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문화진흥회(아래 방문진·이사장 김문환)가 달라졌다. 2010년 당시 엄기영 사장이 사퇴한 이후와 김재철 전 사장의 후임을 결정하는 현재 과정을 들여다보면, 방문진 여당 추천 이사들의 태도가 3년 전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문진은 4일 정기 이사회에서도 사장 공모에 대한 논의를 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일정을 미뤘다. 설상가상으로 여당 추천 이사들이 7일부터 6박 7일로 프랑스 칸으로 출장을 떠나 오는 18일 이사회에서야 사장 공모 논의가 가능할 전망이다.

18일부터 공모 일정이 논의가 된다면 5월 중순 이후에야 후임 사장의 윤곽이 드러난다는 게 MBC 안팎의 전망이다. 김재철 사장 '해임안'이 가결된 시점이 지난달 26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MBC는 최소 2달 동안 '사장 공백'이라는 불안정기에 놓여 있게 된다.

▲ 방송문화진흥회 ⓒ 연합뉴스

엄기영 사퇴 때는 4일 만에 공모 돌입

반면 엄기영 전 MBC 사장이 2010년 2월 8일 자진사퇴로 물러났을 때는 방문진은 '3일' 만에 신임 MBC 대표이사 사장 선임을 위한 논의를 했다. 나흘이 지난 시점인 12일부터 공모가 시작됐고 20일에 마감했다. 당시 김재철 사장 후보자는 26일 최종 후보자가 됐고, 곧바로 MBC 사장으로 임명됐다. 사장 공모의 모든 절차가 한 달도 걸리지 않은 셈이다.

김재철 전 사장 해임 이후 사장 공모 절차 논의에 미온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 여당 추천 차기환·김광동 이사는 당시 8기 방문진 이사로서 후임 사장 절차에 속도를 낸 대표적 인물들이다.

8기 방문진의 대변인 역할을 하던 여당 추천 차기환 이사는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문화방송사장은 공모 절차를 거쳐왔기 때문에 지금 정기 이사회는 17일로(2010년 2월) 잡혀있지만 아마 그 전에 임시 이사회를 소집해서 문화방송사장 공모 절차를 밟을 거라고 보고 있다"며 사장 공모 절차에 '속도'를 낸 바 있다.

그런 이들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차 이사는 4일 정기 이사회에서 "(해외출장 가는 것 때문에) 공모가 3~4일 늦어진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냐"며 서두를 것 없다는 입장을 표했다.

김광동 이사 역시 4일 "1~2주 공모가 미뤄진다고 일정이 늦다고 볼 수는 없다. 공모에 대한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는다면, 내 생각 같아선 소위원회를 구성해 절차에 대한 논의를 해 봤으면 좋겠다"며 후임 사장 공모 절차 방식에 대해 의문을 드러냈다.

차기환, 김광동 이사는 김재철 전 사장이 일방적으로 이사장에 '통보'했던 지역사 및 관계사 임원 내정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며 해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해임안 의결 시 이들은 해임안 '반대'의 뜻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며칠 만에 입장이 뒤바뀐 것이다.

▲ 김문환 신임 방문진 이사장 ⓒ뉴스1
사장 공모가 늦어지는 이유는?

이와 같이 여당 추천 이사들의 '늑장'이 공모 일정이 미뤄지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지만, 4일 정기 이사회에서 공모가 논의조차 되지 못했던 것은 김문환 신임 이사장의 '독단' 때문이었다.

김문환 신임 방문진 이사장은 4일 이사회에서 독단적으로 MBC 사장 공모 논의를 안건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방문진 이사의 말에 따르면, 김문환 이사장은 3일 이사들에게 'MBC업무 보고가 4일 이사회의 안건이고, 사장 공모 논의는 간담회에서 진행한다'는 내용이 담긴 메일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4일 정기 이사회에서는 방문진 사무처와 MBC 업무보고만 이루어졌다.

야당 추천 최강욱 이사는 4일 기자들과의 자리에서 "29일 임시 이사회에서 사장 공모 일정 논의가 있었고, 주총 때문에 4일로 미뤄진 것이라면 당연히 4일 이사회에서 일정 논의되는 게 정상"이라며 이사장의 독단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최 이사는 "이사회 자리에서 '엄기영 사장 사퇴 이후에는 자기들이 시켜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바로 후임 사장을 임명하고, 김재철 사장은 예상 외로 해임됐고 현재 위로부터 오더가 떨어지지 않았기에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라는 비난을 자초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며 "김 이사장은 자체 업무로 1~2주 늦어지는 게 무슨 문제냐고 말했지만, 실제로 안광한 부사장은 직무대행 신분에서 4일 자기 맘대로 조직개편을 단행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왜 사장 공모는 미뤄진 것일까? 김문환 이사장을 비롯한 일부 여당 추천 이사들은 김재철 사장 해임안 의결에서 반대표를 던졌던 인물들이다. 이들의 입장에선 김재철 사장의 해임은 '예상치 못한, 그리고 달갑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또 8기 방문진부터 여당 이사들이 의사결정 상에서 '6대3'으로 우위를 보여왔던 구조가 이번 김재철 사장 해임안 가결에서 깨졌기에 '김재철 체제'를 비호해 오던 일부 여당 이사들 입장에서는 기존 구조의 재구축을 위해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MBC의 한 관계자는 "방문진 이사들이 김재철 사장 이후의 사람을 아직 쉽게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라면서도 "그동안 의사결정 과정에서 보여왔던 6대3 구조가 깨졌다. 수적 열세에 몰린 이사들에게는 설득을 위한 시간이 더 필요한 것 아니겠느냐"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사장 공모가 지지부진한 데에는 청와대의 결정이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 김재철 MBC 사장이 신년사를 하고 있는 모습 - MBC 특보 화면 캡처

엄기영엔 '간섭', 김재철엔 '방관'

과거와 비교해 볼 것은 단지 '시기' 문제만이 아니다. 엄기영과 김재철 전 사장을 대하는 방문진의 태도에도 두드러지는 차이가 있다.

2010년 엄기영 전 사장이 사퇴한 이유는 김우룡 이사장을 포함한 여당 추천 이사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방문진은 MBC 경영진(편성본부장·TV제작본부장·보도본부장·경영본부장) 자리 인사권을 두고 엄 전 사장과 갈등을 빚게 됐고, 엄 전 사장은 압력을 넘지 못하고 2010년 2월 8일 스스로 물러났다.

방문진은 엄기영 전 사장과는 인사권을 두고 '힘 겨루기'를 할 정도로 대립했지만, 김재철 전 사장의 행태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김 전 사장 시절에는 감독 기구로서 최소한의 역할도 하지 못한 것이다.

김 전 사장은 2012년 6차례에 걸쳐 방문진 이사회 참석을 하지 않았다. 불참한 대부분의 이사회는 '170일 장기 파업' 국면과 그 이후 노사 갈등 해소를 위한 'MBC 노사의견 청취' 자리였다. 그러나 김 전 사장은 노조와의 충돌이 우려된다며 일방적으로 불참 의사를 표했다. 이에 대해 방문진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올 초에도 김 전 사장은 김재우 전 이사장이 부재하다는 이유로 MBC 업무보고를 거부하며 방문진을 뜬 바 있다. 방문진은 해임 직전까지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받지 못했다. 그간 4차례의 상정 끝에, 단 한 표의 차이로 해임안이 가결됐다는 사실 역시 김재철 전 사장과 엄기영 전 사장에 대한 방문진의 태도가 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에 대해 감사원은 지난 2월 보고서를 통해 "방문진은 불출석 사유의 정당성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2012년 2월 1일 제3차 정기이사회 등 5차례에 걸친 이사회 불출석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고, 2012년 9월 27일 임시이사회 불출석에 대해 1회 경고조치를 하는 데 그쳤다"고 지적했다.

또, 감사원은 방문진의 △MBC 결산 심의 부적정 △MBC 감사 교체 관련 사전협의 부적정 △MBC 경영진 성과급 결정 부적정 △방문진 출연금 수입처리 부적정 △방문진 사무처장 채용 및 인사교류 불합리 △감사원 감사결과에 대한 사후조치 부적정 △MBC 사장 및 감사의 직무수행에 대한 관리·감독 부적정 등을 지적하기도 했다.

본연의 임무보다 중요한 건 방송 개입?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보다 8·9기 방문진은 프로그램 '개입'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8기 방문진 여당 이사들은 <PD수첩> 등 MBC 시사·교양 프로그램에 대해 지속적인 압박을 가해 '방송섭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2010년 당시 지상파 3사의 PD들과 언론계, 언론 시민사회, 정치권은 성명을 통해 '방문진이 MBC의 경영 관리·감독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넘어 프로그램까지 개입하는 것은 월권'이라며 김우룡 당시 이사장에 대한 퇴진을 요구했다.

9기 방문진 역시 이 지점에서는 8기와 맞닿아있다. MBC는 지난 1월 <특집대담-마유미의 삶, 김현희의 고백>을 방영했고, 이 역시 방문진 여당 추천 이사들의 요구를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김광동 이사는 <미디어스>와의 인터뷰에서 "'PD수첩'은 2003년 당시에 '김현희는 가짜다'라고 말하며 대한민국 정부를 테러정부로 만들었고, 테러를 저지른 북한을 두둔했다"며 "그간 우리 사회에서 그 방송과 내용이 잘못됐다는 지속적인 문제 제기가 있었다. 잘못된 MBC 방송을 바로잡는 차원에서 김현희씨에게 자리를 마련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김 이사는 "방송사에 대한 정치적 외압을 막고, 제작의 독립성을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해야 하는 곳이 방문진"이라면서도 "잘못된 방송, 막장 드라마, 예능에서 나오는 비속어 등은 총괄적인 경영의 범주"라고 말했다.

당시 전국언론노동조합 MBC 본부는 성명을 통해 "무엇보다 가장 중대한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방송문화진흥회와 방문진을 앞세운 일부 세력에 의한 청부방송이라는 점"이라며 "방문진 일부 이사들, 그리고 그 배후의 세력에게 경영진이 바친 프로그램"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방문진의 무능은 고스란히 MBC의 부담으로

MBC의 한 관계자는 작금의 사장 공백에 대해 "사장 자리가 공백이 될 경우 불안정성이 심화되기 마련이다"라며 "경영상태가 악화될 가능성이 있고, 안정되지 않으면 광고주 입장에서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김재철 이후'가 중요하다는 말이자 새 사장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이지만, 언젠가 오게 될 MBC의 새 사장은 현실적으로 '김재철 체제'의 그늘에서 벗어나긴 어려울 전망이다. MBC 경영이 예년에 비해 처참하기 때문이다.

안진회계법인이 작성하고 지난달 29일에 공시된 MBC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MBC의 2012년 영업이익(152억 원)은 전년 동기(2011년·740억 원) 대비 80% 급감했다. 2012년 MBC 총 매출액(8021억 원)은 전년 동기(8910억 원)에 비해 9.6% 줄어들었고, 매출액 중 광고수익은 5514억 원으로 2011년 6632억 원에 비하면 1000억 원 이상 떨어졌다.

반면 매출원가(비용)는 6221억 원으로 전년 대비 17억 원 늘어났다. 당기순이익 역시 800억 원으로 2011년 1174억 원에 비하면 31.8% 감소했다. 신년 하례식에서 '열정 MBC'를 주창하며 MBC 정상화를 외쳤던 김 전 사장이었지만, 김재철 체제의 2012년 숨겨진 성적표는 초라한 것이었다.

김 전 사장의 경영 실책을 전적으로 방문진의 탓으로 돌린 수는 없다. 하지만 감독 기구로서 본연의 역할에 방문진이 충실했다면, 김 전 사장의 막무가내식 경영을 견제했더라면,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라는 게 MBC안팎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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