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일 오후 전태일 다리에서 기자회견하며 18대 대선 출마를 공식선언하는 진보정의당 심상정 의원 ⓒ연합뉴스

진보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대선후보 출마를 선언한 후 행보를 시작했다. 국정조사 차 방문한 부산에서 롯데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언급하며 본인이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하는 정대현과 같은 언더핸드 투수라고 주장했다. 당내 찬반투표의 절차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대선후보 첫 일정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심상정 의원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진보정치 세력의 대선대응에 의구심이 많다. 정치공학으로 볼 때도 안철수 후보가 중도층과 부동층을 흡수한 이번 대선은 ‘남는 표’가 거의 없는 빡빡한 3파전이 되었다. 정치원칙으로 볼 때도 진보정치 세력이 이번 대선을 위해 충분히 무언가를 준비해 왔다 보기 어렵다. 통합과 분열을 반복하는 과정에 핵심주체들은 탈진해 버렸고, 진보정의당 뿐만 아니라 진보신당 연대회의의 경우도 대선 대응을 통해 대선 후 창당을 목표로 하는 상황이다. 규모야 어찌됐든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이라는 강령 및 정책을 갖춘 당이 건재했던 2002년 대선과 2007년 대선과는 상황이 다르다. 사실상 진보정당 운동이 무려 1997년 ‘국민승리 21’ 때로 후퇴한 상황이나 다름없다.

'출마가 상책'인가? '상책'은 차라리 불출마가 아닐까?

진보정당 운동이 거의 1997년 수준으로 회귀해 버렸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다른 대책이 필요할 수 있다. 1997년의 경우는 노동법 날치기 이후 총파업으로 노동계의 세를 과시한 상황에서 그 지지를 받는 진보정당을 건설한다는 목표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적 '개혁'조치들이 막 시작되려는 상황이었고 민주화 세력이 그 개혁의 주체가 되는 상황에서 대안정치세력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그때까지 대중 앞에 서본 적이 없던 진보진영으로선 ‘우리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는 정세판단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맞닥트린 현실은 ‘사람들이 진보가 무엇인지 몰라서 외면받는 상황’이 아니라 ‘사람들이 진보가 무엇인지 너무 잘 알아서 외면하는 상황’에 가깝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엔 물론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 부정 사태와 그후의 이전투구가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유권자들에겐 통합진보당과 구별이 쉽지 않은 ‘진보신당’이란 이름을 고수한 이들 역시 이 사태에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는 통합진보당에서 터져 나온 문제들이 진보정당 운동을 해온 주체들이 대체로 민주노동당 때부터 공통적으로 경험해왔던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진보’란 명칭의 효용이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진보신당’이 그 명칭과 과감하게 절연하고 새로운 깃발을 제출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보신당으로서는 통합진보당으로부터 받은 방사피해가 억울할 수 있지만 그들이 그 억울함을 당하기 쉬운 위치를 억지로 고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이 진보정당이란 게 있을 수 있음을 몰랐을 때에는 대선이라는 최대의 홍보기간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얘기가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진보정당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고, 거기에서 한계를 본 상황이라면 얘기가 어떤가? 적어도 문제가 된 것들이 무엇이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고쳐야 할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 정도는 제시해야 표를 달라는 행동이 의미가 있다. 그러지 않는다면 진보정의당 노회찬 대표가 예전에 잠깐 언급했듯 출마선언이 염치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정희와 민병렬이 경선을 하고 있는 통합진보당은 물론이거니와, 심상정 의원이 나선 진보정의당이나 민중경선을 말하는 진보신당 및 제 진보정치 세력들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진보정의당은 통합진보당에서 의석수를 지킨 채 나오기 위해 ‘셀프 제명’이라는 비례대표 취지를 무색케하는 ‘제도적 장난질’을 쳤고, 진보신당은 아직까지 누구누구와 함께 대선을 대응할지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보수 후보 일색인 대선판에 정책적으로 비어 있는 부분은 많지만, 이 영역을 진보 후보들이 어떻게 채울 것인지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없다. 이렇게 준비가 안 된 대선에 반드시 출마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웃긴 일이 아닐까?

▲ 진보신당 연대회의 홍세화 대표. 진보신당은 애초 '민중경선을 통한 사회연대 후보'를 주장했으나 참여범위와 후보의 확정을 놓고 진통이 크다. 홍세화 대표는 일단 본인은 경선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중을 비친 바 있다. ⓒ연합뉴스

물론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도 언제나 깃발을 내리라고 요구하는 폭력적인 야권 단일화의 논리에는 분명히 반대해야 한다. 하지만 좌파진영은 그간 너무나도 당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매번 선거에 대한 관성적이고 성의 없는 도전을 대의로 치장하고 반복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지경이다. 목숨(물론, 상징적인 목숨이다) 걸고 뭔가 다른 걸 보여주겠다는 자세가 없으면 차라리 나오지 말라는 충고가 가능한 시점이 아닐까?

'단일화 중책'을 떠맡았나? '중책'은 차라리 완주가 아닐까?

심상정 의원의 출마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진보진영의 대선대응에 대해 상책이 불출마라면 중책은 ‘출마한다면 완주’ 정도가 될 것이다. 정책경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보수 후보 일색인 대선 정국에서 진보정당의 가치를 알리려면 독한 마음으로 진보진영의 정책들을 던지며 유권자들이 그것을 싫어할 경우 그 비판을 모두 감수하겠다는 자세 정도는 취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공학상 진보정의당 후보의 대선 완주는 쉽지 않은 일인 것이 사실이다. 심상정 의원 개인을 봐도 당론이 ‘선거 완주’였던 진보신당에서도 경기도지사 선거를 완주하지 못했는데, 당론이 ‘선거 완주’인지도 명확치 않은 진보정의당에서 대통령 선거를 완주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막상 나오고도 ‘목숨 걸고 뭔가 다른 걸 보여주겠다는 자세’ 없이 슬며시 깃발을 내리고 단일화 협상틀에 들어가는 것은 정당화가 굉장히 힘든 선택이다. 출마의 이유와 단일화의 이유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들어갈 때는 대선정국에 진보정당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가 나올 때는 정권교체와 야권 단일화가 더 중요하다고 얘기해야 한다. 공학적으로 볼 때도 당 지지율과 후보 지지율이 대단치 않게 된 진보정치 세력의 이와 같은 행보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진보정의당 차원의 이념지향이나 정치공학에서는 선거를 쉬고 넘어가도 큰 상관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대선이 지난 후에도 원내 제3당의 위상에 해당하는 7석의 의석은 남는다. 이는 ‘셀프 제명’으로 체면을 구기면서 아득바득 지켜낸 의석이다. ‘명분’을 훼손하였으면 조용히 태풍을 지나치면서 ‘실리’를 챙기는 선택을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진보진영에 대한 비난이 집중될 수 있는 대선국면에 굳이 깃발을 세우려고 한다. 여기에선 당적 차원의 이해관계보다 진보정당의 이합집산을 경험한 후보 개인들이 자신의 '네임벨류'를 더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정황이 보인다. 만약 단일화 틀에 들어가게 된다면 ‘한 달짜리 후보’에 불과한 대선 후보의 합의 추대를 가지고 노회찬 의원과 삼상정 의원이 막판까지 조율했다는 점도 이 정황을 뒷받침한다.

지금 선거국면에서 진보정당 후보의 필요성을 느끼는 유권자라면, 진보정당 후보가 잠깐 나와서 자기 이름값만 높인 다음에 단일화 협상 틀에 들어가 사라지는 꼴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나와야 한다면 완주해야 한다는 것이 중책이다. 하지만 진보정의당은 아무래도 이 중책 역시 회피하게 될 것 같다.

하책 : 정 단일화 할 거면 차라리 조건을 내걸지 마라.

그래서 선거에도 나와야 하고 단일화도 해야 한다면, 차라리 권력 지분을 요구하는 조건이라도 내걸지 않는 것이 하책일 것이다. 작년부터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연립정부론 같은 것들이 운위되었고 과거 통합진보당에서 이것을 야권연대를 정당화하는데 써먹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문재인과 안철수 측의 단일화가 문제일 뿐 진보정치 세력은 민주당에게 진지한 협력세력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보정치 세력이 대선 정국에서 미칠 수 있는 긍정적인 영향력의 최대치는 경제민주화와 복지정책 등을 경쟁하는 보수 후보들의 상황에 개입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정책을 발표하면서 자신들의 공약이 문재인 후보나 안철수 후보의 것에 조금이라도 반영되도록 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진보정의당 등이 정 자신의 존재 및 출마로 이 세상에 도움을 주려고 한다면, 이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명분없는 출마와 명분없는 단일화에 이어 명분없는 지분협상까지 진행된다면 진보정치가 그간 스스로 비판해 왔던 이권을 나누어먹는 종류의 보수정치와 스스로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진다고 하겠다.

▲ 진보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전태일 다리'에 헌화하고 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겐 그렇게 어려웠던 일이 그녀에겐 쉬웠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그녀와 진보정의당에게 모종의 책임감을 부여하는 일이기도 하다. ⓒ연합뉴스

대선 출마 선언을 하고 후보가 된다 하더라도 ‘독이 든 성배’요, ‘상처 뿐인 영광’일 수밖에 없는 시국이다. 현재 진보정치 세력이 통합진보당 사태 때만큼 사람들의 비판을 받지 않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사태 이후 그들이 유권자들에게 ‘아오안’(아웃 오브 안중) 취급을 받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지금 그들에게 놓여진 과제가 ‘아오안’을 벗어 던지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는 ‘두 마리 토끼 잡기’라면, 대선 출마 및 출마 후 전략의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고 세밀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나오고 싶은 사람끼리 합의해서 나가라고 한 후 하고 싶은 이들만 선거운동해서 노력하는’ 형태로는 진보정치의 혁신을 유권자들에게 납득시키기가 매우 어렵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이는 심상정과 진보정의당에만 해당하는 고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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