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가 이북 실향민들을 찾아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14일 용산구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이북도민 체육대회를 방문한 주요 대선후보 세 명은 엇갈린 반응을 받았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환대를 받은 반면 무소속 안철수 후보에 대해서는 일부 관중석에서 욕설을 터트렸다. 문재인 후보에 대해서는 플래카드를 든 20여명의 참석자가 동선을 따라다니며 야유를 퍼붓더니 급기야 물병을 투척하고 말았다. 투척된 10여개의 물병들이 문 후보에게 맞지는 않았지만 취재 중이던 한 여기자의 얼굴에 맞아 치료를 받는 일도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증오는 아직까지는 ‘상대방이 권력을 잡는 것까지도 용인한다’는 민주주의의 감수성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야권을 지지하는 개혁시민에게 새누리당 사람들이란 친일파의 후손으로 미국 국적을 통해 병역의무를 회피하는 일종의 ‘일본계 미국인’들로 이해된다. 새누리당 지지자들에게 민주통합당이나 기타 진보 세력은 북한 정권의 지령을 받아 남한의 공산화를 기도하는 ‘북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양측 모두 상대방을 함께 공화국을 만드는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전자의 판타지가 일종의 ‘경멸’을 수반한다면, 후자의 판타지는 한국 현대사의 끔찍한 기억과 결부되어 거의 상대방의 ‘절멸’을 기도하는 증오의 심성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문재인 후보에게 일어났던 일도 그와 같은 심성의 발현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건은 한국 정치의 두 축 중 하나를 지탱하는 한 보수정당(혹은 극우 정당)의 지지를 만들어내는 감수성이 아직까지도 6.25 전쟁 등 북한 도발에 대한 일종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정서적으로 조직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현장의 통쾌함과는 별개로 이런 상황은 보수언론에게도 그다지 중계하고 싶은 상황은 아니다. "저러면 안 되는데. 오히려 역풍 오는데"라고 중얼거렸다는 현장에서의 어떤 실향민의 반응처럼, 이러한 위해행위가 선거국면에선 오히려 어떤 '역풍'으로 나타났음을 지난 세월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사 기자까지 피해를 받은 만큼 일선 기자들의 반응은 달랐을 수 있다. 오늘 아침 지면에 해당 사안에 대해 중앙일보 기자와 한국일보 기자가 쓴 기자수첩이 실린 것은 그러한 심정의 반영이라 할 것이다.

▲ 오늘자 중앙일보 3면. 현장 분위기에 대한 기자들의 우려를 반영한 것이지만 내용을 보면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그런데 중앙일보 김경진 기자의 기자수첩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날아다니는 ‘물병’은 사라져야 한다. ‘욕설’도 마찬가지다. 둘 모두 명백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어떤 일에도 해법이 될 수 없다”라고 말한 건 약간 고개를 갸웃하게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지난 8월 28일 ‘전태일 다리’에 헌화할 때 현장에 있던 이들이 “독재자의 딸” “부끄러운 줄 알라”고 외쳤다. 박 후보 측에선 현재 과거사와 화해의 일환으로 오는 16일 부마항쟁 기념식 참석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지금과 같은 분위기라면 그땐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말한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근본적으로 문재인 후보에게 물병이 투척되는 상황과 박근혜 후보의 헌화를 저지하는 상황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상황으로 구별한 것 자체가 문제적이다. 글은 “역대 어느 대선 때보다 국민대통합이 과제로 떠오른 이번에 왜 아직도 물병이 날아다니는지 각 후보 진영도 성찰해야 한다. 자기 진영만의 대통령이 되려 한 적은 없는지 말이다”로 끝난다. 결국 사태의 핵심을 ‘폭력’이 아니라 ‘통합 반대’로 이해한 것이다.

▲ 오늘자 한국일보 5면 기자수첩. 원론적인 얘기였지만 민주시민의 권리를 투표로만 제한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살만했다.

그의 말대로 국민대통합이 정치권의 과제로 부상하기는 했지만 그렇더라도 정치란 기본적으론 갈등을 대변하고 조직화하는 기술이다. 애초에 갈등이 없다면 통합이라는 것도 무의미하다. 민주주의 사회의 통합이란 적어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상관없이 전제군주의 생각에 맞추는 전근대 왕정 사회의 통합의 논리와는 달라야 한다. 하지만 보수언론 기자들이 이런 사안에 있어 ‘폭력 반대’를 말할 때 그들이 생각하는 바는 ‘민주시민’들이 평소에는 의사표시를 하는 법이 없고 단지 “정책에 대한 호ㆍ불호는 투표를 통해 밝”(한국일보 5면 김회경 기자수첩)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정부 시책에 찬성하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일사분란하게 마스 게임을 펼치는 상황을 욕망한다.

▲ 오늘자 한국일보 4면. 세후보가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한다. 이런 사진은 나름의 뿌듯함을 주지만 그 뿌듯함 역시 세후보가 갈등 관계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다.

2006년 지방선거 국면에서 칼부림 폭행을 당한 박근혜 후보의 사례에서 보듯, 정치인에 대한 폭력의 문제가 여야를 가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상대방의 절멸을 욕망하고 실현하려는 시도와 상대방의 정견에 반대하고 그와의 통합에 반대하는 시위의 자유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라면 필요한 것은 갈등의 내용을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하는 기술이지 무조건적인 통합에의 요구는 아닐 것이다.

보수언론의 기자수첩은 현장의 안 좋았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지만 이 부분에서 의견이 갈렸기에 어정쩡한 양비론의 형식을 취하고야 말았다. 형식은 물병을 투척한 시민들에 대한 비판이나 결국 내용은 한국 사회에서 펼쳐지는 모든 종류의 시위를 비판하는 것이 되고야 말았다. ‘욕설’ 정도도 함께 ‘폭력’으로 계열화하는 수준에서는 그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들의 말을 따른다면 결과적으로 시민은 자기 삶에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떤 폭력을 당하든 묵묵히 참고 투표장에서만 한번 권리를 행사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는 셈이다.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한 보도는 역설적으로 ‘한국의 언론이 허용하는’, 그리고 ‘한국의 언론이 희망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 지난 8월 29일자 조선일보 1면 사진. 박근혜의 전태일 다리 헌화를 반대하는 쌍용자동차 김정우 지부장의 모습이다. 세심하게 살피면 김지부장은 이미 어떤 손에 의해 끌려나가는 상황이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이 찰나를 포착한 여러 사진 중에 김정우 지부장의 움직임이 가장 크게 부각한 사진을 택하여 박근혜를 막은 어떤 세력의 '폭력성'(?)을 강조했다. 결국 보수언론이 막고 싶은 것은 문재인에 대한 물병 투척이라기보단 이런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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