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드북스'에서 한윤형 기자의 질문에 답을 하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모습. 사진은 윤다정 기자.

민주당 지지자들 중에는 윤여준 전 장관을 인정할 수 없는 이들도 많을 거라 본다. 그것은 그가 박정희 시대에 관료가 된 사람이라서라기 보다는, ‘전두환 정권의 청와대’에 있었던 사람이어서일 것이다. 최근 메디치미디어 출판사가 주관하는 강연회에서 청중 중 한 명이 ‘돌직구’를 던졌다. “이런저런 소신은 이해하겠는데 어떻게 80년에 국내도 아니고 해외(그는 79년부터 83년까지 싱가폴 공사관에 있었다)에 계셨던 분이 전두환 정부의 청와대에 들어가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윤여준 전 장관은 이에 대해, “아픈 부분이다. 변명의 여지는 없다. 다른 재주가 없어 가족들을 먹여 살릴 방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공무원이라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 가자고 생각했다. 청와대 안에서도 생각이 다른 이들이 있어 같이 산책할 때는 ‘각자가 있는 곳에서 좋은 결과를 내자’고 격려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들 모두 자기정당화 논리란 걸 잘 안다. 아들들에겐 이렇게 얘기했다. ‘너희들 때문에 그만두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하는 사람들이 가족이 없어서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들과 나의 차이는 용기의 문제였다. 너희들은 신념에 어긋나는 일을 강요받을 때 신념에 따른 결단을 실천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그런 길을 택한 사람들에 대한 ’리스펙트‘는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답했다.

누군가는 이 답변에 수긍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윤여준은 그런 사람이다. 이 인터뷰 기사는 이전 기사에서 이어지는 그런 사람과의 대화의 기록이다. (전편 기사 링크)

미디어스(이하 ‘미’): 이번에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이유가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연관이 있다고 보시나.

윤여준 전 장관(이하 ‘윤’): 연관이 많다. 찬조연설에서도 한 얘기인데, 평소 민주화운동과 그에 헌신하다 희생당하고 고통받은 사람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었다. 기회가 온다면 그 빚을 갚고 가야 한다는 생각을 늘 했다. 그래도 이번 대선에는 어느 쪽에도 눈길 둘 생각이 없었다. 그래야 할 절박한 의미가 내겐 없었다. 70대 초반 나이가 있으면 선거캠프에 얼굴 내미는 일은 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자리를 빼앗나. 일체 할 생각이 없었다.

근데 문재인 후보와 가까운 이 중 마음 속으로 존경하는 학자 분이 계셨다. 잘 모르다가 이번에야 알았는데 뜻밖에 문재인 후보와 오랜 세월 가까이 지낸 모양이었다. 그분이 내게 문재인 후보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안 그래도 만날 때마다 문후보가 자꾸 장관님 이야기를 한다고 말씀하셨다. 진정으로 그리 말씀하시니 칼같이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그럴 생각이 없다고 했는데 문재인 후보가 보자고 했다. 그걸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만나서 두 시간 정도 얘기를 했다. 그 과정에서 이 정도 품성과 자질 가진 사람이면 이 사람을 통해서 빚을 갚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문재인 후보가 인품이나 자질에서 부족한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을 안 했을 것이다. 사람을 잘못 고르면 빚을 갚기는커녕 더 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웃음) 근데 사람이 정말 호감이 갔다. 또 선거를 도와달라고 했다면 안했겠지만 국민통합위원장을 부탁했으니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안철수도 박근혜도 다 국민통합 말하지 않았나. 한국 사회의 갈등이 심하니까, 이건 국가적 과제 아닌가. 그래서 선거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 작년 대선 담쟁이캠프 회의에 참석했던 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윤여준 전 장관의 모습 ⓒ뉴스1

새누리당은 집권당의 역할을 하지 못할 것

: 그렇게 해서 겪어본 민주당은 어땠나. 새누리당과 민주당을 모두 겪어보신 상황인데 두 당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나.

: 민주당은 이번에 잠깐 겪었을 뿐이므로 피상적인 관찰평만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차이는 확실히 느껴진다. 새누리당은 권력에 순치된 체질이라 정치인들이 관료적 습속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민주당은 좋게 말하면 그에 비해 훨씬 리버럴하고 분방하다.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 좋은 방향으로 말씀하셨지만 뒤집어보면 새누리당은 권력욕 밖에 없어서 그 외 모든 걸 희생할 수 있는 반면 민주당은 다른 기준이 많아서 일이 잘 안 되고 그런 측면도 보이지 않았나.

: 물론 민주당은 당내 세력이 복잡하다. 가보니 크게 친노, 비노, 반노로 나눌 수 있겠더라. 그렇게 세 갈래다. 그런데 친노도 다시 들어다보면 몇 갈래로 나뉜다. 세력이 다양하니까 갈등을 한다. 하지만 민주정당에 당내 세력이 있고 그들이 갈등하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갈등의 내용과 관리의 수준이 문제인 거다. 새누리당은 갈등이 아예 없다. 일인지배정당이다. 권력에 순치된 집단이라 당내 계파를 용인 않는 강력한 당 총재가 다스려도 반발이 없다. 작년 총선 때 사실상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공천을 좌지우지한 것 아닌가. 이미 그때 언론들이 사당화 얘기를 하고 일인지배정당이라 했다. 근데 새누리당의 풍토에선 다른 질서란게 있을 수 없다. 원래가 수직적으로 통제받는 정당. 그렇게 보면 민주정당이라기 딱하다.

내 지론이지만 정당이란 게 왜 중요하냐를 따져물어야 한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정당은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학자들이 헌법적 역할이라 부르는 게 그거다. 근데 그런 역할은 새누리당이 민주정당이라야 감당할 수 있는데 새누리당은 그 역할을 할 정도의 민주정당이 되지 못한다. 우선 진성당원이 없고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통제받는 것에 익숙하다. 집권당이 이런 사정이면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형성하기가 힘들어진다. 박근혜 정부가 탄생했을 때 새누리당이 원내 다수당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대통령과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선 힘든 얘기다. ‘본능’ 자체가 그쪽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

미: 그러면 정국운영이 어떤 식으로 될까. ‘박근혜 시대’가 어떨지 감을 못 잡겠다고 문의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이명박 정부에서 큰 피해를 본 문화와 노동 분야에서 그런 질문이 들어온다. 혹시 예측이 되시는 부분이 있을지.

윤: 보수 진영이 진보 진영에 가진 컴플렉스 중 하나가 자기들이 ‘문화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인식이다. 그들은 이를 ‘문화권력’이라 부른다. 그들이 보기에 문화예술계 종사자는 대개 진보적 성향이다. 저 사람들이 중요한 선거 있으면 그 몇 년 전부터 TV 드라마, 영화, 음악, 만화, 그림 등으로 교묘하게 정치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위험하게 생각하고 피해 입었다고 생각하니 집권하면 그 쪽을 약화시키겠다 마음먹은 게 아니겠는가.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CEO 출신이다. 근데 CEO 출신 중에도 인문학적 소양이 뛰어나 문화예술을 애호하는 사람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는 대여섯 번 정도 밖에 못 봐서 확실하게 얘기하기는 힘드나, 문화예술과는 인연이 먼 삶을 살아왔다는 느낌이 든다. MB는 CEO인데다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말하자면 자수성가형이다. 자기 확신이 강하다는 뜻이다. 자기 방식을 고수해서 성공한 사람들은 정치인으로선 다소 위험한 구석이 있다. MB는 기업은 국가와 전혀 다른 것이고 CEO와 대통령의 자질도 전혀 다른 거란 걸 인식하지 못했다. 자기 입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기업 CEO라고 했다.

그래서 아주 많은 과오를 남겼다. 본의였겠나. 아니라고 본다. 대통령이 되면 누구라도 훌륭한 대통령이었다고 기억되고 싶어 한다. 학교 다닐 때 보면 말썽쟁이도 반장을 시키면 잘하려 한다. MB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동기를 의심하거나 그런 건 전혀 없다. 하지만 CEO 마인드를 가지고 민주주의 국가를 운영하는데 왜 문제가 안 생기겠는가? 국가는 공익을 추구하지만 기업은 사익을 추구한다. 추구하는 가치가 본질적으로 다르다. 기업은 이윤을 많이 내야 하니까 생산성과 효율성을 강조하고 그러다 보니 사람을 자르는 구조조정까지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국가가 국민을 해고할 수 있는가? 그게 말이 되는가? 그러니까 국가라는 건 기본적으로 효율성과 생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운영 조직이 아닌거다. 더군다나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가치는 생산성을 핵심으로 하는 그런 게 아니다. 결국 이 사람은 좋은 뜻으로 한다고 했겠지만 민주주의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통치를 안 했다. 민주주의 과정을 생략하고 기업 총수처럼 하다가 스스로 많은 갈등을 만들어냈다.

▲ 광주환경연합 등 환경단체 회원들이 지난 16일 최근 감사원에서 지적된 영산강 4대강 공사현장의 부실,수질악화 생태계 교란 등의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16일 전남 나주시 영산강 죽산보 현장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뉴스1

'민주화 이후'의 국가모델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4대강이 대표적인 상황 아닌가. 4대강사업 추진본부 가서 대통령이 이 사업은 대통령인 자신이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심사숙고 끝에 결정했으니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얼마나 놀라운 얘기인가. 어떤 민주공화국에서 대통령의 결정에 대해 국민이 논쟁해선 안 된다고 선언할 수 있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깜짝 놀랐다.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 근데 더 놀라운 건 그걸 아무도 문제삼지 않았다는 거다. 정치권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언론도 그랬다. 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대통령이 헌법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을 뱉었고 이게 공개적으로 보도됐는데 난리치는 정치세력도 언론도 없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수준이 아직 그 정도까지는 가지 못한 거다.

: 관심 없는 분야는 마치 기업이 외주 주듯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느낌도 받았다.

: 그 문제는 좀 다른데 요즘은 아웃소싱을 많이 하는 세상이다. 앞으로는 정부도 그래야 할 것이라 본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국가가 과대성장했고 사회가 과소성장 상태였다. 권위주의 시대엔 사회가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가 많이 커져서 국가가 사회보다 힘이 약하다는 평이 나올 정도다. 국가 능력의 저하가 염려될 정도다. 정보화혁명 때문에 민간이 국가보다 전문적인 정보를 더 많이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국가 관료가 질적인 측면에서나 양적인 측면에서나 민간 전문가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앞으로는 정부도 규모를 줄이면서 적절한 아웃소싱을 하는 법을 익혀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MB는 자기가 관심 가진 분야도 민주주의 국가 운영 방식 원리에 맞게 일을 처리하지 않았고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몰랐다. 본인은 그 과정을 낭비라 보았고 생략하고 내가 결정하면 따라오면 되지란 식으로 생각했다. 딴에는 애국심이 있었다 본다. 지금 사람들이 박근혜 당선인에 대해 걱정하는 것도 비슷한 계열이다. 아직 취임을 안 했으니 취임해서 일정 기간 국가를 운영하는 걸 봐야 판단이 가능하지만 지금까지 당을 운영하거나 인수위 운영하는 모습만 보면 걱정이 된다는 거다. 불통이니 밀봉이니 하는 게 다 그런 걱정 아니겠는가? 하지만 주변에서 이런 말을 많이 들을테고 본인도 느끼는 게 있으니 대통령이 되면 잘할 수도 있다.

: 한국 사회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했다고 설명하시는데 그 이후에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랄까, 프레임이랄까, 그런 것은 무엇이 될 거라 보는지.

: 그걸 내놓을 정도가 되면 내가 대통령에 나가야 하지 않았겠나. (웃음) 근데 해결책은 모르더라도 지금의 과제가 무엇인지 정도는 공유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그게 잘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다. 한국 사회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거쳐 여기까지 왔다. 한국의 산업화라는 게 결국은 박정희 모델이다. 학문적으로는 권위주의 발전국가 체제라 부른다. 후진국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위해 권위주의가 필수적인지 민주주의로는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에 대한 여러 논의가 있다. 그런데 다수 학설은 산업화 과정에선 권위주의가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다는 얘기인 것 같다. 그리고 산업화에 성공한 이후 민주화의 과정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민주화에 걸맞는 국가운영 모델을 만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국가 지도자들이 그걸 못 만들었다. 민주화의 상징적 존재인 두 대통령도 권위주의 방식으로 통치했던 거다. ‘제왕적 대통령’이었다. 얼마나 역설적인 일인가.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것을 없애고 바꾸겠다는 문제의식 좋았다. 정부 이름을 ‘참여정부’로 지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가 무릎을 쳤다. 기가 막히게 좋은 이름이라 생각했다. 당시 세계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 국민의 참여 욕구가 분출할 때였다. 그걸 어떻게 제도적으로 수렴해서 대의제를 보완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이던 시절 등장한 정부였다. 문제의식이 대단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집권 이후에 그 노력은 별로 안 하더라. 문제제기는 좋았는데 문제설정이 제대로 안 된 것이다. 문제제기와 문제설정은 다르다. 문제설정은 방법론이다. 두 개가 똑같이 작용해서 결과가 나온다. 정책을 만드는 능력 뿐 아니라 추진 능력도 있어야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게 안 됐다. 준비가 덜 되었던 거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민주화 모델에 염증을 느끼고 산업화 모델을 불러내서 MB가 등장했다. 그는 문제설정은 물론이고 이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었다. 자꾸 권위주의 국가시절로 돌아가려는 움직임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이번 대통령에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친 이 나라의 향후 국가 운영 패러다임을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다. 불행히도 대선전에선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못 내놨다. 심지어는 내놔야 한다는 문제의식조차 없었다. 문재인 후보나 안철수 후보의 경우 준비기간이 일 년 안팎에 불과했다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오년 이상 준비한 박근혜는 도대체 뭘 준비한 건가? 논란이 될 수 있는 거라고 던졌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개인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취임사를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 이 나라를 어떤 가치, 철학, 원리로 운영해서 어떤 나라로 만들지에 대한 얘기를 취임사에선 내놓지 않겠나, 배신하지 않는 기대는 없다지만 일단 기대해보려 한다.

: 작년에 출간된 <대통령의 자격>을 읽으면서 훌륭하지만 사람들이 고위 관료 출신에게 기대했던 책은 아니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대통령이나 청와대에 관련된 에피소드 같은 걸 기대했을 것 아닌가. (웃음) 여기서 각 대통령의 성격에 대한 평가, 혹은 민주화 이전과 이후의 대통령들의 차이 같은 것들을 말씀해 주실 수 있을지.

: 권위주의 시대의 일과 민주화 이후 시대의 일을 표면적으로 비교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그래고 개인적 캐릭터 차이는 많다. 성격이 다르니까. 리더십의 성격도 개인의 품성에 따라 달라진다. 전두환 대통령의 경우 5공시절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동료들과 그런 얘기를 했었다. “자신이 국가 통치를 맡은 기간의 시대적 의미를 잘 모른다”고 말이다. 그는 청와대 안에서 박정희 흉내를 내고 싶어 했다. 10.26이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다. 김재규의 총탄은 유신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었고 한국 사회가 더 이상 권위주의 체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전두환 대통령은 오랫동안 권위주의 체제로 지낸 사회를 민주화로 이행하는 첫 걸음을 내딛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너무 급격하게 이동하면 진통이 생기니 천천히 천천히 그쪽으로 갔어야 했는데 거기로 가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없었다. 물론 권위주의로 잘한 게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물가안정 같은 것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 결과 7년 후 6월 항쟁이 왔고 버텨보다가 6.29로 항복선언을 했다.

▲ 청와대 세종실에 걸린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 ⓒ뉴스1

체험의 역사성과 원형적 체험, 그리고 박근혜

그 뒤 노태우 대통령이 등장했다. 그는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육사 출신이다. 육군사관학교는 젊은 나이의 사람들을 국가가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몰딩, 그러니까 찍어내는 곳이다. 거기서 민주주의 교육을 받는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지휘관으로 살아왔으니 체질적으로는 권위주의 문화가 몸에 벤 사람이다. 게다가 그의 정권은 6.29 이후 직선제 선거로 탄생한 과도기 정부였다. 근데 그의 성격이 전두환과는 판이했다. 수동적이고 섬세하달까, 감성적인 면도 있었다. 당시에 정말 힘들었다. 통제받던 사회가 느슨해지니 눌렸던 만큼 튕겨오르는 그런 상황이었다. 각 사회 분야별로 민주화의 에너지가 대분출했다. 언론사마다 노조가 생기고 KBS도 MBC도 파업하고 공장마다 극렬한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 정부 있었기 때문에 안다.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내가 정국을 관리해야 하는 비서관이었는데 매일 사건이 터졌다. 당시 사무실이 2층이었는데 그 계단을 매번 뛰어다녔다. 한 번도 걸어서 올라가본 적이 없다. 어떻게 그 시절을 보냈는지 모른다.

노태우 역시 본인이 과도정부라는 문제의식은 없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다행인 것은 그가 그 큰 흐름을 그저 수동적으로 끌어안아 버렸다는 거다. 그 때 관료들은 불만이 많았다. 이게 무슨 하루살이 정권인가. 계획이 있고 대책을 세워서 국가를 운영해야 하는데 상황이 벌어지는 대로 가는 게 말이 되나. 그런 생각에 대들기도 많이 했고 상관에게 혼도 많이 났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물결을 거스르지 않고 안아 버린 것이 잘 한일이 되었다.

공보수석으로 모셨던 김영삼 대통령은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도 그렇지만 민주화에 평생을 바친 의회주의자였다. 그것을 긍지로 생각하는 사람인데도 대통령 되니까 완전히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김영삼은 그렇다 치고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도 그러는 걸 보고 솔직히 말하면 믿어지지 않아 왜 그럴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금방 답이 나왔던 게 어떤 사람이든 그가 겪은 체험으로 구성된다. 체험의 역사성이라고 부른다.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YS나 DJ도 태어나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시기의 교육내용을 보면 민주주의가 없다. 민주정치 시작해서도 야당의 투사가 되었고 민주화운동 할 때에도 권위주의 정권의 회유와 탄압에 맞서 싸워야 했다. 상대편과 같은 방식으로 당을 만들고 조직을 틀어쥐고 통제했다. 그러지 못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민주화투사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민주주의적 가치화가 내면화 될 수 없었다. 역설적이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가 살아온 과거 체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같은 의미로 박근혜 당선인에게도 원형적인 체험이 있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청와대에서 자라났다. 그걸 인간이 벗어나기 어렵다.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거기에 머물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사물과 사회를 그렇게 보는 게 본인으로서는 자연스럽고 익숙한데 제3자가 보기에는 시대에 안 맞는거다. 전여옥 전 의원의 단평이 그런 점에서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가산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다. 자신의 권력과 정치적 지분을 물려받은 유산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 강연회 기획안을 들여다보니 본인의 삶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 처음엔 뭐하러 내 얘기하라고 하나 싶었다. 근데 준비하면서 내가 살아온 역사를 들여다보니 시대적 특성이 있었다. 개인사를 돌아본다는 것은 살아온 시대를 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태평양전쟁 발발 2년 전에 태어났다. 제국주의 시대가 끝날 무렵이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대결하던 시절이다. 소위 냉전 체제에서 수십 년 살았다. 그 사이에 우리는 6.25를 겪었고 민주와 반민주의 대결을 겪었다. 해방 후 한국 현대사라는 게 격동이 아닌 날이 하루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옛날 어딘가에 편안한 시절이 있었던 것 같지만 아니다. 6공 때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일하며 매일 나라가 요절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 왔다. 시민적 역량이 뛰어나서라고 생각한다. 국민 개개인의 역량이 모아지면 총체적인 역량 되는데 이 지점에서 한국인들은 매우 뛰어나다. 세계에서 이만한 국민이 드물다고 본다. 그러니 30년 동안 엄청난 일을 해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성과를 만들어낸 게 아닌가. 국민역량은 매우 좋다. 그런데 이 역량을 지도자가 잘 쓰면 짧은 시기에 나라를 바꿔낼 수 있는데 등장하는 지도자마다 능력이 부족하니 나라가 늘 시끄럽다. 한탄스러운 게 언제나 우리는 국민의 총체적 역량을 잘 활용하고 관리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식견을 가진 리더십을 맞느냐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을 보면 미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이나 미국 건국시기 ‘건국의 아버지’들 같은, 중국 마오쩌둥 시절과 일본 메이지유신 시절의 정치인들 같은 대단한 인물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조선조 중기 이후로는 한 번도 없다. 우리도 인물이 나올 떄가 되지 않았나 하는데 너무 안 나온다.

: 세종 때 너무 많이 끌어다 쓴 거 같다. (웃음) 마지막으로,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청년세대들이 많은 실망을 했다. 개인적으로 이들이 다시 탈정치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민주당이 이들을 붙들어 맬 수 있다고 보시는지, 만일 없다면 해주실 말씀은 없으신지.

: 민주당이 지금처럼 해서는 못 붙들어 맨다. 붙들어 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하고 싶은 말은, 정치를 외면하고 혐오하고 멀어질수록 정치는 당신을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힐 거라는 거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말하고 참여하고 행동하는 게 합리적인 거라는 거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바꿀 건 바꿔야 한다. 근데 그러려면 뭘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한국 사회의 모순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식견이 있어야 한다. 공부도 좀 하고 공부한 사람들에게 물어서 이야기도 들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모순이 뭐며 구조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를 파악하고 그런 지식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세상에 바뀐다.

▲ 지난 대선 광화문 유세에서 시민들과 함께 하는 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모습 ⓒ뉴스1

청춘,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

민주주의가 나와 무슨 관계냐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길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민주주의라는 건 인간이란 게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권력의 속성은 무조건 ‘집중’과 ‘연장’을 원한다. 자꾸 자신에게 집중하고 기간을 연장하려 하면 권력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완벽한 인간이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둬도 된다. 완벽한 인간이라면 자꾸 ‘집중’하고 ‘연장’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근데 인간은 능력도 불완전하고 권력욕도 통제를 못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만들어진 게 민주주의다. 집중을 방해하고 연장을 금지하는게 민주주의다.

삼권분립이나 정권 교체가 결국 그 얘기다. 경제문제도 비슷하다. 요즘 재벌을 해체하냐 마느냐 하는 말 많은데 경제적 관점에서만 경제 민주화를 보면 출자총액제한제나 금산분리 정책 등에 대한 실효를 일반 국민 입장에서 판단하기 어렵다. 그럴 땐 역시 집중과 연장을 생각하시면 된다. 재벌이 막강하니까 정치권력까지 제압하고 국가권력을 압도한다.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월스트리트가 1:99 사회를 만든다고 비판하는 것도 그 얘기다. 자본권력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연장되는 걸 방치해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국가도 민주주의를 못한다. 민주주의 원리를 벗어나는 나라가 된다.

민주주의나 경제민주화가 공공의 영역이다. 그래서 나와 관계없는 일처럼 느껴지기 쉽다. 피상적으로 볼 때는 공공성이 일상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결국엔 그것이 우리 삶을 좌우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공공성은 곧 개별성이라고 학자들이 말한다. 그걸 알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바꾸려 노력할 수 있다. ‘멘붕’에 빠져 있다고 해결해줄 사람이 생기는 건 아니다. 결국은 본인이 공부하고 행동해야 한다.

젊은 사람이면 기성세대가 이런 소리를 하는 걸 싫어할 거라는 걸 알지만, 결국 젊음이 사회변화의 동력이다. 역사적으로 그랬다. 무조건 박근혜에 대해 반대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 대해 책임 있는 시민으로 정치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참여의 전제는 책임성이다. SNS 통해 사실이 아닌 이상한 글 쓰는 정도로는 책임 있는 참여가 안 된다. 책임 있는 참여 없이는 세상이 안 바뀐다. 그게 세상의 이치고 안 바뀌면 삶은 항상 어렵다.

시민으로서 국가를 감시하고 견제해야 한다. 내가 준 권력으로 국가가 무슨 엉뚱한 일을 하지 않는지를 살피는 것, 그것이 참여다. 나는 논산훈련소에서 조교들이 날 너무 심하게 때려서, 도대체 쟤들이 무슨 권리로 날 이렇게 하지, 란 고민을 하다가 ‘국가’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운 좋게 국가기관 안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런 사람의 관점에서 하는 얘기다.

: 좋은 말씀에 감사드린다.

▲ '레드북스'에서 얘기하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사진은 윤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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