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 6월5일자 13면 사진기사

오늘(5일) 아침 신문을 넘기다가 '일시정지'되어 한참이나 들여다 본 사진기사. 지난 4일 국회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기륭전자 비정규직 해고자인데, 낯익은 얼굴이다. 기륭전자는 1000일, KTX는 800일, 이랜드-뉴코아는 300일을 훌쩍 넘겨 복직투쟁을 하고 있다. 이들은 비정규직 문제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8월15일자로 이 대통령을 해고하는 ‘해고장’ 보내기 운동을 펼치겠다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날 국회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의 토론회 ''이명박 대통령 취임 100일, 민생고를 듣는다'에서는 노동계, 농업계, 자영업계, 교육계 등 각계 증언자들이 나와 "총체적 위기"를 토로했다. 김소연 기륭전자분회장은 "우리는 버려진 국민"이라고 절규했다.

고공 시위장과 빨간 장미꽃

문득 지난 주 비오는 수요일 오후 찾아간 기륭전자의 고공시위장이 떠올랐다. 세어보니 오늘로 벌써 열흘째, 구로역 30미터 철탑 위에 올라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농성중이다. 생각난김에 그날 찍어온 사진을 다시 열어 보다가 빨간 장미꽃에 눈길이 갔다.

"힘내시라구요. '비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그녀에게 주고 싶다~'는 노래, 그게 떠올랐어요" 1000일 넘게 투쟁중인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에게 건네진 빨간 장미. 농성장에 취재 온 기자들이 꽃을 한아름 건넨 이유를 묻자 그녀는 그렇게 답했다.

▲ 지난 5월28일 지하철 1호선 구로역앞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 복직과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철탑 고공시위 농성장. 오늘(5일)로 벌써 열흘째 농성중이다. ⓒ 정영은

명동 향린교회의 여성인권 모임에서 응원차 준비해온 꽃다발을 보자 김수연 지회장은 환하게 활짝 웃어보였다. 두빰이 발갛게 물든 김수연 지회장은 어서 위에 올라간 여성 조합원에서 건네야겠다고 서둘렀다. 장미꽃을 줄에 꽁꽁 묶으면서도 얼굴에 웃음은 여전히 한가득이다. 생소한 풍경에 현장에 있던 취재진들도 허둥지둥 따라갔다.

빨간 장미꽃 한다발은 줄에 묶여 아슬아슬하게 대롱거리면서 30m 위로 올라갔고 땅 아래 사람들의 염원을 담아 장미꽃다발은 무사히 철탑 위로 도착했다. 조합원 윤씨는 이내 꽃다발을 손에 들고 탑 아래로 한참이나 힘차게 흔들어보인다.

최대한 확대하여 줌-인(Zoom-in)한 카메라 렌즈에 그녀의 활짝 웃는 얼굴이 담겼다. 길고긴 끝없는 싸움에서 눈물흘리는 모습으로 익숙한 여성 노동자의 얼굴들. 보기 드문 소중하고 감동적인 미소다. 땅 아래 그녀들도 환한 꽃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손을 흔든다. 땅 아래 사람들도 흐뭇한 미소로 쳐다본다. 그 귀한 표정을 카메라로 담으면서 순간 울컥 눈물이 치솟았던 기억이 다시 생각난다.

▲ 철탑 위 조합원이 꽃다발을 흔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김소연 기륭전자 지부장 ⓒ 정영은
어느덧 소위 '장투(장기투쟁사업장)'는 '손배가압류', '비정규직'과 함께 삼박자를 이루면서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기륭전자는 1000일, KTX는 800일, 이랜드는 300일을 훌쩍 넘겼다. 지난해 이랜드사태로 불거진 "정부의 비정규직법은 '비정규직 양산법'"이라는 비판여론도 어느새 잠잠하다. 새정부는 들어서자마자 아예 대놓고 '비즈니스 프렌들리'다.

이런 상황이니 일단 파업에 들어가면 사업자들은 장기적으로 끌고 가는 수순이 '관행'처럼 대세로 계속될 수 밖에. 그러면 노동조합은 꼼짝않는 사측에 맞서 갖가지 시위를 벌이고, 사측은 공권력을 이용해가면서 손해배상을 들먹이며 월급과 재산 등에 가압류를 통보하면 된다. 대체인력이야 용역, 파견 업체를 통해 널려있기 때문이다.

이제 국민 다수의 고용형태인 비정규직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 한국땅 기륭전자의 1000일 투쟁과 장미꽃 한 다발을 보면서 100년전 미국땅 뉴욕에서 "빵과 장미를 달라"던 여성노동자들의 외침을 떠올려보았다.'세계 여성의 날' 제정은 어느덧 100주년을 맞이하고 있는데 과연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이 여전한 것일까.

"구로역앞 꽃집에서 꽃 고르면서 농성중인 기륭전자 노동자분들께 드린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꽃집 사장님이 열송이 값만 받고 스무송이를 주셨어요"라며 덧붙여 설명해주는 장미꽃 응원팀들은 곧 촛불집회에 참석하러 광화문으로 향한다고 했다.

시민들 "정부가 뭔가 잘못했으니 시위하겠지"

기륭전자의 구로역 철탑 고공시위 현장을 취재가면서 한편 그런 마음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 '미친소 정국에서 다른 중요 이슈들은 묻히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그런데 막상 만난 기륭전자의 그녀들은 '광우병 소 집회 덕분'이라는 말부터 꺼냈다.

이제는 파업이나 집회, 시위에 대해 색안경끼고 욕부터 하는 시민들이 훨씬 줄었다는 것이다. 농성장 한 켠에서는 "정부가 뭔가 잘못했으니 시위도 하고 농성도 한다"며 오가는 시민들이 응원의 말을 한마디씩 건네준다는 말이 나왔다. '집회=시민불편'이라는 공식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거리 행진ⓒ민임동기

어찌되었든 분명한 것은 "변하길 원한다면 변치 않아야 한다"는 만화 <헬로우 블랙잭>의 한 구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목소리가 큰 울림이 된다"는 말과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와 일부 언론이 부풀려놓은 '괴담 총공세'와 '폭력시위 대응론'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는 어느덧 한달여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에서 '이명박 탄핵'으로 이어지는 함성들과 함께.

"정부도 언론도 믿지 맙시다! 우리 끝까지 흔들리지 맙시다" 어느 새벽, 촛불 행렬 속에서 한 시민이 외치던 그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참고: '헬로우 블랙잭'은 일본 만화가 사토 슈호의 작품으로, 한 인턴의 시각을 통해 일본 의료계의 현실과 병폐를 고발하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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