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보지 못하는 건 아닌지 불안했던 <필로미나의 기적>이 용케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는 아일랜드에서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직후에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던 아일랜드는 미혼모의 자녀를 해외로 수출했다고 합니다. <필로미나의 기적>의 주인공인 필로미나는 미혼모라는 이유로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한 수녀원에 보내졌습니다. 이 수녀원은 미혼모들을 가둔 채로 온갖 노역을 시키고 아이들은 하루에 단 한 시간만 보게 허락했습니다. 필로미나도 앤소니를 낳아 길렀으나 머지않아 입양을 보내게 됐습니다. 그로부터 50년 동안 비밀로 간직하고 있다가 아들을 찾아 나섭니다.
필로미나를 도와서 앤소니의 행방을 쫓는 이는 BBC 기자 출신이자 정부관료로 지냈던 마틴 식스미스입니다. 그 또한 실존인물로서 <필로미나의 기적>의 원작인 책을 썼으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로 묘사됩니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이 동행하면서 앤소니를 찾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각색 단계에서 붙여진 것 같은데, 이것이 <필로미나의 기적>을 더 매력적인 영화로 탄생시켰습니다.
필로미나는 당연히 픽션이라고 여겨질 만큼 순진무구하고 노홍철을 능가하는 초긍정주의의 할머니입니다. 수녀원에서 그 고초를 겪었으며 아들까지 잃었는데도 수녀들을 "악마"라고 지칭하는 딸을 나무랍니다. 뿐만 아니라 친절하게 아들을 찾도록 협조했으며 과거에도 착한 수녀가 있었다는 걸 주지시키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순정만화 같은 소설을 읽으면서 기뻐하고, 섹스에 대해서는 가감 없이 자신의 황홀했던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머뭇거리지 않는 순수하고 맑은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필로미나의 기적>이라는 제목은 필로미나 자체가 기적이라는 걸 의미한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입니다.
반면 마틴은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성적이고 냉소적인 인물입니다. 특히 종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서 "Fxxking Catholic"이라는 노골적인 저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필로미나가 섹스에 매료됐던 자신을 표현하면서도 그걸 즐겼던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말했을 때, 마틴은 "신은 왜 인간에게 성욕을 주고 섹스를 불경한 것으로 취급하지? 참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걸 보고 즐기나?"라고 불만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서로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의 배합은 <필로미나의 기적>에게 있어 신의 한 수입니다.
<필로미나의 기적>은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엄마의 드라마틱한 영화라곤 할 수 없습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그보다는 사실 조금 어두운 분위기를 가지는 데다가 시종일관 묵직한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로미나의 기적>은 관람하기에 꽤 즐거운 편입니다. 그 원천이 바로 필로미나와 마틴 커플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계속해서 조금은 충돌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런 대립관계를 전제로 한 재치 있는 대사를 주고받으면서 영화를 유머러스하게 이끌고 갑니다. 스티븐 프리어스의 연출과 더불어 스티브 쿠건이 참여한 각색이 참 잘됐다고 느낀 것도 두 캐릭터의 조화에 있었습니다.
스티븐 프리어스의 연출이 정말 인상적인 이 영화는, <노아>의 리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혀 인간성을 배격하는 종교라면 과연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질문합니다. 이와 더불어 마틴을 필두로 한 무신론자 내지는 냉소적인 사람에게는 종교의 진의를 제대로 가늠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이 두 부류를 사실상 동일선상에 놓은 스티븐 프리어스는 줄곧 편향적인 관점으로 연출하지 않고 있습니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필로미나의 기적>을 보는 건 현명과 지혜의 열매가 든 부드러운 쉬폰 케이크를 먹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허세 부리고 싶은 건 아니고, 그만큼 연출이 유연하고 온화합니다.
두 부류의 인물 사이에 위치한 필로미나는 이름 그대로 성녀에 다름 아닙니다. 다소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여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인물인데, 주디 덴치의 엄청난 연기력이 그런 부정적 시각을 충분히 상쇄하고 있습니다. <노아>와 마찬가지로 <필로미나의 기적>과 같은 영화라면 마틴 못지않게 종교에 대해 지독한 편견을 가진 저도 감히 불만을 토하진 못하겠습니다. 계속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무슨 종교영화로 받아들이지는 않으시길 바랍니다. <필로미나의 기적>은 종교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영화고,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면서 속죄하고 사소한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온 한 숭고한 여성에 대한 영화입니다.
★★★★
덧) 개인적으로 필로미나의 행동에 동의하진 않습니다. 그래도 가장 이상적인 결말인 것 같긴 합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