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당선인과 인수위가 또 말 바꾸기 논란에 휘말렸다. 박근혜 당선인의 공약인 ‘4대중증질환 진료비 전액 국가부담’ 공약을 수정한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자 6일 인수위가 보도자료를 통해 ‘공약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국가가 부담하는 진료비의 항목에 ‘선택진료비‧상급병실료‧간병비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애초에 3대 비급여 항목인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 간병비를 국가가 부담하겠다는 약속은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 박근혜 당선인이 후보 시절 내놓은 공약집 중 해당 공약이 실린 면. '비급여 진료비'에 대한 대책이 명확하게 적혀있다

그러나 박근혜 당시 후보의 공약집에는 ‘4대 중증질환(암, 심장, 뇌혈관, 희귀난치성질환)에 대해 총 진료비(건강 보험이 적용되는 진료비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비를 모두 포함)를 건강보험으로 급여 추진’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인수위의 주장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비’라는 표현에 ‘3대 비급여 항목’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자가 고급진료를 받기 위해 선택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항목이라는 이유에서다.

환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문제는 이러한 항목들이 선택의 문제라기보다는 필수의 문제에 가깝다는 것이다. 건강보험 비급여항목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항목 중 하나인 선택진료비의 경우 사실상 치료 과정에서 관행적으로 부과되는 항목이기 때문에 환자에게 선택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이 있다. 이러한 부조리는 2009년 신종플루 유행 당시 진보신당 등의 진보단체가 신종플루 진단에 특진비(선택진료비)가 마구잡이로 부과되고 있다며 이의 폐지와 환급을 요구하기도 한 데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상급병실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8대 대선 후보 TV토론 당시 박근혜 당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이 공약을 두고 설전을 벌인 것을 본 많은 네티즌들이 ‘박근혜 후보는 병원에 입원을 안 해본 것 같다’는 감상을 밝힌 데서도 상급병실료 문제를 대다수 국민들이 부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중증질환으로 입원을 하는 경우 병원 측의 사정에 의해 6인실이 아닌 상급병실에 입원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기 때문이다.

건강세상네트워크, 경실련,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이 포함된 건강보험가입자포럼도 이러한 상황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건강보험가입자포럼은 성명을 통해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 간병비 빼고 뭘 보장하겠다는 것인가?’ 라며 ‘3대비급여는 의료이용에 있어 선택이 아닌 필수항목이라는 점을 제대로 인지해야 하며 4대 중증질환 보장성 논의에 있어 제외할 수 없는 항목’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사실상 3대 비급여 항목에 대한 보장성 확대가 전제되지 않으면 박근혜 당선인의 공약은 유명무실해진다는 것이다.

사기꾼 되기를 재촉하는 조선일보

이런 상황에서도 일부 보수언론은 인수위 측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대안을 만들어 주기에 바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선일보는 7일 보도를 통해 ‘의료 전문가들은 무리하게 공약을 추진하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수용가능한 정책으로 전환해 점진적으로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며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에 앞서 급증하고 있는 비급여 진료비를 통제하는 것이 먼저’라며 나름의 훈수를 뒀다.

▲ 박근혜 당선인과 인수위 측에 훈수를 두는 듯한 조선일보의 7일자 보도.

또한 ‘4대 중증 질환 健保 혜택 대충 설계해선 안 돼’라는 제하의 사설을 통하여는 ‘선택진료비(특진비)와 간병비가 공짜가 되면 누구나 특진 의사를 지명하고 간병인을 쓰겠다고 나설 게 뻔하다’라며 ‘국가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약속은 국민 전체의 최대 복지’라면서 ‘어느 정당 어느 후보의 공약 준수 여부는 그다음 차례일 뿐’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즉, 과도한 복지 공약의 이행 여부보다 전체 국가의 재정건전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고전적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포퓰리즘’ 프레임이다. 선거 때야 포퓰리즘적인 공약을 남발해서 당선될 수 있지만 이러한 공약을 다 지키는 것은 그야말로 포퓰리즘이므로 안 된다는 얘기다.

▲ 국민 전체의 최대 복지를 위해 공약을 안 지켜도 된다는 7일자 조선일보 사설

예를 들어 누군가 자기가 밥을 사겠다며 최고급 스테이크를 먹자고 한 다음 밥을 다 먹고 나서 애초에 더치페이로 하기로 한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 자를 사기꾼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하물며 국가정책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일부 보수언론들의 반복되는 이러한 훈수두기가 박근혜 당선인이 사실상 사기꾼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증세 없는 복지’ 구상이 문제

인수위나 박근혜 당선인이 계속 이러한 후퇴(?)를 감행하고 있는 것은 ‘증세 없는 복지’를 감행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경향신문은 7일자 ‘흔들리는 박근혜 공약, 증세 없는 복지가 문제다‘ 제하의 사설을 통해 앙헬 구리아 OECD 사무총장의 부가가치세율을 올려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인용하며 사실상 증세를 통한 복지 제도 확충을 기본 방향으로 해야 할 것을 주문했다.

▲ 증세없는 복지가 문제라는 7일 경향신문 사설.

이데일리의 6일 보도에 의하면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오건호 연구실장도 ‘재원이 부족하면 공약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증세 논의를 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이권능 연구위원 역시 ‘증세나 건보료 인상 없이는 4대 중증질환 100% 보장 공약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물론 증세에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이 상식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본격적인 증세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제1야당인 민주통합당의 주요 정치인들 역시 과거 ‘증세없는 복지’를 주장한 전례가 있다는 점은 이러한 주장들이 고려해야 할 주요한 장애물이다. 야권의 주요 정치인들이 입을 모아 외쳤던 ‘4대강만 안 해도 복지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식의 구호들은 결국 제1야당마저도 증세에 대해서는 합의될 수 있는 입장을 내놓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냉소와 불신만이 더 쌓이게 생겼다. 우리는 이것이 기성 정치권 전반에 큰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안철수 현상’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여‧야가 잘 협의해 증세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해달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전향적 자세가 요구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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