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권력(dual power)'이란 말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쇼군과 천황이 체제를 나눠 갖는 ‘권력과 권위의 이중적 지배구조’를 묘사할 때 쓰이는 개념이다. 정치적으로는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러시아 혁명 상황에서의 레닌이었다고 한다. 최근 촛불정국을 설명하며 몇몇 사람들이 '이중권력(dual power)'이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2008년의 한국사회가 '이중권력(dual power)'의 상황이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인증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이중권력(dual power)'이라는 지칭이 당면한 현상의 문화적 특징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대중행동의 타격 지점을 명확히 하기에는 매우 탁월한 분석으로 여겨진다.

지난 26일 정부는 <어려운 결정>이라는 제목의 광고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 매일경제, 서울경제에만 1면 하단에 게재했다. 같은 날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1면 하단에는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이 낸 <촛불은 참언론을 지지합니다>라는 광고가 실렸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간(27일 새벽)에도 이중권력은 몇 개의 상징적 영토에서, 구체적인 실체적 공간에서 날카롭게 치받고 있다.

▲ 26일자 조선일보 등에 실린 정부 광고
정부가 상황을 완전히 오판하여 물대포를 꺼낸 지난 6월 1일부터 2mb가 인왕산에 홀로 올라 끝없이 이어진 촛불 행렬이 부르는 아침이슬을 들었다고 고백한 20일까지 시민권력의 승리는 확실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20일을 기점으로 숨통에 치명상을 입었다고 여겨졌던 정부권력의 총반격이 시작됐다.

아시다시피 정부 권력은 어제의, 반공의, 역전의 용사이다. 람보이면서 록키이다. 혹시, 마지막 록키 시리즈인 < 록키 발보아(Rocky Balboa, 2006)>를 보았나? 지금 정부는 록키이다. 힙합 리듬에 그루브(groove)한 스텝을 밟는 경쾌한 젊은 챔피언(딕슨)을 상대할 수 있다, 이길 수 있다는 정념에 불타서 끝끝내 다시 고깃덩어리를 치고 필라델피아 의사당 앞의 긴 계단을 뛰어올라가 팔을 높이 치들며 '나 아직 죽이 않았으니 시간을 돌리도'를 외쳤던 록키처럼 정부권력은 얼굴은 조금 일그러지고 입술과 눈은 많이 비뚤어졌지만 그러나 여전히 다부진 어깨로, 아버지로 살아있다.

그 동안 '촛불소녀=>상실의 운동권=>배운녀자(유모차, 소비자)와 예비군=>민주시민=>과격 극렬 운동권'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시민권력에 대한 분석은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나왔다. 반면에 또 하나의 권력으로 서슬퍼런 정부권력에 대한 분석은 2mb에게만 집중되었다. 시민권력이 중층적인 것만큼 정부권력도 중층적이다. 아고라, 운동권, < PD수첩>만 때리는 정부권력의 단선적 무모함을 시민권력이 답습해서는 곤란하다.

▲ 세계일보 6월 12일자 8면
지금, 미디어의 할 일은 시민권력에 대한 상투적인 관전평이나 내놓으며 변질 운운하며 상표의 도장을 확인하는 럭셔리한 쇼핑이 아니라 정부권력이 내놓은 핵심적 상품들의 불량함을 추적 고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미 분석표가 나온 시민권력의 흐름도에 따라 정부권력을 분석해보면, '조중동=>어청수 경찰청장=>여론조사 기관과 전경련=>정부 관료 집단(김종훈, 검경)=>극우 선동 노인네'의 흐름이다. 물론, 동시에 모두를 타격할 수는 없다.

정부의 자세가 바뀐 것에 맞추어 심정적으로 아쉽지만 승리의 단축을 위해 몇 개의 순서를 맞바꿔야 한다.

전위에 섰던 촛불소녀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전체 기성에 엄청난 도덕적 투혼과 각성을 불러일으키고 장렬히 산화해가고 있다. 필연적으로 집회에 대한 지도력을 놓고 있다. 조중동 역시 대다수의 중간 계급에 행사하던 지도력을 잃어가고 있다. 조중동은 이미 촛불소녀에게 맞은 결정적인 펀치로 그로기 상태이다. 평소 조중동이 신봉하던 시장주의 원칙에 기반한 지극히 합리적인 소비자 운동이 조중동의 목을 옭죄고 있다. 이를 필요 이상으로 정치적 전선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방식은 전술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조중동 애호가들이 아무리 난리 탱고를 죽여도 지치게끔 되어가고 있다. 지금은 그냥 '조중동 아웃, 공영방송 사수'를 외치며 광장에 남아 있으면 된다. 그리고 급한 상황이 수습되고, '집단지성'이 궁극의 방향을 잡을 때까지 불량 미디어에 대한 소비자 운동을 최대한 성실하게 지지·지원하면 조중동과의 싸움은 결코 패배할 수 없는 게임이다.

두 번째 싸움이 굉장히 중요하다. 촛불 집회 초기에 이번 촛불 집회가 운동권이 맞은 상실의 시대라고 명명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당연히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성실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회 변혁을 고민하고 실천해온 집단의 저력은 하나의 현상으로 지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운동권의 당면 목표, 최우선적인 과제는 어청수 경찰청장에 맞춰져야 한다. 그는 명박산성의 기획자이다. 관리할 수 있는 분노까지가 민주주의라는 가장 악랄한 국내 정치의 레토릭을 고안해낸 반동분자이다. 만약, 그를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진짜로 운동권에게는 예고된 미래는 어쩜 진짜 상실의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 저에게는 아직 컨테이너 12척이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호언장담한 어청수이다. 운동권의 죽음을 아직 어청수에게 알릴 수는 없음이다. 죽으라고 덤벼서 끝내야 한다.

그리고 이른바 담론 투쟁, 학술적 기획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여론조사 기관들과 전경련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그랬지만, 여론조사의 수치 장난이 결정적 오판의 근거가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지난 20일 이후 정부권력이 자세를 바꿔 잡은 이유를 설명하는 유일한 근거는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와 촛불집회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가 반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론조사 수치로 장난쳐서 대중행동 전체를 교란하는 수법이 여러 번 있었다. 대중 여론이란 기만적 이름으로 들불처럼 번진 '대중지성'에 장대비를 뿌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게릴라성 호우에 대비해야 한다.

▲ 동아일보 6월 24일자 6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싸움은 김종훈이다. 한미 FTA 협상 때부터 오늘까지 정국의 막후 연출자는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다. 쇠고기 협상의 실질적 결정을 위임받고, 협상의 매 순간마다 판단의 그림자로 어른거리는 인물이다. 이미지 정치밖에 남은 게 없는 정부권력의 주연배우이다. 쇠고기 협상과 상관없이 김종훈과 같은, 검경과 같은 획책형 관료들이 정부권력의 막후로 작동될 때, 국민의 '후생(厚生, 사람들의 생활을 넉넉하고 윤택하게 하는 일, 건강을 유지하거나 좋게 하는 일)'은 언제나 시장, 자본, 경쟁의 밑일 수밖에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김종훈은 정리해야 한다.

'이중권력(dual power)'의 국면을 만들었기에, 국민이란 힘든 직업일 수밖에 없다. 독단적 정부권력이 명박산성 뒤에서 물대포를 쏴대며 고립적 고독에 몸부림 칠 때, 시민권력은 너른 광장에서 맨 몸으로 연좌하는 지향적 연대밖에 도리가 없다.

힘내자, 촛불아!

정부권력이 그로테스크(grotesque, 기괴한·우스꽝스런)한 자기 희열의 분열에 빠져들었다. 겉으로는 강해보이지만 속으로는 명실상부 '주화입마(走火入魔)'의 상태로 골아들고 있다. 지치지 말고 우선 상대의 팔다리 혈도를 짚자.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어청수, 김종훈부터 우선 젖히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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