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시작하기 전이 가장 재밌습니다. 고결한 사랑에 ‘재미’라니 무슨 말이냐, 싶으신 분들이 계신다면 양해를 구합니다. 지금부터 얘기할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운명적인 사랑’이 아니라 시쳇말로 ‘썸 타다’ 할 때의 관계를 말하거든요.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 이분들이야말로 썸을 타셨던 것 같아요…)

썸을 타다니, 이 말을 처음 들어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언젠가부터 젊은이들 사이에서 흔히 쓰이는 말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썸씽(Something)이 있었다”는 말이 발전하여 ‘썸남썸녀’라는 영어 + 한국어 조어가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나라의 국민답게 영어가 아주 몸에 배어 있네요. 훌륭합니다.
그리하여 각종 SNS와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에서 사람들은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하고 썸남썸녀를 부르짖습니다. 그(그녀)의 사소한 언행을 전부 이해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넘쳐납니다. 그들은 애달픈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묻죠. “그(그녀)의 행동, 이거 그린라이트(Green Light)인가요?” 그린라이트는 썸 관계에서 진도를 더 빼도 되는, 그(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원래는 야구용어라는데, 한국인은 영어와 마찬가지로 야구도 좋아하니까요.
세상에 썸을 타지 않았던 연인 관계가 있을 리는 없겠죠. 연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자연스러운 카오스. 이것을 “썸 타다”라고 말해버리는 순간, 그 이름을 불러주어서 꽃이 된 것처럼, 잡힐 듯 말 듯 불확실했던 ‘연애를 시작하기 이전 호감의 신호가 오가는 긴장 관계’는 이름을 얻고 많은 이들의 고민거리가 되었습니다.
▲ 위키백과에 수록된 바스티앙 비베스의 사진
지금까지 ‘연애를 시작하기 이전 호감이 오가는 긴장 관계 = 썸’에 대해 설명한 것은 프랑스 미남(!) 만화가의 이름을 소환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스티앙 비베스라는 이 청년은 1984년생으로 아직 젊습니다만, 한국에 출간된 그의 만화책은 단독 저작만 여섯 권이 있어요. 그중 네 권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아직 저는 바스티앙과 썸 타는 사이라 책을 전부 사지는 않았어요.) 비베스가 주로 다루는 소재는 청춘, 춤, 연애 시작 전의 남녀 관계 혹은 지리멸렬해진 연애 관계라고 할 수 있어요. 제가 그의 작품 중에서 최고로 꼽는 <폴리나>는 발레리나 소녀의 성장기인데 정말 아름다운 책입니다. 비베스는 사랑이란 두 사람이 추는 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의 귀여운 작품 <사랑은 혈투>에서 연인은 춤을 추면서도 치고 박고 싸우기도 합니다. (BGM으로 ‘브로콜리너마저’의 ‘춤’을 요청하고 싶네요. “우린~ 긴 춤을 추고 있어~”)
최근작 <내 눈 안의 너>라는 작품은 시작 전의 연애 관계, 즉 썸을 타는 관계를 묘사한 만화로, 제목처럼 주인공의 시선 속에 놓인 그녀의 모습으로만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있는 여학생. 적당히 집중하며 공부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다른 사람은 등장하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는 시선만이 있습니다. 독자는, 시선의 주인이 그녀와 도서관에서 마주 앉아 있다는 것 정도만 짐작할 수 있어요. 빨간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 그리고 머리카락 색깔보다 더 붉은 입술을 지닌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 맞은편 사람(시선의 주인공)에게 말을 겁니다. 마치 만화책을 펼쳐든 독자에게 말하듯 정면을 응시하면서요. “왜 그러세요? 계속 쳐다봤잖아요.” 마치 고다르의 영화 속 인물들이 가끔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대사를 읊었던 것처럼, 낯설게. 처음부터 끝까지 (1인칭 서술을 배제한) 1인칭 시점 방식을 선택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건, 다큐멘터리 형식에 가깝습니다. 바스티앙 비베스는 작품마다 화풍을 달리하거나 스토리 방식을 바꿔서, 이번 작품은 어떤 형식일까 늘 기대하게 되는 재미가 있는 작가입니다. (신작 <바스티앙 비베스 블로그>는 작가가 취미삼아 블로그에 올린 만화를 엮은 것입니다. 아직 구입하지 않았는데, 이 말도 안 되는 리뷰를 기고한 뒤엔 한 권 장만하고 말 것 같습니다. ‘밀당’에서 언제나 저는 패자거든요.)
<내 눈 안의 너>에서 독자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오직 주인공이 보는 것과 듣는 것입니다. 주인공이 말하는 것은 들리지 않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의 주인공, 아마 남학생으로 생각되는 사람의 대사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무슨 했을까, 계속 상상할 수밖에 없죠.) 그가 집중해서 보는 것은 클로즈업되고, 지루해하거나 딴청을 피우면 자세한 정보는 생략되죠. 그가 눈이라도 감아버리면 장면은 깜깜해지고 말입니다. 독자는 그의 시선과 마음은 파악할 수 있지만 그의 말은 들을 수가 없고, 그녀의 언행은 볼 수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마음을 짐작할 따름입니다. 그녀가 왜 웃는지, 그녀가 왜 슬퍼하는지…….
자, 이쯤에서 퀴즈를 내겠습니다. 빈 괄호를 채워 대화를 완성해보세요! 두 사람은 도서관에서 처음 만난 뒤 시험공부는 관두고 나가서 놀고 온 것 같아요. 노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았으니 그렇게 짐작할 수밖에요. 재밌게 놀고 이제 건물 입구에서 헤어질 참입니다. 대사는 아시다시피 전부 여자의 것으로, 책에서 옮겨왔습니다.
“시험 망할 것 같다.”
( )
“걱정은 별로. 그저 좀 열심히 해보려고 했었거든요. 힘내자, 잘해 보자, 도서관에서 집중하자…, 했는데 결국은…”
( )
“아니, 이렇게 스트레스 푸니까 오히려 시원해.”
( )
“오랜만이었거든요.”
( )
“응, 또 도서관에 가야 될 것 같아.”
( )
“좋아요. 그러면 전화해요.”
괄호에 무엇을 채워 넣든 이미 여자는 주인공한테 넘어온 것 같습니다. 여자가 자기 마음을 주절주절 늘어놓는다는 건 마음이 있다는 증거거든요. 그래도 퀴즈니까 문제를 풀자면, “시험 망할 것 같다”는 말에는 친절하게도 “걱정했어요?” 이런 대사가 나갔겠죠? 그다음에는 “논 거 후회해요?” “재미있었어요?” “중간고사 공부 계속 해야 하죠?” 이렇게 자기 얘기는 하나도 안 하고 여자 위주로 철저히 맞춰주다가 마지막에 제안하는 겁니다. “내일 같이 공부하는 건 어때요?” 이랬는데 두 번 다시 만나기 싫다는 여자는 없습니다. 이거 이대로 <썸녀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문제 출제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밥 한 번 먹고 끝날 수도 있거든요. 그렇다면 장소를 활용합니다. 데이트 장소는 도서관! 우리의 주인공이 함께 책을 골라보자고 꼬드겼는지 다음 장면에서 둘은 도서관 책장에서 책을 고르고 있습니다. 주로 여자가 책에 대한 수다를 떨게 두네요. “너 문리대 학생이니까 책 많이 알겠네…” 이렇게 말을 건넸겠지요? 여자는 살짝 흥분해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동화를 추천합니다.
“걸작은 아니야. 너무 특별한 걸 기대하지는 마.”
( )
“아…, 고맙습니다.”
( )
“히히… 그거에 대해 그렇게 말하다니 좀 신기해.”
( )
“뭐랄까… 마음에 들어.”
대체 이 남자는 뭐라고 말했기에 이 여자를 이렇게 녹여놓았을까요? “이런 동화를 좋아하다니, 안목이 대단한 것 같아”라고 말했을까요? 아니면, 그냥 맥락에 상관없이 “너 예쁘다”라고 한 건지… 이 괄호는 저도 못 채워 넣을 것 같아요. 이 남자, 너무 고단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베스는 연애로 진전되어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계속 남자의 시선으로 그립니다. 영화관에서 그녀가 그에게 다가와 키스합니다. 그의 시선, 즉 프레임 가득 그녀의 붉은 입술이 가득 찹니다. 키스하려면 눈을 감아야 하니까, 그녀의 붉은 입술, 암전, 그녀의 붉은 입술, 암전… 프레임이 반복적으로 연속됩니다. 묘하게 에로틱한 장면이에요. 그녀의 방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죠. 그녀의 침대를 보고, 벽에 붙은 그녀와 친구들의 사진을 구경하고(특히 남자와 찍은 사진), 마침내 욕실에서 샤워하고 새 옷을 입고 나온 그녀를 봅니다. 이때는 오직 그녀만 보여서 배경은 하얗게 생략됩니다. 다시 그녀의 얼굴, 입술, 암전, 침대에 누운 주인공 위로 상체를 숙인 그녀의 얼굴은 붉고 어둡고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퍼져 늘어뜨려지고. 3인칭 시점으로 그려졌다면 시시했을 이 장면은 독특한 시선에 힘입어 재밌어집니다. 여성분들은 이럴 땐 여자 얼굴이 이렇게 보이는구나, 하고 알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다신 이렇게 얼굴 들이밀지 말아야겠구나, 하고 반성했습니다.
썸 타는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만 굴러간다면 많은 사람이 “이거 그린라이트인가요?”라고 질문 글을 올리지는 않았겠지요. 연인으로 무사히 안착한 사람들이 세상에 넘쳐났겠지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썸 = 카오스라고요. <내 눈 안의 너>의 그녀는 동물원에서 원숭이를 보며 뜬금없이 눈물짓더니 저녁 식사하는 내내 우울해합니다. 그리곤 말합니다. “너 때문이 아니야. 내가 문제지.” 이 말, 썸이든 연인이든 상대방한테 들어본 적 있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저는 적어도 한 번은 들어본 적 있고 말해본 적도 있습니다. 무슨 심정으로 저런 말을 했냐고요? 글쎄요… 저건 그냥 모르겠다는 뜻입니다. (여자들은 원래 자기 마음을 잘 모릅니다. 너무 섬세해서 자기도 다 헤아리기엔 지쳐요.)
이렇게 분위기를 잡게 되면 주도권은 여자에게 넘어갑니다. “너희 집에 가고 싶어.” 그렇게 좋은 시간을 보냈는데, 새벽 4시가 넘은 시각에 여자가 갑자기 집에 가겠다고 합니다. 주인공은 아마 날벼락을 맞은 듯 놀랐겠죠? 수십 가지 생각이 오갔을 거예요. 내가 별로였나? 말려야 할까? 대체 이 여자는 왜 이러는 거지? 이 빨간 머리 아가씨는 또 이렇게 말하죠. “너 때문이 아니야. 내 탓이야.” “우리 여기서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녀의 마음은 제가 당사자가 아니니까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생각이 드네요. 주인공 남자보다는 이 여자 분이 훨씬 연애 고단수라고요. 만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제 귀에는 소리가 들려요. 이 남자가 타닥타닥 게시판에 사연 올리는 소리가요. “저는 그린라이트인 줄 알았는데요…”

오가진

책 만드는 사람. 넓고 얕은 취향의 소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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