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31일자 칼럼에서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가 <모두에게 공정한 무역>을 통해 선언적 의미에 머물러 있는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이 아닌 모두에게 공정한 무역(FTA: Fair Trade for All)으로 나아가기 위한 선진국들의 분발과 각성을 촉구했다는 대목에 독자들이 이런 댓글을 달아 주셨다.

“선진국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스스로 버릴 수 있을까. 이미 국제-사회경제적으로 시스템화한 그 기득권을 말이다.” “포기 못하겠지. 분신자살을 한들, 철저한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저들에게 양심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이라크 봐라. 어떤 식으로 개입하고, 또 어떤 식으로 처참하게 만드는 지를. 공정한 무역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한 개념이다.”

▲ 장하준 교수.
안타깝지만 맞는 얘기다. 선진국들의 자발적인 분발과 각성을 촉구하자는 것은 얼마나 순진한 발상인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교수인 이 책의 저자 장하준 교수는 서두에서 선진국의 경제 발전 역사에 관한 자체 연구 성과의 박약함을 힘주어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선진국들이 오늘날의 경제적 발전을 구가하기까지 자신들이 밟아온 역사적 단계들을 그만큼 애써 숨기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자연스런 의문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묻는다. 선진국들은 실제로 어떻게 부유하게 되었는가? 장하준은 유치산업(infant industry) 보호론의 시조로 알려진 19세기 독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 1789~1846)가 150년 전에 쓴 저서 <정치경제의 국민적 체계 The National System of Political Economy>에 써놓은 말에서 기가 막힌 해답을 찾는다.

“보호 관세와 항해규제를 통해 다른 국가들이 감히 경쟁에 나설 수 없을 정도로 산업과 운송업을 발전시킨 국가의 입장에서는 정작 자신이 딛고 올라온 사다리(정책, 제도)는 치워 버리고 다른 국가들에게는 자유 무역의 장점을 강조하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걸어왔고 뒤늦게 자유 무역의 가치를 깨달았다고 참회하는 어조로 선언하는 것보다 더 현명한 일은 없을 것이다.”

제목의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가 갖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오른 사람이 그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면, 다른 이들은 그 뒤를 이어 정상에 오를 수가 없게 되는 이치. 선진국들의 교활한 이중적 태도는 장하준식 문답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개발도상국의 적극적 산업․무역․기술(ITT: industry, trade and technology) 정책 실행을 제약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합의는 영국을 비롯한 여타의 현 선진국들이 반(半) 독립 국가들에게 강요하였던 다양한 ‘불평등 조약’의 현대판에 불과할 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그렇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해 개발도상국들의 손이 닿지 않는 정상에 오른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들이 따라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 대답은 한결같이 “그렇다.”이다.

스티글리츠가 <모두에게 공정한 무역>에서 누누이 강조한 대로,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현 개발도상국들과 유사한 발전 단계에 있을 때 갖추지 않고 있던” 정책과 제도까지 강요함으로써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아버지 나라(선진국=미국)의 말씀을 거역하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거역하는 것이며, 국제적인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언젠가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사다리만 걷어차는 게 아니라 협박까지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 '사다리 걷어차기' 책표지.
미국은 지금도 자발적 수출 억제(voluntary export restrains)와 다자간 섬유 협정(Multi-Fibre Agreement)에 의한 섬유 및 의류에 대한 쿼터제, 농업 분야에 대한 보호와 지원금, 반덤핑 관세(antidumping tariffs)를 이용한 무역 제재 등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미국을 근대적 보호주의의 ‘모국(母國)’, ‘철옹성’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그래서 (선진국들이) 현재 경제 발전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개발도상국에게 ‘설교’) 하는 바람직한 통치제도(good governance)-민주주의, 청렴하면서도 효율적인 관료제와 사법권, 지적 재산권을 포함한 강력한 재산권 보호 규정, 바람직한 기업지배제도, 투명한 기업 구조와 선진화된 금융제도 등-의 대부분은 현 선진국들의 경제 발전의 원인이기보다는 결과물에 해당한다고 ‘예리하게’ 지적한다. 더 나아가 선진국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정책들이 실제로는 자신들이 개발도상국 시절에 채택한 정책들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며, 개발도상국들은 (선진국들의 설교와 달리) 바람직하지 않은 정책을 사용한 시기에 더 큰 경제성장을 이뤘다고 갈파한다. 이 ‘명백한 역설’을 함축한 선진국 경제 발전의 역사를 방대한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살핀 뒤, 저자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제도 발전을 이루는 데에는 수세대는 아니더라도 대체로 수십 년의 기간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 개발도상국들이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제도들을 즉각 또는 적어도 5~10년 이내에 수용해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에는 이에 상응하는 제재를 받게 될 것이라는 현 선진국들의 근래의 주장은 자신들이 걸어온 제도 발전의 역사에 상반되는 행위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민영화’에 대한 들뜬(?) 기대 속에 수도와 전기 같은 공공서비스를 민영화자는 논의까지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전력산업을 민영화한 미국에서 어떤 재앙이 일어났는지, 전 세계 선진국 가운데 유일하게 공공의료보험제도를 채택하고 있지 않은 미국에서 가난한 국민들이 제때 병원치료를 받지 못해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는지 똑똑히 보았다. 저자가 거듭 강조한 대로 “아직 완전히 선진국이 되지 않은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지금 선진국들이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를 내세우며 우리에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그들이 우리와 비슷한 단계에서는 어떤 정책과 제도를 썼는지를 잘 살펴보고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진국들의 경제 발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는 장하준의 지적은 십분 옳다. 굳이 비싼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그들의 경험에서 ‘제대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쉬의 저서 <밀라이 학살과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 준비 중이고, 현재 KBS 사회팀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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