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바 ‘국회선진화법’이 논란의 대상이 됐다.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확대원내대책회의에서 "국회 선진화법을 악용하고 인사청문회법상의 권한을 남용하는 사례가 너무 빈번하다"며 국회법과 인사청문회법의 개정을 시사한 것이다.

소위 국회선진화법은 애초에 국회에서 너무 많은 파행이 일어나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준다며 좀 더 품위 있는 의정활동을 하겠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이는 구체적으로는 국회법을 개정하는 것으로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요건을 제한하고 안건에 대한 무제한 토론 등 소위 필리버스터 등의 행위를 보장하며 의장석 또는 상임위원장석의 점거를 금지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한구 원내대표의 볼멘소리는 ‘과거 같았으면 정부조직법개정안을 국회의장 직권상정으로 날치기 통과를 할 수 있었는데…’ 라는 심중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 소위 국회선진화법이 논의되던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이 법안에 찬성했으나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주된 논리는 ‘왜 스스로 다수파임을 포기하느냐?’는 것이었다. 과반의석을 점하기만 하면 정부와 여당이 원하는 대로 국회에서 힘을 쓸 수 있는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황우여 당시 원내대표와 박근혜 당시 비대위원장은 이를 어떤 ‘합리적 국회 문화 정착’의 일종인 것처럼 주장하며 결국 새누리당 차원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래놓고 이제 그 후과를 감당하는 상황이 되자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른 바 국회선진화법이 진리일 수는 없다. 이 법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원리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특히 소수정당의 경우 제1야당과 행보를 같이 하는 경우에는 상관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논의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교섭단체를 구성하지 못하는 정당이라면 더 그렇다. 의장의 직권상정은 교섭단체의 대표의원에 의해 합의되기 때문이다.

참고. 국회법 중 의장의 직권상정 요건을 규정한 조항.
제85조(심사기간) ① 의장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위원회에 회부하는 안건 또는 회부된 안건에 대하여 심사기간을 지정할 수 있다. 이 경우 제1호 또는 제2호에 해당하는 때에는 의장이 각 교섭단체대표의원과 협의하여 해당 호와 관련된 안건에 대하여만 심사기간을 지정할 수 있다.
1. 천재지변의 경우
2.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의 경우
3. 의장이 각 교섭단체대표의원과 합의하는 경우
②제1항의 경우 위원회가 이유없이 그 기간내에 심사를 마치지 아니한 때에는 의장은 중간보고를 들은 후 다른 위원회에 회부하거나 바로 본회의에 부의할 수 있다.

당시에도 이런 지적 존재했으나 새누리당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소위 국회선진화법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다른 말을 한다. 그야말로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국회선진화법 이야기를 새삼스레 꺼내는 것은 ‘야당 발목 프레임’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조선일보는 5일 민주당이 소위 국회선진화법을 악용해 민주당 소속인 이종걸, 배재정 의원의 징계를 저지했다고 보도했다. 이종걸 의원의 경우 2012년 8월 박근혜 당시 의원을 트위터에서 ‘그년’이라 지칭했다는 이유로, 배재정 의원의 경우 2012년 10월 정수장학회 이창원 사무처장 통화기록이 담긴 휴대폰 화면을 몰래 촬영해 공개했다는 이유로 윤리위에 제소됐다.

▲ 민주당이 국회선진화법을 악용해 자당 의원들의 징계를 막았다는 보도를 한 조선일보의 5일자 기사.

보도에 따르면 윤리특위 징계소위는 두 의원에게 ‘공개회의 사과’ 처분을 내렸고 이날 전체회의에서 확정될 예정이었지만 민주당이 두 의원의 징계안을 국회법 개정으로 설치된 ‘안건조정위원회’에 회부 요청해 무산됐다는 것이다. 이 덕분에 일부 SNS공간 등에서는 이 사건을 자연스럽게 이한구 원내대표의 발언과 정부조직법개정안 처리 등과 연결해 야당의 이기적인 만행 때문에 새 정부가 할 일을 못하고 있다는 식의 여론이 퍼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안건조정위원회에서 어차피 다시 논의를 해서 90일 내에 확정하면 되는 사안인데다가 징계 수위에 있어서도 ‘사과’와 ‘경고’가 의원의 활동범위를 제약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를 국회선진화법의 부작용인 것처럼 보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새 정부가 할 일을 못하고 있는 데에는 박근혜 대통령 본인의 잘못이 더 크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야가 협상을 하고 있는 데 갑자기 대국민 담화를 자처해 찬물을 끼얹은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며 국무회의도 사실상 열지 않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국정 보이콧이라 말할 만하다.

이전 정부의 장관들이 여전히 국무위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어 국무회의를 굳이 안 할 이유도 없는데 이러는 것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 있는 설명이 필요하다. 참여정부와 MB정부에서는 이전 정부의 국무위원들을 앉혀 놓고라도 국무회의를 했다. 그들도 이전 정부의 국무위원들과 굳이 국무회의를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국정운영을 위해서 한 것이다. 남 탓만 하지 말고 최소한의 자기 할 일은 하는 그런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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