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증오는 아직까지는 ‘상대방이 권력을 잡는 것까지도 용인한다’는 민주주의의 감수성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야권을 지지하는 개혁시민에게 새누리당 사람들이란 친일파의 후손으로 미국 국적을 통해 병역의무를 회피하는 일종의 ‘일본계 미국인’들로 이해된다. 새누리당 지지자들에게 민주통합당이나 기타 진보 세력은 북한 정권의 지령을 받아 남한의 공산화를 기도하는 ‘북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양측 모두 상대방을 함께 공화국을 만드는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전자의 판타지가 일종의 ‘경멸’을 수반한다면, 후자의 판타지는 한국 현대사의 끔찍한 기억과 결부되어 거의 상대방의 ‘절멸’을 기도하는 증오의 심성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기사 링크

이전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그런데 이 ‘경멸’과 ‘절멸을 기도하는 증오’는 동등한 차원에 있지 않다. 최근 대선 정국이 지리멸렬해지는 상황에서 NLL과 정수장학회만이 정쟁의 쟁점으로 떠오르는 이유를 보면 이 지점이 명확하게 보인다.

상대방을 ‘남한의 공산화를 기도하는 북한 사람’으로 여기는 심성은 이념논쟁의 외피를 두른다. 이른바 ‘종북 논쟁’의 형태가 된다. 그런데 이 논쟁이 돌아가는 방식을 살핀다면 이것은 이념논쟁이 아니다. 가령 “북한 체제를 지지하느냐?”란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간단하게 “아닌데요”라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종북 논쟁의 문제는, 자신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를 간단히 북한 체제의 부역자로 몰 수 있는 그 메커니즘이다.

▲ 임진각 근처에서 눈을 치우는 한국군 병사들의 모습. 분단의 현실은 정치논쟁을 왜곡한다. ⓒ연합뉴스

가령 우리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존경하지 않고도 김일성 부자를 충분히 증오할 수 있다. 그러나 새누리당 지지자들은 결코 그럴 수가 없다고 말한다. NLL선의 위상에 대한 토론 역시 김정은이나 북한 체제에 대한 사랑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도 새누리당 지지자들은 본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북한 체제에 부역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매양 이런 식의 우기기가 난무하다 보니 3대세습이나 핵개발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 같은 지극히 정상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경기동부연합 등은 ‘마녀사냥이다’라고 규정하게 되었다. 사실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의 차원에서 본다면 박정희 숭배자와 김일성 숭배자가 차라리 가깝고 자유민주주의자가 그 반대편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용인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자세가 북한 체제를 반대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반대자들을 모두 종북주의자로 만들 수 있는 ‘논변의 요술상자’에 가깝다.

반면 상대방을 ‘친일파의 후손으로 미국 국적을 통해 병역의무를 회피하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여기는 자세는 어떠한가? 이 ‘경멸’의 시선에 존재하는 구도는 공익 대 사익의 대립이다. 새누리당 정치인들은 국가라는 제도를 멋대로 활용해 제 잇속을 채우는 ‘사익추구세력’이란 것이 이들의 비판의 요지다. 올해 선풍적인 인기를 끈 ‘나는 꼼수다’가 BBK 문제를 가지고 이명박을 물고 늘어지는 것과 유시민 전 의원이 “이명박은 이를 추구했고 노무현은 의를 추구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세계관을 드러내는 단적인 사례들이다.

▲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 설립자 고(故) 김지태씨의 유족들이 15일 서울 중구 정수장학회를 항의방문해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저쪽의 환상이 무엇이든 집어넣으면 종북을 만들어낼 수 있는 ‘논변의 요술상자’라면 이쪽의 환상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적들을 너무 많이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강고해진다. 이명박의 BBK든 박근혜의 정수장학회든 한국의 보수가 반칙을 일삼는 사익추구세력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들은 국가의 공공성을 말하고 시장의 합리성을 말하지만 한번도 제대로 된 국가주의자나 시장주의자였던 적이 없다. 트위터 팔로워가 줄어들면 종북세력의 해킹이라고 이해하는 보수적 학자의 수준이 바로 보수세력의 수준이다.

그렇다면 그 무수한 사례에도 불구하고 개혁세력에 만연한 ‘의 vs 이’, ‘공익 vs 사익’의 구도를 ‘환상’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명박근혜’가 사익추구세력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사익을 추구한다는 것이 정치적 토론에 있어 결정적인 논점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노무현도 한미 FTA를 추구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많은 개혁세력은 “그분은 사심없이 정말로 국가발전 전략으로 그것을 선택한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착한 FTA’라는 논법이 거기서 생긴다.

▲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15일 오후 경남 창원 마산회원구 마산올림픽기념관에서 열린 경남도당 대통령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을 마친 후 취재진의 정수장학회 관련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자는 이 설명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되는 문제의 핵심은, 사심으로 추구한 한미 FTA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추구한 한미 FTA나 그 정책적 효과는 똑같다는 것이다. 물론 참여정부의 한미FTA와 이명박 정부의 한미FTA 사이에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이는 재협상을 통해 불리해진 몇몇 개정의 차이의 문제이지 '사심'과 '공익'의 차이가 아니다. 그래서 정수장학회처럼 비리 자체가 쟁점인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정치토론에서 ‘사익’의 개념이 나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정책집행은 이익을 보는 이들과 손해를 보는 이들을 만든다. 그렇기에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누가 이익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떤 공익적 효과가 있느냐?’다. 박근혜의 사회정책과 문재인의 정책과 안철수의 그것과 다른 진보주의자들이 말하는 그것들 모두 공익을 추구한다는 테두리를 달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공익적 관점끼리의 대립이지 공익과 사익의 대립이 아닌 것이다. 공익과 사익의 대립구도에 끝없이 집착한다면 문화산업 종사자들은 대개 민주당을 지지하기 때문에 민주당이 문화컨텐츠 규제 완화를 말하는 것은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일 뿐이다라는 식의 변태적인 논리도 얼마든지 생성가능하다.

따라서 NLL과 정수장학회가 정쟁의 주요 쟁점이 되는 대선정국은 기자가 정리한 이 사회의 ‘애국국민’(새누리당을 지지하는)과 ‘개혁시민’(야권을 지지하는)의 환상을 정확하게 구현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는 이념논쟁도, 정책토론도, 노선이나 비전의 제시도 있을 수 없다. 논의 자체가 상대방은 안 된다고 욕하는 수준에서 빙빙 돌게 되고 사회문제의 해결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 요즘 사람들이 구호 차원에서 자꾸 ‘새로운 것’을 호출하는데, 그 ‘새로운 것’에 반대되는 ‘구태정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거다.

물론 이 구태가 반복되는 것은 정치권이 멍청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방법이 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그 환상의 틀로 세상을 바라보는 지지자들에게 ‘NLL’이나 ‘정수장학회’ 같은 이슈만큼 결집력이 높은 것은 없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반복될 때, 이 환상에 비교적 덜 동의하는 이들이 염증을 내면서 무언가 ‘다른 것’을 찾게 되리라는 것도 분명하다. 도대체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어 보이는 안철수가 쓰러지지 않고 지지율이 점점 더 오르기까지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문재인이 안철수를 따라잡고 싶다면 민주당은 ‘정수장학회 총공세’에 매몰될 게 아니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 "몇 번을 해봐도 몇 번을 해봐도 안철수가 쓰러지지 않아"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가 16일 오전 서울 밀레리엄힐튼호텔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미래포럼 개회식에 참석해 이야기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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