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부터 4일 동안 종교, 종파 초월한 '화합과 성찰의 한마당' 열어

지난 2일(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들을 주축으로 한 천주교 촛불미사를 시작으로, 개신교 신도들의 시국기도회에 이어 어제(4일) 불교법회 및 촛불 행진이 시청 앞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에서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1천여명의 승려와 3만여명의 신도 및 시민들이 참석한 '국민주권 수호와 권력의 참회를 위한 시국법회'에서 시국법회 공동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수경 스님(불교환경연대상임대표)은 "촛불과 물대포! 이 둘의 관계는 지금 한반도에 사는 우리네 삶의 실상을 비극적으로 상징하고 있다"며 "국가 권력의 원천인 국민을 향해 국가가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국가의 존립 근거를 부정하는 일”이라고 입을 열었다.

▲ 지난 4일 저녁 서울시청광장에서 스님과 불자, 시민 1만5천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국민주권 수호와 권력의 참회를 위한 시국법회'가 열렸다.ⓒ미디어스
수경 스님은 그러나 “오늘 이 법회는 단순히 정부의 폭력과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을 성토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네 삶을 성찰하는 지혜와 자비의 마당이어야 한다”며 “국가가 국민을 적으로 만드는 비극적 상황을 공업(共業)의 소산으로 인식하는 대승 보살의 마음으로 참회와 구세(救世)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뛰어넘어 화합의 촛불을!

수경 스님은 이명박 대통령이 “부디 창조적 발상으로 현재의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기 바란다”며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뛰어넘을 화합의 촛불을 들고 나오십시오. 물로 불을 끄려 들면 모두가 패배자가 되고 맙니다. 더 큰 불로 세상을 밝히자고 제안하십시오. 그러면 국민들은 믿음으로써 기회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조계종 교육원장을 맡고 있는 청화스님이 '현 시국을 두 눈으로 봅시다'라는 제목의 시국법어를 낭독했다.

청화스님은 "우리는 80년대의 험한 산을 힘겹게 넘어 왔고 가까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이제 더 이상 넘을 산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돌연히 또 하나의 높은 산이 나타나 국민의 앞을 가로 막고 있다. 실로 경악을 금할 수 없다"고 탄식했다.

청화 스님은 또 “기차와 기차가 맞보고 달리면 그 결과는 공멸 뿐”이며. “더군다나 이런 대결 상황을 이기고 지는 문제로 접근하면 해결 방법은 없다”면서 “어느 쪽이건 진다는 것은 명예의식이 용납지 않기 때문에 쇠고기 문제는 잘잘못으로 성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물론 그 성찰에는 인간의 불완전함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누구나 실수도 할 수 있고 잘못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위대합니다. 바로 그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아량과 겸허함과 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다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잘못이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한 눈을 감았거나 아니면 대통령이라는 콩깍지가 씌어서 한 쪽 눈의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로인해 한 가지만 보거나 한 쪽만 보는 잘못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 눈 때문에 중고등학생들도 아는 생명의 가치를 대통령은 모르고 있다"며 "이것은 쇠고기 협상에서 볼 수 있다"고 질타했다.

'권력과 비뚤어진 언론의 촛불 의지 훼손 두고 보지 않을 것' 결의

▲ 미사 드리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송선영
시국법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성묵스님(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은 결의문에서 "우리는 더 이상 공권력과 비뚤어진 일부 언론에 의해 촛불의 숭고한 의지가 훼손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며 "촛불 하나하나에 새겨진 비폭력의 숭고한 정신을 담아 국민의 한결같은 바람인 생명권 보호와 국민주권 회복을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어 사회를 맡은 진명스님이 낭독하는 108배 참회문에 따라 광장을 가득 메운 참가자들의 108배가 30여 분간 계속됐다.

“즐겁게 뛰어놀며 공부할 나이의 여중생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오도록 못난 나라로 만든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 번째 절을 올립니다. 유모차를 탄 아이에게 물대포를 쏘는 정부를 만든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한 번째 절을 올립니다. 민주 국가에서 다시 피 흘리며 국민 주권을 외쳐야 하는 나라로 퇴행시킨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두 번째 절을 올립니다.

수구 보수 세력을 자비로 끌어안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세 번째 절을 올립니다. 민심을 천심으로 여기지 않는 대통령이 탄생하도록 제대로 주인 노릇을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경찰의 몽둥이와 방패로 국민이 맞는 폭력적 공권력이 되도록 국민 주권을 방치한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모두 부자 만들어 준다는 말에 속아서 온갖 탈법을 저지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 번째 절을 올립니다. '식탁의 안전'이 위협 받는 지경에서야 공동체의 안녕을 묻게 된 세상을 만든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 일곱 번째 절을 올립니다.

'촛불'이 곧 보살이요 부처임을 깨닫지 못하고 무자비한 공권력을 투입하게 만든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 생명의 존엄을 위해 켜든 촛불을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 아홉 번째 절을 올립니다.

이제는 우리들 일상의 삶이 촛불이 되어서 다시는 국민과 국민, 국민과 국가가 싸우는 일이 없기를 서원하면서 백 번째 절을 올립니다.”

"물러섬이 없는 믿음으로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생명과 평화의 길임을 사무치게 깨달아 새기면서 백여덟 번째 절을 올립니다"라는 말과 함께 마지막 절이 끝나자 시민들의 박수소리가 환호와 함께 길게 울려퍼졌다.

숭례문과 을지로 거쳐 시청으로 돌아오는 '묵언 행진' 펼쳐

법회를 마친 스님과 신도 및 시민들은 숭례문을 거쳐 을지로를 지나 시청으로 돌아오며 묵언 행진을 벌였다. 촛불 대신 연등을 든 시민들은 촛불소녀를 본뜬 '촛불소녀등'을 따라 행렬을 이었고, 이렇게 해서 5월 2일 이후 계속된 58번째 촛불집회는 10시 경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오늘은 천주교, 기독교 및 불교 신도 등 모두가 참석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오후 5시부터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스님들은 정의구현사제단의 단식 기도에 이어 오는 8일까지 단식 법회를 이어나갈 예정이다.

▲ 지난 4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스님들의 촛불법회에 참석한 문규현 신부(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사제복 입은 분)가 한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미디어스
지난 3일 동안의 각 종교와 종파가 주관하는 촛불집회가 보여 준 가장 큰 성과는 뭐니 뭐니 해도, “촛불은 하나! 모든 종교는 하나!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깨우쳐 준 것일 것이다.

시청 앞에서 진행되는 이번 종교계 집회는 현 촛불정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현 정권에도 당혹감과 엄청난 타격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종교 역사에 있어서도 유례가 없는 일로 기록될 것 같다.

우선 쇠고기 문제와 정국을 둘러싸고 천주교, 기독교, 불교, 원불교 등의 종단과 종파가 한 목소리를 냈다는 것 자체가 유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이 과정에서 각 종교와 종파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촛불집회를 평화적으로 이어가는데 합의할 수 있었다는 것도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원래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들이 2일 미사 이후에도 매일 촛불미사와 단식을 계속할 방침이었으나 기독교, 불교, 원불교 등의 대표들이 매일 각 종단과 종파가 번갈아 촛불집회를 열겠다는 뜻을 전하자 정의구현사제단 측이 이런 뜻을 흔쾌히 수용한 것도 의미있는 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그동안 배타적이기로 유명한 한국 사회의 각 종교 단체들이 서로 벽을 허물고, 상대를 인정하며, 현 정국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게 됨으로써 앞으로 각 종교 간 소통과 대화가 확산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중생제도 위해 스님 1천여명 서울 한복판 집결, 불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

특히 어제 다른 종교 성직자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저자거리와 거리를 두며 구도와 중생제도에 나선 스님 1천여명이 ‘산 속 저자거리’를 떠나 수도 서울 한복판에 모였다는 것 자체가 우리 불교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1일과 2일에 이어 어제도 평화롭게 진행된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한 스님은 “이제 우리 모두가 종교와 종파를 떠나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어 ‘마음의 촛불’을 비추어 이명박 대통령이 대오각성하여 국민의 소리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스님은 촛불집회가 시작된 지 60일이 되어 가는데도 참석자들이 끊이지 않고 촛불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현재 서 있는 자리와 상황이 그만큼 불편하거나 편안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스님은 “이명박 정부의 출범 이후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이 제 위치에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언론의 경우에도 기존의 오프라인 미디어가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인터넷을 비롯한 온라인의 세계에서 ‘새로운 광장’이 생기고 사람들이 이쪽으로 몰리는 현상이 생기게 되는 것”이라고 풀이하며, “이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평가했다.

▲ 지난 6월 30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시국미사에서 촛불을 든 신부님들. ⓒ정은경
스님은 또 “지난 3일 동안의 각 종단과 종파의 합의에 의해 릴레이 촛불집회가 열린 만큼 어느 종교와 종파의 집회에 사람이 얼마나 더 많이 혹은 적게 참석했느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오로지 5월 초에 어린 소녀들이 처음으로 촛불을 들었던 그 순수한 마음으로 촛불집회를 이어나간다는 것 자체에 모든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스님은 또 “이번 촛불 미사, 기도회 및 법회를 계기로 도법 스님을 비롯한 많은 스님들이 ‘자기 자신의 상(相)’을 내세우지 않고 ‘사람 속으로 걸어가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나온 것도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수경 스님이 어제 시국법회에서 "중생을 떠나서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소리를 없애고 메아리를 구하려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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