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소속 안철수 대선 후보가 11일 오후 충북 청주시 청주교육대학교에서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사회로 갑니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뒤 대강당을 나서자 학생들이 악수를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연합뉴스

“무엇보다 아이들의 미래를 낡은 정치 세력에게 맡길 수 없다는 탈당의 변은 귀를 의심케 한다. 새 정치를 실천하겠노라 천명해도 좋았을 법한데 친정을 ‘낡은 정치 세력’으로 몰아세워야 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 특히 국감 기간에 현역 의원이 탈당해 경쟁 후보 진영으로 말을 바꿔탄다는 것은 정치도의에도 어긋나는 처신이다. (...) 낡은 정치 중에서도 으뜸은 의원 빼가고, 빼오기일 것이다. 그를 대표로 뽑아준 민심에 대한 배반이고, 필연적으로 화합보다는 대결의 정치를 부르기 때문이다. 안 후보 측은 송 의원의 합류가 자신들이 말하는 새 정치에 부합하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경향신문 10일자 사설)

“문재인·안철수 단일화, 고군분투하는 안 후보 보호론 따위의 하나 마나 한 핑계를 되뇐 걸 보면, 본인도 낯이 뜨거웠던 모양이다. (...) 그렇게 새롭고 올곧은 사람이 왜 민주당에 입당했을까, 그때는 낡은 당인지 몰랐나. (...)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안 후보다. 입당행사 때 그가 시종 짓고 있던 웃음이 그날만큼은 전혀 선량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새 정치란 게 뭐지? (...) 안 후보는 본의 아니게 새 정치의 밑천을 드러냈다.” (11일자 한겨레 논설위원 곽병찬 칼럼 <안철수식 새 정치의 탈선>)

원리원칙의 차원에서 명백한 사안인만큼 진보언론도 송호창과 안철수를 ‘세게’ 비판한다. 사안을 접하자마자 사설로 치고 나간 경향신문이 한 템포 빨랐다. 한겨레 역시 기본적인 생각은 다를 수가 없었을 텐데, 사설에서는 이슈가 밀렸고 다음날 논설위원이 ‘송·안’을 강하게 비판하며 ‘정론의 밸런스’를 맞추는 수고를 했다.

즉각적인 비판과 약간의 머뭇거림. 이 사이의 짧은 시차에 진보언론이 안철수를 대하는 애매한 감수성이 드러난다. 문재인 지지자들은 진보언론이 안철수에게 지나치게 호의적이라 투덜대기도 한다. 하지만 안철수 지지자 입장에선 진보언론이 문재인에게 너무 호의적이라고 비친다. 그간 한겨레 정치부는 성한용 선임기자가 거듭 안철수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내는 칼럼을 쓰는 등 기본적으로 안철수보다는 문재인에게 우호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경향신문의 경우 논조가 왔다갔다 하는 식으로 ‘중립’을 지켜온 것에 가깝지만 안철수가 출마선언을 하기도 전에 안철수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을 주최하며 ‘친안철수 인사’를 모두 집결시키는 ‘푸닥거리’를 치른바 있다. 경향신문이 곧바로 안철수를 비판하고 한겨레가 다소 머뭇거린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래서였을 수가 있다. 경향신문은 안철수를 충분히 키워줬다고 여겼고 한겨레는 안철수에 너무 야박하다는 평가가 신경이 쓰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부 기자'에게 안철수가 안 보이는 이유

이런 사정들을 살피면 진보언론에게도 ‘안철수 현상’이 딜레마인 이유가 드러난다. 사실 ‘안철수 현상’은 정치에 제법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더 오리무중으로 여겨지는 것일 수 있다. 정치공학적인 측면에서도 이해가 안 될 뿐 아니라 정치원칙의 차원에서도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안철수가 작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의사를 밝히며 정치권 담론에 편입되기 전에도 안철수의 정치인으로서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질의하고 다니는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청춘콘서트’의 성공에 고무되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자들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이들은 한겨레 경향신문 기자의 반응이 조중동 기자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정치부 기자’란 존재는 ‘여의도 정치’의 문법에 익숙하고 일반인들이 듣지 못하는 정보를 많이 듣는다. 우리가 정치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기자들이 기사에서만 발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훨씬 더 다양한 루트를 통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기에 반대로 그 ‘여의도 정치’의 문법과 기존의 선거공학에서 벗어나는 상황들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이는 특정 영역의 공부를 많이 한 학자들이 되도록 자기 전공을 활용해 세상사를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비슷한 태도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테이블에 정치부 기자와 정치학자를 초대할 필요가 있지만, 정치부 기자들이나 정치학자들끼리 모인 테이블에선 전혀 엉뚱한 얘기가 오가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이 비슷한 감수성을 맞추어보며 그것이 보편의 경험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하면 얘기가 산으로 가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정치부 기자의 판단이나 예측에도 일정한 제약이 있다. 2009년 말 정도 상황에서 어떤 정치부 기자들은 유시민이 다음 대통령이 될 것임이 거의 확실시되며 박근혜가 그를 이길 방법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시민이 대구출신이며 노무현 사후 부산표를 끌어당길 수 있다는 선거공학은 알았던 반면에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들이 유시민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잘 몰랐다. 2010년 지방선거가 끝났을 때 어떤 중앙일간지 정치부 기자는 경기도지사 선거를 매우 감명 깊게 보았다며 이번 대선에서도 유시민과 김문수의 ‘리매치’가 벌어지지 않을까 한다고 전망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 예측이 있는가 하면 다른 예측도 있었을 것이다. 해당분야의 전문가라 하더라도 모든 문제에 합의를 하는 법은 없다. 정치적 예측에서는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많다. 그 점은 생활인이나 전문가나 동일하다. 그래서 생활인들은 다른 영역에서는 해당 전공의 공부를 하거나 업계 경험이 많은 이들의 말을 존중하면서도, 유독 정치영역에서 만큼은 학자나 기자의 견해에도 물음표를 달고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직관을 훨씬 더 신뢰하는지도 모르겠다.

▲ 오늘자 한겨레 30면에 실린 논설위원 곽병찬의 칼럼

생활인에게도 전문가에게도 어려운 '정치'라는 생물

물론 이런 상황도 일종의 역편향이기는 하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의 정치’를 가장 잘 이해하려면 공부한 사람과 경험이 있는 사람과 각각의 세대, 지역, 계층을 대변하는 사람을 모두 한 테이블에 모아놓고 난상토론을 벌여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란 사람들이 원하는 것 그 자체이기도 하니 말이다. 한국의 대선에서 추석이 일종의 변곡점이 될 수 있는 이유도, 대선과 적당한 시간적 거리를 둔 시점에 이런 테이블에 유사한 것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개별자인 유권자들은 명절에 특정 지역으로 흘러들어가 각지에서 모인 친척들이 있는 상황에서 생각의 섞임을 경험하고 돌아와서는 각자가 느낀 그 ‘민심’을 다시 한번 지역별로 ‘종합’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파악한 정치의 모습도 한 순간일 뿐이다. 그래서 지각있는 정치부 기자들은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니까, 어디로 튈지 누구도 모른다"고 자조적으로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정을 이해했을 때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 진보언론이 ‘안철수 현상’을 애매하게 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해명된다. 안철수는 기본적으로 세력과 지지기반이 없는 ‘제3후보’이고 ‘여의도 정치’의 관점에 포섭되지 않는다. 지지율이 아무리 높더라도 특정한 계기로 인해 ‘한 방에 훅 갈 수’ 있는 상황이고 설령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안정적인 통치력을 발휘할 가능성은 없다. 정치부 기자들이 안철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그렇지만 ‘안철수 현상’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고 일 년 여의 시간 동안 꾸준히 제1야당의 후보보다 집권당의 대선후보에 대한 대항마로 여겨졌다는 특수성이 있다. 이것도 존재하는 현상이니까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곽병찬은 자신의 칼럼에서 “안 후보는 정주영, 이종찬, 박찬종, 이인제, 정몽준 등 앞선 제3후보들과는 다르다. 기성 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실망만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무려 1년씩이나 최고의 지지율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며, 선거를 목전에 두고도 새 정치의 비전과 내용도 제시하지 못한 그를 유권자들이 지켜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남다른 점이 있다면, 여의도 정치권이 아니라 거리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풍찬노숙은 아니어도 수많은 청년 학생들과의 만남에서, 기업을 하면서 보인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 시대의 문제를 배웠고, 시대의 고통을 함께 나눴다. 뾰족한 해법도 없는 그를 유권자들이 신뢰하고 또 진정성을 인정한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라고 설명한다.

일리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본질적으로는 “강남스타일은 어째서 성공했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과 흡사하다. 안철수가 대선 막판까지 이 지지율을 유지할 때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지만, 또 사람들의 냉소를 자극하는 추문이라도 하나 나와 급속도로 사그러든다면 ‘정주영, 이종찬, 박찬종, 이인제, 정몽준의 전철을 밟았다’고 얘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안철수’를 평가하는 것과 ‘안철수 현상’을 평가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다. 안철수가 시대를 구원할 메시아나 초인이 아니라고 냉정하게 지적한다 하더라도, ‘안철수 현상’에 스며들어 있는 대중들의 정치변혁에 대한 강렬한 열망까지 폄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언론들의 태도는 더욱 모호하고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안철수는 기존의 문법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람이므로 남들과 똑같은 행동을 했더라도 평가에 다른 잣대를 가져와야 할 것 같고 빠른 판단과 비판이 이루어지기가 힘든 것이다.

▲ 한겨레 5월 29일자 30면 성한용 선임기자의 칼럼. '안철수 대통령'이란 상상이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이해가 가는' 딜레마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딜레마를 좀 더 적나라하게 기술하자면 이렇다. 안철수는 원칙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 행보나 발언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 쉽고 그에게 기대를 거는 것을 정당화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지지율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상 선거공학을 보면 그가 대선출마를 하지 않거나 급속도로 세가 쪼그라들면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안철수가 중도층을 붙들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박근혜의 확장성을 저지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안철수가 뭔가 좀 더 잘 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심정이 될 수밖에 없다.

▲ 한겨레 9월 13일자 26면 성한용 선임기자 칼럼. 안철수에 대한 의구심을 다시 한번 드러내고 있다.

▲ 지난 4일자 한겨레 26면 성한용 선임기자 칼럼. '단일화 만능주의'에 대한 경계를 담고 있지만 역시 안철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고 있다.

진보언론의 안철수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기본적으로 이번 대선의 선거국면이 야권에 있어 굉장히 애매모호한 무언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의 선거에선, 정당이 뚜렷하게 보이지도 않고 이념이 뚜렷하게 보이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정책대결이나 슬로건 대결조차 아니다. 그렇다고 엄연히 그런 방식으로 전개되는 선거국면에서 “선거가 이런 식으로 전개되면 안 된다”는 당위만을 반복하는 것도 무력함을 자인하는 꼴이 된다. 그리고 이 애매모호함을 생산해냈고 그 핵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안철수의 존재라는 상황을 이해하면, 그에 대한 진보언론들의 ‘애매모호한 태도’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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