꾸로 든 것을 탓하는 경찰에게 한 어르신의 말입니다.
"난 빨간색이 위로 올라가게 배웠는데 대통령이 파란색이 위로 올라가게 들더란 말야... 국민이 대통령을 따라야지... 아니 그것도 죄야? 그러면 대통령도 잡아가야지."
경찰은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합니다.
또 한쪽에서 또 다른 어르신이 경찰을 호되게 꾸짖고 있었습니다. 연행과정에서 거리에 떨어진 태극기를 경찰들이 발로 밟고 있었던가 봅니다.
"아니 이사람들아. 당신들이 대한민국 경찰이야 친일파 지키는 경찰이야... 대한민국 경찰이 어떻게 태극기를 발로 짓밟아..." 몇몇 경찰들은 머쓱해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처음 경찰이 연행을 시작할 때는 잘 보이지 않던 거꾸로 든 태극기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경찰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었습니다. 무대에서는 혼혈가수 인순이씨가 부르는 <거위의 꿈>이 흘러나왔습니다. 시민들은 그 노래에 맞춰 태극기를 정말 열심히 흔들었습니다.
죄가 없더라도 경찰의 연행은 무섭습니다. 그 무서움을 극복하고 경찰 바로 앞에서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용기일 겁니다. 우리시민들의 용기가 대한민국을 사람이 살 만한 나라로 만들어가는 유일한 동력입니다. 행사가 끝날 때까지 태극기를 든 용기있는 시민들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밤 9시가 넘어 행사는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거리 곳곳에는 많은 시민들이 자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다시 등장한 횡단보도를 오가는 시민들의 저항이 끝이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횡단보도를 신호등에 맞춰 오가는 시민들의 구호는 " 대한민국, 이병박 퇴진" " 공안탄압 중단하라" " 폭력경찰 물러나라" 짙어가는 어둠을 뚫고 힘차게 퍼져갔습니다.
거리 곳곳의 시민들은 박수로, 같은 구호로 이들을 격려했습니다. 시민들의 표정은 점점 더 밝아져갔고, 덕수궁 돌담에 기댄 채 시민들을 바라보는 경찰들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짙어갑니다.
8월25일 시청앞 광장. 세상을 바꾸는 것은 용기라는 것을 다시 일깨우게 한 시간이었습니다.
용기가 있는 분들은 불의에 맞서 깃발을 들고 싸웁니다. 용기가 부족하다면 깃발을 든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면 됩니다.
부족한 용기를 감추기 위해 오히려 상대의 편에서 용기있는 분들을 폄하하는 분들을 간혹 봅니다. 그것은 노예가 되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