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저소득층은 진보정당을 지지하지 않을까?’ 많은 진보정당 지지자들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오늘날의 진보정치는 ‘서민은 서민정당을 지지하자’라는 슬로건으로 요약되는 일종의 ‘계급투표’를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현된 예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은 의문들이 던져지는 것이다. 오랫동안 이러한 의문은 구체적이고 심층적인 연구 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여론조사 결과나 통계 등을 통해 추론한 결과를 근거로 하고 있었다.

23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강원택 교수가 내놓은 ‘사회계층과 투표 선택’ 연구는 이러한 추론에 또 하나의 근거로 작용하게 됐다. 이 연구에 따르면 통계청이 밝힌 우리나라 2012년 3분기 평균 가계소득(414만 2천원)을 기준으로 하(199만원 이하), 중하(200~399만원), 중(400~499만원), 중상(500~699만원), 상(700만원 이상) 등 5개로 소득계층을 구분할 경우 가장 소득이 높은 상위계층은 18대 대선에서 자신들의 계급적 처지에 충실한 투표를 했다. 상위계층의 57.4%가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한 것이다. 이것은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한 경우보다 약 15% 높은 것이다. 이들은 또한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등 진보세력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계급적 처지를 고려하면 당연한 결론이다.

하지만 하위 집단에서의 상황은 다르다. 박근혜 후보가 65.7%의 지지를, 문재인 후보는 31.4%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수치를 검토하면 저소득층의 정치적 지향이 보수층에 쏠려있다는 결론을 내기에 충분한 것이다. 즉, 서민을 대변하겠다는 이념적 지향을 갖고 있는 정치세력을 저소득층이 지지하지 않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민주노총 대변인을 지내며 '노동계의 입'으로 불리기도 했던 '부동산 계급사회'의 저자 손낙구 보좌관. ⓒ권우성(오마이뉴스)
그간 진보진영에서는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이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노력해왔다. 진보진영의 대표적인 브레인으로 꼽히는 손낙구 보좌관(최원식 의원실)의 경우 ‘부동산 계급사회’ 등의 저서를 통해 부동산의 소유 등을 기준으로 계급배반투표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 여부를 다시 판단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저소득층이 보수적 지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 중 진보진영에 표를 던질만한 사람들이 투표를 포기하는 것이 문제라는 주장이다.

계급배반투표에 대한 진보진영의 대응

그래서 일각에서는 저소득층이 실질적으로 투표를 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공직선거법 등을 개정할 필요성이 있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윤현식 진보신당 정책위원은 2012년 9월 경 한국정치학회의 ‘우리나라 비정규직 노동자 투표참여 실태조사에 관한 연구(2011)’를 인용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우 고용계약 등에 따른 노동조건 때문에, 다시 말해 먹고 살기 위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 비율이 무려 70%에 육박한다’며 투표시간 연장을 내용으로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켜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참고 : <투표율 상승에 공포감을 느끼는 사람들>, 진보신당 홈페이지)

또 다른 한편에서는 진보진영의 선거전략 자체를 문제 삼기도 한다. 진보정당에서 오랫동안 지역정치 활동을 한 활동가는 ‘선거 때 언론의 관심을 받는 의제들은 저소득층의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들이 많다’면서 ‘평소에는 서민을 위한 정책을 말하다가도 선거 때가 되면 관심을 많이 받는 의제들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특히 2012년 총선 등에서 ‘야권연대’, ‘정권심판’ 등의 의제들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그는 주장했다.

진보정당들이 특정 계층을 겨냥하기 보다는 전체 대중을 겨냥하고 던져온 메시지들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진보정당의 당원으로 활동하다 최근 잠시 활동을 중단하고 있다는 한 진보정의당원은 ‘계급투표보다는 오랫동안 진보정치가 보수정치보다 깨끗하고 유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에 더 공감해왔는데 더 이상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돼 실의에 빠져있다’고 고백했다. 소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부정 사건’ 등 때문에 진보정치가 깨끗하고 유능한 것이 아니라 더럽고 음모적이라는 인식이 퍼지게 됐다는 것이다.

보수정당에 비해 열악한 지역 조직이 문제라는 시각도 있다. 진보신당의 지역당원협의회 관계자는 ‘보수정치인들은 아파트자치회나 주민자치위원회, 하다못해 성당이나 교회 등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주민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을 자신의 핵심 지지자로 만들 수 있다’면서 ‘진보정치에게도 자신들이 주체가 될 수 있는 공간들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 구로 민중의 집 내부. 진보신당의 경우 각 지역조직에서 민중의 집 등의 '거점 사업'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참세상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민중의 집 운동’등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지난 해 8월 정경섭 마포 민중의 집 대표는 ‘민중의 집 : 술과 이웃 토론과 배움이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 등의 서유럽 국가에서 발달했던 민중의 집을 소개한 바 있다. 마포 민중의 집은 ‘동네 주민들과 만날 수 있는 지역 단체들의 사랑방’을 자처하며 방과후 교실, 자전거·독서 등 각종 소모임, 밥상모임 등을 통해 주민들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지역의 대형 마트 입점 투쟁 등에 결합하는 방식으로 주민 조직화를 도모하고 있다.

‘계기’가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새로운 시도들은 단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그 자체로 제각각의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저소득층이 진보정치를 지지하지 않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조건들로 충분한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당장 놓여있는 정치적 상황들이 문제다. 진보정치가 위기 속에서 활로를 찾았던 과정을 돌이켜보면 어떤 ‘계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2002년 지방선거에서 8%의 정당득표를 얻은 동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해 2004년 10여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것으로 황금기를 맞이했다.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진보신당 등의 진보정당들은 그 당시 확보했던 역량들을 소진하며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다. 그 당시 민주노동당의 성공이 있었기에 위에 서술한 문제의식들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계기가 없는 상황이다. 선거에서 패배한 민주통합당은 그 책임을 놓고 계파별로 대립하며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실추된 이미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고 있다. 진보정의당은 향후의 노선에 대한 내부의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으며 진보신당 역시 대선 대응 실패에 대한 책임론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진보정의당이 쌍용차 국정조사를 요구하며 국회 로비를 점거하고 진보신당이 지도부 선거에 돌입하는 등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움직임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나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는 역부족이고 앞으로의 전망을 예상해보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 쌍용자동차 국정조사를 촉구 농성을 벌이고 있는 진보정의당 의원들이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긴급 의원총회를 가졌다. 심상정 의원이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즉, ‘공중전’의 영역에서는 장기간의 시련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계급투표가 실행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대응들이 단기간에 효과를 거두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예상할 수밖에 없다. 지역에서 거점을 만들거나 투표시간을 연장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더라도 '투표할 대안'이 존재하지 않으면 계급투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오히려 ‘지상전에서 오래 버티는 것’이 답일 수도 있다. 그야말로 지구전인 셈이다. 지구전에서의 승자가 언젠가 벌어질 공중전에서의 승부에서도 승자가 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여전히 어려운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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