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언론노조 KBS본부(본부장 박승규)가 정연주 사장 퇴진과 관련한 국민 여론조사를 해놓고도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가 나오자 공개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돼 파문이 예상된다. 정연주 사장 퇴진 투쟁에 매몰돼 있다는 안팎의 비판에 직면해 있는 KBS본부가 여론조사 결과까지도 목적과 의도에 맞춰 활용하고 있다는 논란과 함께 도덕성 문제까지 비화될 조짐이다.

23일 발행된 <한겨레21> 716호(7월 1일자) 표지이야기 '공영방송은 포위됐다' 기사에 따르면, KBS본부는 지난 5월 한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해 국민 1천명과 전문가 130여명을 대상으로 정연주 사장 퇴진 문제 등을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하고도 이를 공개하지 않아 의혹을 사고 있다.

한겨레21, "KBS노조, '정사장 임기보장 66%' 여론조사 결과 공개 안해"

<한겨레21>은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66%가 '정연주 사장의 남은 임기를 보장해야 한다'고 답했고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은 27%에 불과했다"며 KBS 한 기자의 말을 인용해 "노조는 자신들의 의도와 전혀 반대되는 결과가 나오자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한겨레21>은 "정연주 사장 진퇴와 관련한 조사 결과를 공개하기가 껄끄러워 전체 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은 것"이라며 "노동조합이 '정연주 사장 퇴진'이라는 목적에 매몰돼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미디어스> 확인 결과, 이 설문조사는 KBS본부가 지난 5월 20일 노조창립 20주년을 맞아 국민 1천명과 언론관계 종사자 등 전문가 그룹 135명을 대상으로 공영방송 관련 의식 조사를 위해 5월 14일부터 20일까지 진행했으며 그 결과를 5월 22일 조합원 대토론회에서 공개할 예정이었다.

▲ 지난 4월 22일 비대위 출범식을 마친 뒤 KBS본부 조합원들이 '정연주 사장 퇴진, 낙하산 사장 반대 촉구' 서명을 하고 있다. ⓒ서정은

그러나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6%가 '정 사장의 임기 보장이 필요하다'는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자 당초 계획을 접고 관련 내용을 일체 공개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설문조사 결과는 박승규 본부장과 부본부장을 비롯해 조합 간부 일부만 공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KBS본부는 5월 중순 열린 비대위 간담회에서 비대위원들에게 설문조사의 취지와 진행을 사전에 알렸고 그 결과를 5월 22일 토론회에서 공표할 것이라는 계획까지 밝혔다. 그러나 실제 설문 결과가 예상과 다르게 나오자 공개하겠다던 방침을 바꾼 것이다.

5월 22일 조합원 토론회에서 공표한다고 했다가 슬그머니 공개 안해

문제가 된 설문조사는 9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으며 KBS 공영방송의 역할, 정연주 사장 임기 문제, 사장 선임구조 개선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가운데 사장 선임구조 개선과 관련해서는 'KBS 구성원들과 국민들의 참여를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과가 나왔고, 이것은 최근 KBS본부가 '국민참여형 사장선임 제도' 쟁취에 투쟁 방향을 모으겠다고 선언한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설문조사 결과가 나온 지난달 21일 전후는 KBS 이사회의 친한나라당 성향 이사들이 '정연주 사장 사퇴권고 결의안'을 추진하려던 시기였고, KBS본부도 '정연주 사퇴, 낙하산 반대'에 70%의 조합원이 참여한 서명운동 결과를 발표하는 등 정 사장에 대한 사퇴 압박이 최고조에 달했던 민감한 시기였다.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대다수가 '정 사장 임기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설문조사를 통해 알고 있으면서도 '공영방송 수호'를 위해 KBS 본관 앞에서 촛불집회를 벌이는 시민들과 '정연주 사장 퇴진' 문제를 놓고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워왔다는 점에서 KBS본부의 '도덕성' 논란까지 부르고 있다.

따라서 내부 구성원들은 KBS본부가 즉각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하고 한달 가까이 공개를 하지 않은 경위를 밝혀야 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 지난 4월 22일 비대위 출범식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박승규 본부장(맨 앞 오른쪽) ⓒ서정은

KBS 한 PD는 "조합원들을 상대로 '정 사장 퇴진과 낙하산 반대' 촉구 서명운동을 진행한 KBS 노조가 국민들의 '다른' 여론을 파악했다면 투쟁 노선을 심각하게 검토하는 과정이 필요했는데도 사장 퇴진 압박을 계속한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KBS 한 관계자는 "KBS 노조는 KBS 본관 앞에서 촛불집회를 벌이는 시민들과 대립하면서 이들이 '정연주 퇴진 반대'를 주장하는 것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며 "이미 국민들의 70% 가까이가 정 사장 임기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문을 통해 알았으면서도 촛불시민들에게 마치 '배후'나 '사주'가 있는 것처럼 성명을 내는 등 시민들을 모욕했다. 노조의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한 관계자는 "국민 의견을 조사해놓고 이를 한달 넘게 발표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다"며 "설문조사 결과 뿐만 아니라, 설문조사에 사용된 조합비 내역도 당장 공개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KBS본부 "2월 조합원 여론조사도 공개 안해…외부 조사라 크게 염두에 안둬"

이에 대해 KBS본부 박승규 본부장은 23일 <미디어스>와의 통화에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해서 모두 공개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며 "여론조사라는 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지난 2월에도 조합원 설문조사를 했지만 당시에도 발표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박 본부장은 "당시 2월 조사에서는 정연주 사장의 당장 사퇴를 70%가 요구했으나 사내 갈등을 더 야기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 공개하지 않았다"며 "지난 5월 조사의 경우는 예상보다 결과가 달랐지만 외부에서 KBS 문제를 많이 알 수도 없고, 사장 문제도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를테니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의도한 결과가 아니라서 공개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박 본부장은 "여론조사 결과가 조합에게 유리할 수도 있고 불리할 수도 있겠지만 심각한 변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정연주 사퇴'를 90%가 요구한다고 해서 우리가 무슨 대단한 힘을 받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냥 참고용일 뿐이다"라고 일축했다.

박 본부장은 또 5월 중순 비대위 간담회에서 설문조사 공개 방침을 밝혔던 사실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편 <미디어스>는 KBS본부의 입장을 듣기 위해 노조 집행간부들과 연락을 시도했으나 회의 참석 등을 이유로 연결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 대변인을 맡고 있다는 KBS본부 김성진 총무국장은 "미디어스와는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 PD협회에 물어보라"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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