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드마이어의 문명5>의 최신 확장팩 <멋진 신세계> (FIRAXIS Games)

문명하셨습니다

난가(爛柯)라는 말이 있다. '썩은 도끼자루' 그러니까 신선바둑을 구경하다가 수백년 시간이 흘러버렸다는 옛 이야기를 가리키는 말로, 시간 감각을 잃어버릴 정도로 몰입도가 높은 취미, 오락을 뜻한다. 난가 설화처럼 바둑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비슷한 의미에서 3대 막장제조게임, 3대 악마게임 또는 (가족도 내팽개치고 몰두하게 된다는 뜻에서) 이혼제조기 등으로 불리는 게임들이 있다. 게이머라면 쉽게 떠올릴 <풋볼 매니저>(이하 FM),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이하 HOMM), 그리고 아래에서 이야기하게 될 <시드마이어의 문명>(이하 문명)이다.

고유명사와 일반명사

게임을 포함해 어떤 허구 콘텐츠라도, 핵심 쟁점은 그것이 '무엇을 다루는가'는다. 시간적 공간적 배경, 인물, 사건의 인과 등등, 실재하는 것 또는 상상한 것에서 일부를 '잘라내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또 실재했거나 실재하고 있는 것을 잘라냈다면 거기에 허구를 덧붙이는 것은 물론이다.

현대 서울에서 일어날 법한 연애사건을 잘라낼 수도 있고, 사극이라면 특정 인물의 일생이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잘라내는 것일 테다. 또는 SF나 판타지처럼, 상상력을 발휘해 가상 시대와 배경을 창조하고 거기에서 일부를 잘라내서 콘텐츠를 만들 수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FM의 경우에는 세계 클럽축구계를 잘라낸 것이며, HOMM의 경우는 (5편 이후에는 다른 세계관이 되었지만) '마이트앤 매직'이라는 판타지 세계의 일부를 잘라낸 것이다.

그런데 게임의 타이틀인 '문명'이란 단어는 포괄하는 의미의 폭이 무지막지하게 넓은 말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물질적, 정신적 발전의 총체로, 따지고 보면 자연상태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이 '문명'이란 말에 포함될 수 있다. 따라서 문명이라는 제목의 이 게임이 잘라낸 것은 기원전 4000년 이후 '인류 역사의 거의 모든 것'이다. 아니 잘라냈다는 말보다, 압축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 이런 게 있다면 키메라보다 더 무서울 듯 하다.

흥미를 끌만한 일부를 잘라낸 게 아니라면, 게임 문명은 역사책과 백과사전의 반복에 불과한 게 아닌가? 대다수의 콘텐츠들이 특정한 시간대나 사건을 잘라낸 뒤 반복하는 것과 비교하면,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명은 재미를 줄만한 일부가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을 다루면서도, 훌륭한 오락으로 기능한다. 문명은 재미있을 만 한 것을 끄집어 내서 각색 및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이라는 단어에 포함되는 거의 모든 것들에 새로운 재미를 부여한다.

인류 역사의 각종 요소들 예컨대 국가, 기술, 예술, 제도, 자원, 등은 데이터베이스로 환원되어 게임의 재료가 된다. 이 점에서 문명이 역사책이 아니라는 말은 단순히 게임에 차용된 요소들의 정확성과 정교함(놀이인 이상 밸런스와 재미를 위해 조정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의 문제만을 뜻하지 않는다. 지금껏 실제로 일어났던 인류사가 고정된 고유명사라면, 시드 마이어의 문명은 그 고유명사를 만들어낸 일반명사들을 재료로 가져온다.

예컨대 한 권의 책은 고유한 내용을 담지만, 책의 내용을 채우기 사용되는 (어휘, 문법 등) 언어의 요소들은 전혀 고유하지 않으며 얼마든지 전혀 다른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쓰일 수 있는 것과 같다. 문명의 리플레이어빌리티(Replayability), 즉 여러 번 반복해 플레이하기 좋은 성질 또한 여기에서 유래한다. 다시 플레이 한다는 것은 같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이 아니라, 같은 언어로 쓰여진 다른 책을 읽는 행위에 가까운 것이다.

▲ 몇 년 전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던 '간디'. 유혈사태는 피하고 싶다. (FIRAXIS Games)

익숙한 새로움인가 새로운 익숙함인가

중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대강의 세계사는 이해하고 있을 것이니만큼, 문명의 '재료'는 따라서 상식에 가까운 것들이다. 심지어 게임의 재료가 되는 모든 요소에 대해 해설해 주는 '문명백과(CIVILOPEDIA)'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모른다 해도 클릭만으로 백과를 참조할 수 있다. 이처럼 문명은 '익숙하고 특별하지 않은' 것들로 가득 찬 게임이다.

문명이 때때로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언급되는 것 또한 이런 이유 덕분일 테다. 문명에서 자주 보는 단어들은 매우 교육적(?)이다. 농업, 목축업, 신학, 수학, 화폐, 문자, 항해술, 건축, 경제학, 철학, 산업화 등등, 만약 영문판으로 문명을 한다고 해도 모르는 단어에 헤매는 것이 아니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낯선 영단어의 의미를 익히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문명은 그것이 속한 장르인 '시뮬레이션'의 속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실제로 시행하기 어려운 일을 모의로 연출해 시험한다는 일상적 의미와 실제 역사의 요소를 모방물인 '시뮬라크르'로 취한다는 의미(이 경우에는 대개 불어 음가를 취해 '시뮬라시옹'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두 가지를 포괄한 시뮬레이션이다.

시뮬레이션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다수의 게임의 경우, 기준의 초점은 전자의 일상적 의미 즉 '재현성'에 맞춰져 있었다. 즉 얼마나 실재와 근접해 있는가, '리얼한가'가 문제다. 그런데 문명의 경우는 후자의 의미를 깊게 포함한다. 즉 문명의 핵심은 실제 역사의 요소를 최대한 비슷하게 가져와 반복시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제된 모방된 요소들이 원본과 무관하게 스스로 역동성, 적극적인 성질 갖는다는 점에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상식적이라고 할 만큼 매우 익숙한 요소들이,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새로운 전개를 매번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차별성은 다른 게임들, 특히 겉으로 유사해 보이는 역사시뮬레이션들과 비교하면 더욱 드러난다. 예컨대 문명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턴방식 역사시뮬레이션 게임 <삼국지>시리즈의 경우, 그 게임을 구성하고 있는 거의 모든 요소는 2-3세기의 중국 대륙의 고유명사들이다. 등장하는 인물, 지역, 사건 등은 소설 삼국지연의와 정사(正史) 삼국지를 등장하는 요소들을 잘 재현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정작 고유한 것들로 구성된 게임의 진행은, 오히려 강하게 고정된 '고유요소'들(매 시나리오의 시작은 항상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같다) 때문에, 게임을 여러 번 다시 해도 고유하지 않게 된다. 최적의 '공략'은 존재할 수 밖에 없고 게임에 정형화된 패턴이 생기는 것이다.

문명은 이와 정반대의 방향을 취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문명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요소는 일반명사다. 물론 이집트, 중국, 프랑스 등 선택하게 되는 진영은 고유명사지만 몇몇 특성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공유하는 면이 훨씬 많다. 설정에 따라 매번 게임을 시작할 때마다 세계지도조차 달라진다. 고정된 요소가 매우 적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문명의 매 게임은 고유한 진행을 하게 된다. 익숙한 요소들은 매번 새로움을 만든다.

▲ 게임 화면은 대략 이렇다. (FIRAXIS Games)

창조의 역설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는 고유명사가 많아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의 전체적인 진행은 별다른 차이가 없는 반복인 일반명사가 되기 쉽다. 반면 상식이라고 할 만큼 익숙한 것들을 재료 할 때 그것의 의미는 활짝 열려있기 때문에, 게임은 전체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무수하게 가지게 된다. 역설적이다.

요컨대 새로움, 창조의 가능성은 즉 재료의 '신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료의 자율성, 역동성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새로움 또는 창조라는 개념은 어떤 특정한 상태가 아니라,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하는 움직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가장 낡았다고 여겨지는 농업이나 제조업은 문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였고 '창조' 그 자체였다. 역으로 말한다면, 새로움과 창조적인 것만을 강조하고 요구하는 태도야말로 어쩌면 가장 낡고 진부한 것이 되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 조은상 하위문화평론가

'잉여'나 '덕후'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왔다. 감격스러운 일이다. 주류 언론에게 존재 자체가 무시당하던 이들이 이제는 하나의 유의미한 집단으로 부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 시선은 잉여/덕후의 정치적 가능성, 사회경제적 위치 등에만 쏠려있을 뿐, 정작 그들의 정체성과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 하위문화(sub-culture)에는 무관심하다.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등을 비롯해 하위문화는 지금 경계선에 서 있다. 수적으로는 이미 다수의 위치를 넘보고 있지만, 사회적 위상은 여전히 바닥에 있다. 물론 인간이 그러한 것처럼, 문화에도 왕후장상에 씨는 따로 없다고 필자는 믿는다.

이 연재에서는 주류언론에서 거의 다루지 않으나 유의미한 향유집단을 가지고 있는 하위문화 콘텐츠 등을 소개하고, 그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 '편파적으로' 다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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