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영화에 예전 같은 집착을 느끼지 않게 된 결정적 계기가 아마 한날 한시에 안토니오니와 베르이만이 가셨던 그 날이었던 것 같다. 모 매체의 영화 기자이던 그 무렵, 그날의 언론시사회 참석을 마치고 돌아와 울면서 부고 기사를 썼다. 드실 만큼 나이를 드시고 평생 내놓을 만큼 영화를 내놓으신 분들이셨지만 나는 그날, “영화의 세기가 정말 가버렸구나”라고 느꼈고 세계의 거대한 축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이후 내게는 영화가 실재가 아니라 어떤 유령처럼 느껴진다. 영화 속 장면들도 모두 유령의 환영처럼 느껴진다”고 누군가에게 고백했던 기억도 난다.

누군가에겐 저 세상에 가신 이런저런 다른 감독이었을 것이다. 다만 나한텐 안토니오니와 베르이만일 따름이다. 애도 끝에 받아들였다. 이런저런 감독이, 배우들이,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앞으로 더 많이 떠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실제로 무감각해졌다. 아직 젊다 못해 어린 배우가 뜻하지 않게 떠났을 때도 안타깝다, 고만 생각했다. 다른 거장들의 별세 소식엔 귀를 막았다. 그저 여전히 정정하게 활동하는 노감독들의 신작 소식에만 레이다를 집중시켰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정수리를 정통으로 휘갈겨 맞은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비보 소식에는, 도저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아마도 1997년 혹은 98년, 막 영화 번역자의 세계에 들어서던 내게 사수가 “길이도 길고 대사도 많고 포르노 얘기라서” 심드렁하게 초벌 번역을 넘겼던 영화가 있다. <부기나이트>였다. 번역자용 조악한 복사판 비디오에서 그를 처음 발견했다. 다른 조연보다도 비중이 적은 조연이었지만 그에게는 ‘더크 디글러(마크 월버그)에게 저도 모르게 사랑을 느낀다’는 설정이 있었다. 둔하고 커다란 몸집과 얼뜨기 같은 표정으로 마크 월버그에게 키스하던 장면은 영화의 흐름상 ‘코믹한’ 장면이 되기 쉬웠다. (실제로 작년에 우리 극장에서 이 영화를 상영했을 때도 그 장면에서 관객들은 폭소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 영화 '부기나이트'의 한 장면
그러나 그 장면은 그저 코믹한 장면이 아니다. 그 옛날 그 조악한 화질의 비디오 속에서, 마크 월버그의 반응에 곧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리고 혼자 차 안에서 처량한 울음을 토해내던 이 뚱땡이 배우는 어긋난 외사랑의 고독과 혼란을,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단체로 터진 관객들의 폭소는 어쩌면 ‘웃기고 코믹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날것의 속내를 맞닥뜨렸을 때 당황해서 터지는 히스테리컬한 반응의 한 형태에 불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장면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이가 나만은 아니다. 여러 매체들이 꼽는 ‘호프먼 연기 베스트 X’ 따위 리스트에 언제나 올라가니까. 그 조악한 화질의 비디오에서 나는 폴 토마스 앤더슨과 필립 시모어 호프먼이라는 두 명의 새로운 아티스트를 발견했고, 격하게 흥분했으며 그 행운에 감사했다. 영화가 몇 년이 지나서야 온전치 못한 모습으로 개봉한 탓에, 나의 발견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이른 것이었고 나는 이를 행운의 특권으로 받아들였다. 과연 내가 알아본 대로 얼마 후 영화는 엄청난 주목과 찬사를 받았고 폴 토마스 앤더슨은 고작 두 번째 영화로 ‘우리 세대 가장 중요한 감독’으로 떠올랐다. 은밀하게 ‘나의 안목’에 의기양양하며 기뻐했음은 물론이다. (다소 유치하긴 하지만 이봐, 난 그때 20대였다고!)
이후 폴 토마스 앤더슨은 자신의 영화에 역할이 크든 작든 호프먼을 계속 기용했다. (호프먼은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제외한 앤더슨의 모든 영화에 출연했다.) 앤더슨과 함께하며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주연만큼, 때로는 주연보다 더 큰 아우라를 뿜어내는 조연 배우가 되었고, 독립영화 감독들과 작가 감독들이 즐겨 찾는 배우가 된다. 앤더슨이 <부기 나이트> 2년 후에 내놓은, 비중이 훨씬 늘어난 <매그놀리아>에서 그가 흐느껴 울던 장면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간병을 맡게 된 필립 베이커 홀과 그 아들, 톰 크루즈 간 화해할 수 없는 반목과 상처와 슬픔이 안타까워 제 일처럼 아파하며 흐느껴 울던 간호사였다. 그 눈물엔 가식이나 위선 따위는 없었고 값싼 동정이나 연민과도 거리가 멀었다. 순수한 선의에서 비롯되는 저런 인류애적인 눈물이 정말로 가능하단 말이야? 머리로는 의심하면서도 결국 그에게 설득되었다.
<부기 나이트>와 <매그놀리아> 때문에 그는 내게 오랫동안 ‘인간 내면의 상처를 가장 연약한 형태로 가장 아프게 드러내는’ 연기로 각인됐다. 여전히 호프먼 했을 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도 바로 이 두 영화에서의 모습이다.
▲ 영화 '매그놀리아'의 한 장면.
그런가 하면 <올모스트 페이머스>에서 ‘크림’지의 편집장으로 출연했던 모습은 또 다른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난사실 그때까지 그에게서 ‘지적인’ 면모를 볼 수 있을 거라곤 별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단단한 방어벽 안에 감추어둔 약한 면을 드러내며 감정과 상처를 폭발시키는 캐릭터가 좀 더 익숙하면 익숙했지. 아마도 이를 극대화한 것이 <플로리스>의 트렌스젠더 역이었을 것이다. <올모스트 페이머스>에서 호프먼은 주인공 소년에게 “넌 시대를 늦게 태어났구나”라 말하며 안타까워하던, 그리고 주인공의 음악 사랑에 등불을 켜준 지적인 글쟁이였다.
어느 날 나는 이 영화를 DVD로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가 문득 내가 눈과 손은 일에 쏠려 있어도 귀만은 DVD의 사운드에 쫑긋대며 리듬을 타고 있음을 깨달았다. 영화에 수록된 온갖 명곡들과 ‘딱 내 취향’의 음악들이 아니라, 바로 호프먼이 대사를 뱉는 목소리에 취해 있었다. 그 전에도 이 영화를 몇 번 보았지만, 눈을 브라운관에서 떼고서야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음악적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여겨지는 목소리의 음색과 말하는 톤에서 이른바 “목소리만으로 황홀경에 빠지는” 경험을 이 영화를 통해서 했고, 이 배우가 갖고 있는 또 다른 비장의 무기를 발견했다. 정작 그는 이 영화의 촬영 내내 지독한 독감에 걸려 있었다고 하지만.
▲ 영화 '다우트'의 한 장면
이후의 필모그래피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리라. <매그놀리아>에서 톰 크루즈와 함께 한 인연으로 <미션 임파서블 3>에서 메인 악당으로 출연하기도 했지만, 그는 대체로 큰 영화와 작은 영화를 오가며 든든한 조연을 맡았고 때때로 감독의 야심을 스크린에 120% 실현시키는 주연 배우로 활약했다. 2005년, 그가 트루먼 카포티로 출연하고서야 아카데미 시상식은 이 배우에게 경의를 표했고, <다우트>(2008)에서 그가 자신의 롤모델로 꼽던 배우 중 하나인 메릴 스트립과 젊은 연기파 배우 에이미 아담즈와 함께 말 그대로 ‘불꽃 튀는’ 연기를 선보이며 새삼 격찬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찰리 카우프만이 창작자의 집착과 완벽주의를 블랙 코미디로 표현했던 <시네도키 뉴욕>이나, 시드니 루멧의 마지막 작품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그리고 앤더슨과 마지막 작업이 되어버린 <더 마스터> 같은 영화에서의 그의 모습 또한 기억한다. 화려한 ‘아카데미 버프’를 받았던 <카포티>나 <다우트>와 달리 <시네도키 뉴욕>이나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적어도 국내에서는) 감독의 치열한 연출이나 그가 보여주는 최고의 연기에 걸맞는 관객의 주목과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근래에 개봉한 <마스터> 역시 극단적으로 변해버린 국내 극장 환경에서 생각만큼의 흥행을 거두진 못했다.
호프먼은 무수한 영화들에서 오랜 기간 조단역을 전전하는 시기를 거쳤지만, 많은 재능 넘치는 배우들이 흔히 밟는 전철, 즉 신체적 특징만이 강조되는 감초 연기로 소모되는 위험에서 다행히 벗어났다. 폭 넓고 다양한 영화들에서 그만큼 다양한 색색의 얼굴과 연기를 보여주었다. 종종 주인공을 압도했으며 광기를 발할 때는 물론 조용히 흐느낄 때조차 스크린을 폭발시킬 듯한 에너지를 관객에게 전해주었다. 그는 스크린에서 자연스러운 배경 중 일부처럼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한 모습으로 녹아 있다가, 어느 순간 감독의 카메라가, 그를 담아낸 극장의 거대한 스크린이 너무 좁고 작게 보일 정도로 거대한 존재감을 발휘하곤 했다. 평범하고 기능적인 캐릭터의 평범한 대사가 그의 몸을 통과하면 정말로 옆집 남자가, 같은 조직의 동료가 던질 법한 일상과 현실의 무게를 띄곤 했다.
그는 종종 비열하고 비겁하거나 처세술을 온몸에 철벽처럼 두른 흉물스러운 현대인들을 연기했으나 우리는 그를 미워할 수 없었고, 때론 더없이 선하고 부드러운 내면을 드러내며 웃기도 했으나 우리는 함께 웃는 대신 눈물을 흘렸으며, 다소 경박하고 코믹한 몸놀림을 할 때도 우리는 마음 편히 웃는 대신 세상살이의 페이소스를 맛보았다. 그가 진지하고 심각한 고뇌를 할 때 우리는 그의 깊은 내면 속 심연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는 ‘픽션에나 등장하는 단순하고 정형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없다. 그가 그려내는 인물들은 언제나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치지만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혹은 현실에서 마주칠 법하지 않음에도 어느 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복잡다단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통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의 속성을 다시금 사유하였다.
연기와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는, 한참 제3의 진보정당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들떠 미국의 대선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때, 팀 로빈스나 수잔 서랜든 등과 함께 할리우드에서 랠프 네이더를 지지했던 몇 안 되는 배우 중 한 명으로도 기억에 남아 있다. 주어진 현실태 안에서 대안을 찾고 활발히 참여하며 활동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미국처럼 양당제가 확고히 뿌리를 내린 정치 지형에서 ‘다른 가능성’을 꿈꾸고 상상하는 사람 중에 내 우상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과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설사 랠프 네이더가 이상적인 대안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그런 그가 동양의 달력으로 새해 둘째 날 죽었다 하고 사인은 ‘약물 과용’이라고 한다. 하루가 꼬박 지나가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명복을 빌 마음의 준비가 되기는커녕 여전히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7년 전 안토니오니와 베르이만이 가셨을 때 나는 세계의 축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호프먼의 죽음으로, 그 무너진 세계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공기가 슈욱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우리에게 보여준 것보다는 아직 보여줄 것이 더 많이 있었다고 믿고 있다. 보지 못한 출연작도 많고 기대하고 있는 개봉 예정작도, 언젠가 그가 연기해 준다면 좋겠다 혼자 생각했던 역도 많은데. 노령으로 가신 이들의 죽음을 보며 ‘한 시대의 종말’을 느끼는 것과도, 아직 창창한 소년/청년의 뜻밖의 죽음을 보며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끼는 것과도 다른, 인생의 절정인 중장년기에 찾아온 때이른 죽음.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지만 아직은 늙지도 않아 무얼 어떡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내 세대에도 불현듯 죽음이 찾아올 수 있음을 예고하는 듯한.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의 그 처절하고 폭발적인 연기가 어쩌면 이제껏 약물에 의존해야 했을 정도의 깊은 고통의 산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뒤늦은 추측이 든다.
▲ 영화 '카포티'의 한 장면
관객으로서 나는 어쩌면 이제껏 그의 고통에 기생하여 쾌락을 누려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수십 편의 영화에서 아름다운 연기를 남겨놓고 간 이 사람에게, 이제 나는 이 순전한 이기심을 내려두고 팬으로서 유일하게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주어야 한다. 입에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말을 그에게 해야 한다.
안녕, 이제 편히 쉬세요.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고 사랑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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