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시대와 역사,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한 사람이 있다.’

작가 공지영의 소설 ‘인간에 대한 예의’에서 잡지의 이달의 책 란을 채워야 하는 주인공이, 비밀결사를 결성하다 체포되어 20년간을 감옥에 앉아있었던 권오규란 사람이 쓴 책의 소개 기사 첫머리로 떠 올렸던 구절이다.

작가가 90년대의 눈으로 바라 본 7-80년대를 그린 이 소설에는 함께 아파했으면서도 더 큰 고초를 겪어온 사람들과 시대에 대한 미안함을 드러내는 작가의 염치가 절절히 묻어난다. 그렇게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는 그 글 속의 얘기처럼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고 생각했고, ‘우리들은 저 80년대를 결국에라도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한겨레 10월6일자 25면.
싸우지 않고 아무 것도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그런 작가의 염치가 ‘무엇이 옳고 그런가가 아니라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은가만 얘기하는’시대에, 옳은 것을 고민하고 선택하며 살았던 사람들과 시대를 잊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염치를 일깨운다.

오랜 투쟁의 시대, 큰소리 피투성이의 몸싸움 없이 권리의 쟁취가 불가능했던 시대를 지나왔다. 왕조시대나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시절, 어느 시대건 민중의 권리나 민족의 운명, 민주주의의 회복 등 시대와 역사에 대한 염치를 고뇌해 온 싸움이었다.

좀 여유 있게 살게 된 지금, 2만불 국민소득에 웬만한 집에는 승용차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가끔씩 해외 나들이를 가는 지금, 누구나 옳은 것이 아니라 좋은 것만 찾게 된 지금도 ‘싸우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80년대의 시대적 관성은 여전하다. 다만 싸움의 대상이 바뀌고 몰염치한 싸움이 많아진 것뿐이다.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은 내놓지 않으려고 또 더 키우려고 싸우고, 없는 사람들은 그나마 조금 있는 것 지키려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운다. 재개발 현장에서 노사 갈등 현장에서 대학 등록금 납부현장에서 추모공원 등 혐오시설 부지 현장에서, 국회의 입법현장에서, 정부청사 앞에서, 삼삼오오 끼리끼리 모여서 오늘도 확성기로 몸으로 머리로 싸운다.

지방의회에서는 재정자립도 20%대의 시군구의원들이 수당을 100% 이상 올리는 의결을 하고, 빚덩이 자치구들은 3-4만 평방m의 청사를 신축하면서 주민을 위한 공간은 생각하지 않는다.

▲ 한국일보 10월9일자 6면.
이유나 목적을 알 수 없는 의원들 해외연수는 매년 뉴스감이지만 개선되지 않고, 민간근무휴직제를 이용해 연간 공무원 급여의 몇 배를 받고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대기업이나 법률회사에 근무하는 공정위의 공무원들이 있고, 퇴근시간 조작해서 연장 수당 챙기는 공무원도 있다.

연 이율 49%의 법정금리를 넘어 수백% 불법금리로 많은 피해를 만들고 있는 대부업체들, 그런 업체들의 편법광고로 돈 벌고 방치하고 있는 언론들과 대형 포털사업자들, 그런 살인적인 고금리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정책 당국자들이 있다. 도심 인도의 절반의 공간을 차지하여 보행을 심각히 방해하고 있는 변압기 분전함 지하철환기구 등 돌출 시설물들에 대해 지방자치단체들은 방관하고 있고, 시민의 통행에 불편을 끼치는 시위대들의 행렬에는 여전히 미안함이 없다.

시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주길

송금, 이체 등 일상적인 은행거래만을 통해 연간 5조원의 돈을 고객들 주머니에서 털어가는 은행들은 여전히 수수료 수입이 부족하다고 하고, 원성이 높아도 여전히 터무니없이 비싼 요금으로 시민부담을 키워가고 있는 이동통신사들은 요금인하 요구 소나기를 피해갈 궁리만 할 뿐 키워준 소비자들에 대한 고마움은 염두에 없다.

정치인, 공무원, 기업 누구든 상대 즉 유권자나 국민, 소비자에 대한 배려가 있다면, 상대를 한번 이용해먹을 대상쯤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전부터 있었던 당연한 권리를 존중하게 되면, 싸워야 쟁취되는 구시대의 관성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애써 크게 일군 업적이 없는 필부라도, 세금 꼬박내고 제돈 내고 물건사고 어느 일터에서건 소박한 삶이라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시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시민들이 말한다, 그래 그건 원래 네게 아니잖아!

대학 때 총기독학생회장을 지냈다. 졸업 후 서울YMCA 청년회원 활동을 시작해 87년 간사를 거쳐 올해 7월 시민운동에서만 20년이 지났다. 소비자보호, 법률구조, 사법개혁, 방송개혁, 공정거래 등 시민생활의 크고 작은 일에 함께했다. 시민의 것을 빌려 쓰면서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이들로 인해 피해당하는 시민 삶의 현장을 살피겠다. 강물처럼 흐르는 시민, 소비자의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 알려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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