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1954년생이며 73학번인 주대환은 제법 정치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도 생소한 이름이지만 진보정당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에겐 낯익은 이름이다. 그는 1970년대 민청학련 사건(1974년), 긴급조치 9호 위반(1978년), 부마항쟁(79년)으로 세 차례 감옥에 다녀왔다. 그 후엔 고향인 경남 마산과 서울 인천 등지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1980년대 그가 활동한 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인민노련)은 당대의 대표적인 노동운동 조직이었다. 현재 진보정의당 대표인 노회찬 전 의원과 <철학 콘서트>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황광우 등이 당시 그의 동료였다.

혁명적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소련 붕괴 이후 노선을 바꿔 합법적 진보정당 운동의 길로 들어선다. 그가 대표였던 한국사회주의노동당 관련 조직 사건으로 1992년에 국가보안법으로 또 한번 구속되지만, “이미 혁명을 포기했다”는 그의 선언에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관대한 판결로 화답한다. 이 사건은 어떤 운동권들에겐 ‘전향’으로 받아들여졌고, 다른 이들에겐 “남한 사회에서 일군의 좌파들이 혁명노선을 포기했음을 천명한 유일한 공식적인 선언”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합법적 진보정당 운동을 고민하던 그는 한국 사회에는 독일 사민당보다는 영국 노동당의 노선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한 대중적 진보정당을 기획한다. 그렇게 그는 1997년의 ‘국민승리21’과 그 후신인 2000년 민주노동당의 창당에 기여한다. 그후에도 대체로 고향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이면서 민주노동당 초대대표였던 권영길을 위해 지역구를 닦았다. 권영길 전 의원이 경상남도 창원을에서 재선까지 할 수 있었던 데엔 그의 역할이 크다는 평가가 많다. 2012년 총선에서 권영길 전 의원의 지역구였던 경남 창원을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기 위해 민주당에 입당했지만 민주당내 경선에서 패배했다.

2004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에 당선되지만 당의 지지율이 하락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때 당적을 정리하고, 현재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다. 한국 사회에서 ‘영국 노동당’ 실험도 실패로 끝났기에 이제 ‘미국 민주당’을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후배들에게 또 한번 ‘전향’했다는 비판을 들었다. 평생 운동권으로 산 셈이지만 그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외에는 별로 한 일이 없으며 생존을 위해 평생 부모를 속이고 친구에게 구걸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 유전자는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정치운동을 위해서는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 과학주의자이기도 하다.

활동가로서의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끝내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치인’은 되지 못한 그에게서 최근의 정국에 대한 견해와 진보정당 운동의 소회를 들었다.

▲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

미디어스(이하 ‘미’): 최근 페이스북에 <논어>에 대한 자신의 주해를 연재하고 계신 것을 보았다. 이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주대환(이하 ‘주’): 제작년에 황광우씨가 내게 <논어>를 해석하는 책을 한 권 내보라고 권유했다. 당시엔 아득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논어>를 번역본으로 한 번 읽었을 뿐이다. 당시 도서관에서 붙잡았는데 너무 재밌어서 그 자리에서 다 읽었다. 하지만 황광우의 제안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내 한문 실력이 모자라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 총선에서 민주당에 들어가 권영길 지역구를 이어보려 하다가 크게 망신을 당한 후, 뭔가 마음 정리할 것이 필요하더라. 그래서 자전을 찾아가며 <논어>를 세 번 읽었다. 그러니까 약간 보일 듯 말 듯 하더라. 내가 <논어> 499장에 대해 모두 논할 능력은 없다. 그러려면 10년 정도는 공부해야겠지. 하지만 100장 정도를 꼽아서, 그에 대한 해석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씩 페이스북에 연재하고 있는데, 이제 1/3 정도는 한 것 같다.

: 유물론자로 산 세월이 길 텐데 공자의 말에서 어떤 느낌을 받나. 어떤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 물론 동아시아의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이 육십에 이르러 엉터리라도 <논어> 주석서 한 권쯤은 써서 이미 나온 수만 권에 보태고 싶다는 허영심에서 출발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

논어에서 '나의 정당'이 실패한 이유를 찾다

공자는 정치가로서 실패하고 교사로 성공한 사람이다. 그 역시 정치적으로는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러다보니 그의 말을 듣다보면 나 자신의 경험에 접속하는 울림이 있고 그 심정에 공감이 간다. 그렇게 접근하는 거다. 게다가 공자는 자기 개인이 권력을 잡지는 못했으나 당을 만드는 데는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이다. 그 점에서 나와 내 동지들보다 나은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를 깊이 고민해 보기도 한다.

어쩌면 그가 당을 만드는데 성공한 이유는 젊은 시절 나와 동지들이 구태의연한 전통문화라 도외시했던 ‘禮(예)’와 ‘樂(악)’에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예’는 동지들 사이에 인간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데 효과를 발휘했고, ‘악’은 동지들 개개인이 분노를 스스로 조절하는 데 필요하였을 것이다. 공자는 예와 악을 지닌 사람을 바로 군자라 하였다. 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능력이나 정책적 날카로움보다는, ‘黨人(당인)’으로서 생활을 잘 하고 조직의 분열을 피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군자라 봤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유가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타 학파에 비하여 깊지 않았고, 때로는 비현실적인 정책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예와 악을 갖춘 군자를 강조하면서 조직의 확대 발전에는 성공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페이스북에 <논어>의 구절에 대한 내 나름의 주해를 올리면 ‘고수’들이 조언해줘서 피드백을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이 작업을 시작하니 무엇보다 동창들이 좋아한다. 나는 친구들과 많이 다른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근데 이제 60이 되니 친구들도 나도 서로를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큰 거 같다. 그런 차에 그들도 아는 <논어>를 주해하니 친구들이 많이 좋아하고 내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고 한다.

: 망신을 당했다 표현하시는데 민주당에 들어간 얘기를 하셔야 할 것 같다. 들어갈 때는 나름대로의 기획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들어가신 게 아닌가.

: 그런 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공천 신청을 위해 개별적으로 입당을 한 거다. 근데 공천이 안 된 상황이었고, 탈당을 할까 고민도 했는데, 손학규 후보를 돕게 되어 그냥 당적을 유지했다. 입당과 탈당을 반복하는게 좋은 모습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진보정의당에서 후배들이 사민주의하자고 부른다면 이제 또 그쪽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예전부터 사민주의자를 자처했으니, 이건 정치 이전에 정체성의 문제다. 가는 김에 민주당 내 몇몇 훌륭한 분들도 설득해서 같이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일게다.

: 민주당에서 권영길 전 의원의 지역구에 출마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 당시 권영길 전 의원이 자기 지역구에서 통합진보당 후보로 선출된 이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사실상 보이코트했다. 그래서 참모진 가운데 일부가 나에게 민주당 후보만 되면 야권 단일화 과정에서 밀어주겠다고, 생각이 없냐고 말했다. 편법을 쓰자는 건데, 나도 십년을 살았던 동네라서 약간의 연고권이 있다고 생각했고, 사회민주주의를 외치고 다니지만 큰 호응이 없으니 힘이 들고, 일대일 접촉으로 사회민주주의연대 회원 조직하러 다니는 데 지쳐 있었다. 그래서 국회의원이 될 수만 있다면 사회민주주의운동을 더 크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혹했다. 혹하지 않았다면 망신당하지 않았을 텐데.

남한 좌파, 민주당 내부의 '당내당'을 고민할 필요가 있어

사실 그 지역은 민주당 세가 워낙 약하다. 기초의원도 한 명도 없는 정도고 야권은 권영길 지지로 단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권영길 전 의원과 나의 친분관계도 있고 해서, 민주당 입장에선 그냥 나한테 공천을 줘도 되는 문제였다. 그런데 지구당 위원장과 경선을 붙이더라. 그분이 그래도 미리 준비를 한 분이니 내가 이길 수 없었다. 20여표 차이로 졌다. 경선을 해서 졌으니 나의 부족 이외 무슨 할 말이 있겠나.

: 혼자서 들어갔다 나왔다 하더라도 과거의 노선 변경과 비슷한 비전의 변경이 있었다. 영국 노동당과 같은 정당을 만들겠다는 꿈을 버리고 미국 민주당과 같은 정당을 만드는 것이 현실적인 길이라 말씀하셨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민주당이 그 길을 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는데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 내가 한 말이 향후 1~2년에 대한 전망은 아니다. 향후 10년 20년 단위로 생각해 볼 때 민주당이 미국 민주당과 같은 수준의 진보정당으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상황이 오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1930년대의 미국 민주당이다. 이 시기 미국 민주당이 남부 지역주의 정당에서 전국적인 진보정당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이러한 일이 남한 사회에서도 일어날 거라고 보고 있다.

결국 한국 사람들 생각에 나는 정치가로 입문하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기준에 정치인이 되려면 적어도 국회의원이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정치인도 아니면서 노선을 많이 바꿨다. 혁명적 사회주의자였다가, 사회주의당을 만들었다가, 노동당으로 가자고 했다가, 이제는 미국 민주당으로 가자고 하고 있다. 소선거구제에서 독립적 진보정당이 존속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지난 세월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걸 아니까 최태욱 교수 등 많은 정치학자들이 제도를 바꾸자고 한다. 필요한 말이다. 하지만 정치를 하려면 현재의 제도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고민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나는 남한 좌파들이 미국 좌파들처럼 민주당 내에 ‘당 내 당’을 먼저 만들어야 하는게 아니냐는 생각을 하는 거다.

물론 현재의 민주당이 미국 민주당에 비하면 많이 후지다. 루즈벨트나 존슨이 리드했던 그 민주당이 아니다. 무엇보다 내가 자주 쓰는 표현으로는 ‘후진국형 진보’에 기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손학규 후보를 도왔고 경선 이후엔 안철수 후보가 좋다고 보았다.

: 지난 대선의 민주당 공약은 복지나 노동의 측면에서 많이 진전했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에게 외면을 받고 패배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정책은 만들었지만 ‘혼’은 없었다고 본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알아본다. 실제로 그걸 중점적으로 할 거라는 믿음을 못 준 것이다. 한미FTA나 강정마을 같은 이슈에 대한 집착은 그것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진보가 ‘반미친북’이란 인식을 공고화하게 했다. 복지국가 정책이 ‘해’라면, 그걸 가리는 민족주의 정서라는 ‘구름’이 민주당에 있다. 기본적으로는 486세대의 문제다. 나는 486세대 운동권을 일종의 ‘괴물’로 본다. 전두환이라는 ‘괴물’이 만들어낸 반대편 괴물. 민중들이 박정희 독재까지는 그 필요성을 어느 정도 납득했더라도 전두환까지 용인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전두환은 억지로 대통령이 된 거다. 그러면서 그를 반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어떤 괴물들을 낳았다.

전두환은 박정희와 달리 카리스마나 권위도 없었다. 시위하는 우리들도 ‘웃기는 놈’이라 생각했다. 그런 이가 광주에서 사람을 죽이고 집권했는데, 82학번 83학번들은 그 광주의 참극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미국은 개입에 신중했던 거고 전두환을 안 말린 것에 불과했는데, 그들은 주범을 미국으로 지목했다. NL과 PD가 이 점에서 다르지 않다. 80년대 운동권을 지배한 NLPDR의 정서가 광주의 원인을 미국으로 지목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이게 그후 민주화 운동의 기본 정서가 되었다.

486세대 운동권들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동일시했다. 당시 대학생들이 독립운동사를 읽고 그랬다. 이 정서는 민주당과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을 넘어서서 야권 전반에 존재한다. 민주당에도 이런 정서를 가진 국회의원들이 많다. 또 중앙당 국장, 도당 사무처장, 국회의원 보좌관 등 당 실무를 담당하는 연배가 죄다 이런 정서다. 선거 패배는 486세대 운동권이 자신들끼리 모여 당을 하다 보니 민심과 현실을 살피지 못해서 나타난 현상이라 본다. 말하자면 리더십 부재다. 사람들은 왜 진보진영이 한미 FTA에 열을 올린 만큼 한EU FTA에는 열을 올리지 않았는지 의아해 한다. 그런 식으로 편견이 강화된다.

햇볕정책 역시 문제다. 햇볕정책도 북핵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해야 하고, 새로운 대응책을 찾아야 하는데 민주당 및 야권은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객관적으로 평가해본다면 햇볕정책은 북한의 도발을 줄이는 ‘위기관리 정책’으로는 성공했지만 북한 체제를 변화시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통일정책’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에겐 통일정책이 필요하다. 아닌가? 결국 ‘반미친북 민족주의’의 감성을 벗어나는, 내 표현으로는 ‘선진국형 진보’가 필요한데 야권에서 이런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정동영 전 의원도 그런 면에서 아쉽다. 사회경제분야에선 사민주의에 거의 근접했는데, ‘햇볕정책의 적자’를 자처하며 통일정책에서는 그 틀을 못 벗어난다. 이 틀까지 벗어나야 민주당이 환골탈태할 수 있다.

지성계도 문제다. 백낙청 선생의 분단체제론에서부터 시작되는, 어떤 것들을 이제는 재검토해야 한다. 백낙청 선생을 젊어서부터 존경했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어쩌면 그가 2013년 체제론이란 걸 내세웠기 때문에, 우리가 2013년 체제를 논의할 기회를 잃었다고 판단한다.

: 페이스북에서 조심스럽게 표명하시긴 했지만 안철수 후보를 지지한 것도 의외였다. 강준만 교수와 같은 정치인을 지지하게 된 것 아닌가? 십 년 전, 민주노동당 시절에 민주노동당 기관지 <이론과 실천>에서 강준만 교수와 대차게 논쟁을 하셨다. 강준만 교수가 노무현 지지자였고 주대환은 ‘비판적지지’를 거부하고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자는 입장이었다. 십 년의 세월이 아득하다.

: 그때 지금은 민주당 대변인으로 간 박용진의 글이 시발이 되어 세 사람이 논쟁을 했다. 당시엔 강준만을 잘 몰랐다. 그후 그의 책을 많이 읽었다. 고맙더라.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과 <한국 현대사 산책>은 우리 같은 사람이 공부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안철수, 사회경제적 문제에 천착해야 성공한다

안철수에게 기대를 건 이유는, 그가 아까 말한 486세대 운동권의 정서를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연령은 486세대가 아니지만 결국 486세대 운동권들에게 운동을 배우고 그들과 함께 한 이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본인이 입문한 시기를 따서 스스로를 (운동권에서는) ‘83학번’이라고 칭하지 않았던가? 안철수 전 원장이 현충원에 가서 참배하는 것을 보고 그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486세대 운동권보다 2030세대와 정서를 같이 하는 귀한 존재로 보았다.

: 하지만 국회의원 정수축소와 같은, 다분히 포퓰리즘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등 한계도 분명하지 않았나?

: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주변에 정치학자가 한 명도 없는 것인지, 아니면 주변 사람들 말을 안 듣는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문제지 않은가? 의원수를 늘려도 모자랄 판국에 줄이자니. 그건 잘못된 길이다. 안철수도 사회경제적 문제로 치고 나가야 한다. 양극화 문제, 청년실업 문제 등, 본인이 청춘콘서트에서 대면해서 청년들의 인기를 얻었던 그 문제들에 맞서야 한다.

: 주대환이 생각하는 청년세대의 문제란?

: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흔히 기성세대가 이렇게 편한 세상에서 청년세대가 야심이 없다고 질타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내가 50년대생인데,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50년대는 매우 역동적인 시대였다. 동네마다 아이들이 태어났고, 모든 국민이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한 시대였다.

그리고 그 시대의 역동성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농지개혁이었다. 초대 농림부장관인 조봉암이 6.25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소작농들에게 농지를 나눠줬다. 지주들에겐 증서를 줬고, 농민들에겐 5년 동안 소출의 30%를 국가에 내라고 했다. 농민들 입장에서야 소작농을 할 때는 50%씩 지주에게 냈는데 당장에도 이득이고 5년 지나면 자기 땅이 되니 누가 그걸 거절했겠는가? 반면 지주들은 전쟁이 끝나고 인플레가 1천% 이상 일어나면서 국가가 준 증서가 휴지조각이 되었다. 국가로선 큰 부담을 던 거다. 당시 시골지주들이 모두 몰락했다.

예순이 회고하는 50년대의 역동성

지금의 청년세대에게도 그런 최소한의 기반을 줘야 열심히 살라는 요구를 할 수 있지 않겠나. 당시 시골에는 자기 땅을 삼천평 정도 가진 자영농이 즐비했다. 삼천평이라 하면 열다섯 마지기 정도다. 그 땅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자녀를 여러 명 키워냈다. <워낭소리>를 보면 농사지어서 9남매를 키워낸다. 요즘 청년들은 자녀를 두 명 가지기도 어려워하지 않나? 그렇게 여러 자식을 낳고, 대체로 모든 자식들을 중학교까지는 보냈다, 우리 세대 때도 초등학교 취학률이 100%였다. 전후 미처 책상이 준비되지 않아 한반 60명 넘는 학생이 몰렸는데 한 학기 동안은 바닥에 퍼질고 앉아 공부했다. 당시에 공고 정도 나온 또래 친구들이, 지금 현대중공업 노동자이고 그런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장남은 고등학교 정도까지 보내고, 공부를 잘 하면 대학교육까지 시켰다. 당시 경희대나 한양대 같은 서울지역 사립대학들은 그냥 등록금이 있으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학을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이라 부르지 않았나? 집집마다 소가 한 마리 정도는 있었다. 그 소를 몰고 다니며 풀을 먹이는 것이 내 또래 아이들의 의무였다.

나는 50년대에도 경제성장이 제법 이루어졌을 거라고 보는 편이다. 다만 자영농들이 자급자족한 소출 등은 통계에는 반영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 흥미롭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에 “박정희가 한국사 반만년의 가난을 해결했다” 류의 영웅신화를 벗어날 수 있는 것 같다. 또 한편으로는 그런 50년대 사람들의 욕망을 이해할 때, 박정희의 쿠데타와 그의 통치가 한국 사회에 쉽게 받아들여진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 그렇다. ‘잘살아보세’란 정서가 이미 50년대 사람들에게 있었는데, 정치권이 그걸 반영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박정희가 나오고 사람들이 보기에 제대로 된 비전을 제시했던 거다. 그러니까 지지했다. 63년 대선에서는 박정희가 15만표차로 근소하게 이겼는데, 67년 대선에선 윤보선을 압도했다. 사람들이 그런 점을 인정한 것이다. 앞서 말한 자작농들이 박정희를 지지했다고 봐야 한다. 63년 대선 때보면 윤보선이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들어 '빨갱이'라고 매도했다. 그래서 전쟁 피해를 많이 받은 지역들, 수도권 및 충청지대까지는 윤보선이 이겼는데 영호남 농민들이 압도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해 그가 당선되었다.

물론 71년 대선 때와 그 이후는 또 상황이 다르다. 계속 집권하기 위한 무리한 행동들을 했다. 71년에 부정선거를 크게 했고 그후 유신을 선포했으니까.

요즘 사민주의자의 시선에서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대한민국 건국에 조봉암 같은 좌파들의 공로도 있다는 걸 상기하고, 박정희의 역할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그가 50년대 한국 시민들의 욕망에 조응하여 60년대를 만들어갔다는 걸 인정해야 그의 70년대도 냉엄하게 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486세대 운동권들의 한국 현대사관엔 이런 균형이 없다.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였고, 부끄러운 역사였다는 식이다. 물론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은 아름답거나 멋진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 그러나 모든 나라의 건국신화는 나중에 꾸며진 이야기들이다. 나는 그래서 ‘사생아였지만 훌륭한 유전자를 타고 나와 제법 잘 자란 아이’가 대한민국이라고 본다. 공자도 사생아였다. 태어날 때 사생아라고 해서 나쁜 유전자를 가지고 나쁜 인생을 살아간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 뉴라이트의 논리를 전유하는 멋진 반박이란 평가도 가능하지만 어떤 이들은 뉴라이트에 투항했다고 말할 만한 인식이다.

: 나는 내가 잘못되었다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잘못 되었다고 본다. 내게 청년시절 영향을 줬던 학자들이 있다. 박현채 선생이라든지, 지금은 뉴라이트 가 계신 안병직 선생이라든지, 리영희 선생이라든지. 그런데 지금 회고해보니까 이 양반들이 모두 마오주의자였다. 동아시아에서 맑스 레닌주의는 곧 마오주의였다. 그리고 마오주의가 동아시아 사회경제를 파악하는 이론은 식민지반봉건론이었다. 이미 조봉암이 농지개혁을 이뤄 자영농들이 열심히 일해 경제성장을 일구어내는 그 사회에서, 지주수탈관계가 사회 모순의 핵심이라고 봤던 거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아 한국의 현대사로

그래서 당시 박현채 선생의 제자였던, 장상환 교수가 농촌에 내려가 조사를 하는데, 없어. 그런게 없는 거라. 남한 사회에 지주수탈 관계가 없고 이미 모두 자영농이었다. 땅이 조금 많은 양반이 친지에게 자기 땅 일부를 대여해주는 정도가 있었지만 그런 이들도 모두 스스로 농사를 지었다. 수십만평 땅을 소작농에게 대여하고 자기는 일 안하면서 먹고 사는 지주가 이미 남한사회에 없었다. 그걸 좌파란 이들이 해방 이후 삼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몰랐다. 서글픈 일 아닌가.

나도 마오주의에서 시작했다. 그러다가 레닌주의자가 되었고, 소련이 붕괴한 후 독일 사민당을 기웃거리다가, 영국 노동당 노선에 몸을 바쳤다가, 이제 미국 민주당을 말한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에서 미국 민주당을 만들기 위해선 우리 현대사의 발전경로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에 한국 현대사를 들춰본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이제 겨우 한국 사회에 다시 돌아왔다. (계속)

▲ 주대환 대표의 페이스북 캡쳐 화면. 최근 그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한참 "논어"를 읽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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