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의 발가락 보게. 꼭 내 발가락 아닌가. 닮았거든……."

아웅산 수치와 박근혜 당선인이 "닮은꼴"이라는 기사(중앙일보·1월21일자 <닮은꼴 두 지도자 박근혜·수치 29일 처음 만난다>)를 보고 기자는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가 떠올랐다.

「발가락이 닮았다」의 주인공 M은 생식기능이 없는 불구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한 M은 얼토당토않게 부인이 임신을 하게 되자, 본인의 생식능력을 검사하기 위해 화자이자 의사인 '나'를 몇 번 찾아 왔다가 그대로 돌아간다. 훗날 갓 태어난 아이가 몸이 아파 '나'를 찾아 온 M은 태생적으로 닮을 수 없는 아이(M의 아이가 아니기 때문)를 두고, 자신의 '가운뎃발가락'처럼 발가락이 길어 닮은 구석이 있다고 강변한다. 소설 속의 M은 합리적 상황에서 따로 떨어진 한 인간의 '자기합리화'를 씁쓸하게 보여준다.

▲ 중앙일보 21일자 보도 <닮은꼴 두 지도자 박근혜·수치 29일 처음 만난다>. 보수 언론의 흔한 인물 비평은 복잡다단한 정치적 평가를 '단순화'하는 우를 범한다.

중앙일보 기사를 보며 보수 언론의 '자기합리화'를 떠올린 건 비단 나뿐일까? 중앙일보는 기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 당선인과 미얀마(옛 버마)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아웅산 장군의 딸 수치 의원은 여러 면에서 대비된다"고 운을 뗐다. 박근혜 당선인과 아웅산 수치가 "닮은꼴"이라고 제목을 뽑았지만, 그들조차도 두 인물의 삶이 크게 대비될 수밖에 없다는 걸 기본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중알일보가 "닮은꼴"이라며 내세운 근거는 "불행한 가족사", "칩거", "공(公)을 사(私)보다 우선하는 모습"이다. 중앙일보의 김경진 기자는 "대표적인 아시아의 여성 지도자인 두 사람은 '불행한 가족사'를 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총탄에 목숨을 잃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죽음을 군사정권에 의해서 암살당한 아웅산 장군을 비교했다.

그의 말처럼 두 인물은 '불행한 가족사'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언론으로서 보다 비중있게 다뤄야 할 것은 불행한 가족사를 가지게 된 '역사적 맥락'일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아웅산 장군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경위 말이다. 중앙일보의 말을 빌리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18년간 집권한 군인 출신 대통령"으로 심복들의 권력 암투의 결과로 목숨을 잃었다. 아웅산 장군은 "47년 군사 정권에 의해 암살"당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아웅산 장군의 죽음은 '타살'이라는 것만 같을 뿐, 역사적 배경이 판이하다. 중앙일보는 뻔뻔하게 부모의 죽음에만 초점을 맞췄고, 그 결과 독재의 '주체'와 '객체'를 동일 선에서 비교하는 우를 범했다.

▲ 중앙일보 14일자 보도 <화사한 만다린 칼라 … 희망·위엄 강조한 '당선인 스타일'>. 가십거리는 주요하게 다루는 행태는 보수 언론의 습성이지만, 이 역시 언론으로서 저널리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하다.

또 중앙일보는 각 리더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는 "공(公)을 사(私)보다 우선하는 모습도 비슷하다"고 말했다. 중앙일보가 든 사례는 참으로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박 당선인이 박 전 대통령 죽음 뒤에 보였던 반응이라고 세간에 알려진 "전방은 괜찮습니까"라는 발언이 그들이 주장, 즉 "공(公)을 사(私)보다 우선하는 모습도 비슷하다"는 논거로 쓰인 것이다. 이를 보도한 김경진 기자는 14일자 중앙일보 보도 <화사한 만다린 칼라…희망·위엄 강조한 '당선인 스타일'>을 통해 박 당선인의 의복 스타일 변화를 심도있게(?) 다룬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박근혜 당선인이 '육영재단'을 놓고 형제들과 다툼을 해왔던 사례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역시 공을 사보다 중시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인가? "전방은 괜찮습니까"라는 발언보다 박 당선인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례는 '육영재단'을 매개로 형제끼리 소송과 싸움을 하며 다퉈왔던 그간의 일들이 아닐까? 또, 한 나라의 대통령이 사인(私人)의 재산을 강탈했던 과거를 무겁게 반성하기보다 책임 회피에 급급한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의문이다.

확인되지 않은 발언으로 한 인물의 리더십을 일반화하는 보수언론의 논리도 우습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정치·역사적 배경은 외면한 채, 한 인물의 특징만 도출하는 보수 언론의 경거망동한 태도이다. 중앙일보뿐 아니라 <주간조선>도 2239호에서 박근혜 당선인과 '엘리자베스 1세'를 비교했다.

▲ <주간조선>은 역시 박 당선인과 엘리자베스 여왕을 동일 선에서 비교하는 등 역사적 맥락이 배제된 인물 비평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이렇게 반복되는 1차원적 인물 비교는 수많은 계층들이 고민해야 할 복잡다단한 정치적 사안을 '1인 리더십'으로 단순화하는 기능을 한다. 과거 이명박 대통령이 '녹색 뉴딜'을 내세우며 루즈벨트와 비교했던 걸 생각해보면 이런 태도는 쉬이 넘길 수 없는, 비판의 지점이다. 현재 녹색 뉴딜의 핵심이었던 '4대강 사업'은 언론의 뒤늦은 '물어뜯기'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지 않았는가?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 언론들은 박근혜 당선인과 아웅산 수치의 '발가락이 닮았다'고 말하기 전에 박 당선인의 향후 5년의 행보가 수치가 추구해온 길, 즉 '민주주의'에 부합해야 함을 끊임없이 제기해야 한다. 보수 언론이 '박근혜 시대'가 성공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있다면 박 당선인이 권력의 정점에서 군림하는 리더가 아닌 보다 더 많은 약자의 복지에 손을 내미는 지도자가 될 수 있게 자극해야 할 것이다.

보수언론의 달콤한 '마사지'에 취해 박 당선인이 리더로서의 의무를 방기한다면 우리는 「발가락이 닮았다」속 '나'가 말했던 것처럼 "발가락 뿐 아니라 얼굴도 닮았네 그려"라며 박 당선인과 보수언론을 씁쓸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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