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경제민주화’를 집권초기 주요 정책과제로 설정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노컷뉴스는 19일 인수위가 국정비전을 ‘희망의 새시대’로 선정하고 이에 부합하는 14개 국정과제를 선정했다며 여기에 경제1분과가 성안한 경제민주화 추진 로드맵이 포함되었다고 단독 보도했다.

이 로드맵에는 박근혜 당선인의 주요 공약이었던 대기업 총수일가의 특혜성 내부거래 규제, 신규순환출자 금지, 징벌적 손해배상제, 공정거래법 위반에 대한 집단소송제 등이 포함된 것으로 보도됐다.

이러한 구상은 현오석 KDI원장을 경제부총리로 지명한 이후 경제민주화 정책은 후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 데 대한 박근혜 당선인의 반응이라고 한다.

▲ 당선 직후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는 박근혜 당선인 ⓒ뉴스1

현오석-조원동 체제로 경제민주화를?

문제는 인수위가 이러한 구상을 밝힌다고 해서 그것이 잘 실행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후보자는 평소 ‘경제민주화도 중요하지만 반기업정서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그는 평생을 정통 경제관료로 살아왔으므로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현오석 후보자는 14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경제기획원에서 일해왔다.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이 통합해 재정경제원이 되고 재정경제원이 다시 재정경제부로 바뀌는 동안 예산심의관과 경제정책국장 등의 요직을 거쳤다. 1999년 9월에야 그는 국고국장으로 사실상 좌천되고 11월에는 주요 부서를 떠나 국민경제자문회의 기획조정실장, 세무대 학장 등을 거치며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내정된 조원동 조세연구원장 역시 현오석 경제부총리 후보자와 비슷한 경로를 밟아왔다. 조원동 내정자는 23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경제기획원을 거쳐 재정경제부 경제정책국에서 일했다. 현오석 후보자와 경력이 겹치는 부분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이후다. 현오석 후보자가 사실상 밀려난 이후에도 조원석 내정자는 경제정책국에서 계속 역할을 맡아 2005년에는 경제정책국장이 됐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상관이었던 현오석 후보자가 하던 일을 이어받은 셈이다.

경제정책국은 거시경제의 큰 그림을 그리는 기획 업무를 주로 담당하는 부서이므로 현오석 후보자와 조원동 내정자는 사실상 지금까지 이어져온 한국 경제의 틀을 만들어 온 경제관료들과 차별점을 갖지 않는 경력을 쌓아온 것이다. 경제민주화는 지금까지의 틀과는 다른 기획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들이 주도하는 경제민주화를 쉽게 상상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재정 확대정책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새 정부의 큰 그림이 ‘재정정책’에 맞추어질 가능성이 큰 것도 경제민주화의 실질적 실현 여부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요소다. 미국, 일본, 유로존이 모두 재정확대정책을 펴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저성장기조에 빠지게 되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은 일반적 시각이다. 따라서 재정확대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고 산업구조를 고도화해 서비스산업 육성 위주의 구조개혁을 시도하여 성장 동력을 확충하는 것이 경제관료들이 늘 얘기하는 해법이다. 여기에 각종 재벌규제책들을 더해 중소기업 성장의 기회를 만들고 우수한 중소기업들이 규모화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새 정부에서 중용될 경제관료들의 기본적인 구상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문제는 재정확장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재벌규제책을 제도화하는 것만으로는 경제민주화의 효과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민주화는 공정한 시장질서를 확립하고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며 정당한 보상을 통해 성장이 결실을 골고루 나누기 위한 것이라고 박근혜 당선인 측은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성장잠재력을 키우고 지속가능한 발전과 일자리 창출을 하겠다는 게 당선인과 인수위 측 구상이다.

▲ 경제수석으로 내정된 조원동 조세연구원장과 경제부총리로 지명된 현오석 KDI원장. ⓒ뉴스1

그러나 재정확대 국면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유발되며 지출을 확대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재정건전성의 확충이 요구된다. 이렇게 되면 사회안전망 구축이나 복지제도 시행과 같은 과제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될 수 있다. 사회안전망 구축이나 복지제도 시행 등이 병행되지 않는 재벌규제는 재벌과 중소기업 모두에게 어정쩡한 결과를 남기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최악의 경우 논란을 뚫고 가까스로 도입한 재벌규제책들도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남게 돼 다시 후퇴하게 되는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

그들이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면?

물론 현오석 후보자와 조원동 내정자가 과거 가졌던 철학과는 상관없이 박근혜 당선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 현오석 후보자의 경우 매 시기마다 정부의 입맛에 맞는 행보를 보여 왔다는 점이 계속 지적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조원동 내정자의 경우도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정부 중책을 맡아와 ‘충성파’로 보일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세간에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라는 표현이 있으니 이들의 이런 행보도 무작정 비판할 것은 아니다. 공무원은 정부 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도구이므로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이들이 정부의 정책을 충실하게 집행하려고 한 게 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정책을 총괄하고 기획해야 할 책임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면 얘기가 다르다. 위에서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실제로 정부 정책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완전히 다른 수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관료들이 ‘시행해봤는데 효과가 없습니다’라고 상급자에게 보고하는 것은 괜찮지만 경제부총리가 앞장서서 시행한 정책이 효과가 없다면 그건 옷을 벗어야 하는 문제가 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경제부총리와 경제수석이 ‘그저 열심히 충성하는 것’은 결국 ‘무책임’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현오석 후보자와 조원동 내정자는 이런 우려를 불식시킬 만큼의 책임성을 갖고 경제민주화의 효과가 충분히 나타날 수 있는 경제정책을 집행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