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총선 정통민주당의 출범을 선언하던 한광옥의 모습. ⓒ연합뉴스

김대중 정부의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한광옥 전 민주당 상임고문과 김경재 민주당 전 최고위원 등 동교동계 인사 20여명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대선캠프에 합류한다고 한다. DJ계 인사를 영입해 박정희와 김대중의 화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호남표를 공략하겠다는 계산이다. 물론 이들의 합류가 당장 실익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은 민주통합당 공천에서 탈락한 후 이미 이탈하여 지난 총선에 정통민주당을 만들었던 사람들이지만 한 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했고 정당 득표율은 0.22%에 그쳤다.

그러나 박근혜 캠프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당장의 표 계산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상관이 없다. 박근혜 후보 지지층의 특성상 지불해야 할 비용은 없고, 활용하기에 따라 앞으로 이득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윤여준 영입에 대해 지지층의 비판을 받아야 했던 문재인 후보의 입장과의 차이가 이것이다. 그저 그가 강조하는 ‘국민통합’ 행보에 대해 주야장천 인용할 수 있는 좋은 사례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또는 본인은 DJ계와 화해를 했는데 왜 문재인 후보는 박정희 묘에 참배하지 않느냐고 은근히 공세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재인 캠프의 입장에서도 이는 대처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문재인 후보는 안철수 후보가 자신보다 명백하게 지지율이 높았던 출마 선언 직후의 시점에 민주당 인사들의 이탈을 최소화한 것만으로도 나름의 지도력을 발휘했다고 봐야 한다. 경선 내내 잡음이 많았던 여러 계파가 있는 그 정당에서 김두관·손학규·정세균 지지자들을 달래며 ‘용광로’ 선대위를 구성하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실무자급에 친노 인사를 많이 배치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등 당내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총선 전에 민주당에서 이탈한 이들에게까지 신경을 쓸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즉 동교동계 인사들의 박근혜 캠프행은 ‘해서 문제될 것 없었던 박근혜 측’과 ‘대처할 도리가 없었던 문재인 측’의 이해관계의 사이에서 발생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 사건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경우가 다르더라도 윤여준과 같은 새누리당 인사가 민주당에 오고, DJ계가 새누리당에 가는 상황은 ‘정치권 인사는 그놈이 그놈’이란 류의 허무주의를 강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허무주의가 강화될 때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민주당 쪽이다. 투표시간 연장에 대한 거부나 ‘터널 디도스’ 의혹에서도 보여지듯 새누리당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덜 가지거나 혐오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유리한 정치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여준의 영입은 최근 윤여준의 견해를 생각해 보건대 의미가 있었다 하더라도, 민주당으로선 이에 대한 맞불로 ‘상대편 인사 빼오기’를 실행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가령 민주당이 새누리당에서 소외된 친이인사들을 영입한다면, 이들을 통해 통합의 이미지를 얻기 보다 민주당의 '진정성'을 심각하게 의심받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직접적으로 민주당에 대한 지지철회를 선언하는 개혁성향 유권자를 만들어낼 뿐더러, 이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 허무주의는 투표율 저하와 연결되니, '투표 독려'에 열을 올리는 민주당에겐 치명적인 실책이다. 그러니 민주당으로선 그저 동교동계 인사들의 협량함을 원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이 사건이 한국의 정당정치가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를 여과없이 드러냈다고 평할 수 있다. 김대중이 정계은퇴를 번복했을 때 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고 외부에 소수정당을 만들었다가 한나라당으로 건너간 몇몇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간 민주당 지지자들은 그들이 한나라당에 건너갔다는 이유만으로 악마와 손을 잡은 악마 그 자체가 된 것처럼 비난하곤 했다. 김대중이란 후보를 중심으로 모인 것도 제대로 된 정당정치로 볼 수는 없었지만 한나라당이란 절대악을 기준으로 그런 행보를 합리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김대중을 중심으로 정치하던 이들이 친노에게 배척받았다는 이유로 이제 또 새누리당으로 넘어가게 된 상황이다. 그들 역시 야권 지지자들로부터 악마화 되겠지만 상황이 이렇다면 그 악마화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 물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과거 열린우리당에 합류한 한나라당 의원들이나 이번에 문재인 캠프에 들어온 윤여준이 많은 민주당 정치인들보다 더 합리적인 사람들이었음에도 그렇게 많은 비판을 받은 정황을 생각한다면 확실히 그렇다. 물론 이번 동교동계 인사들의 ‘투항’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하기 힘든 뒷방 늙은이의 월담이라고 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투항’을 별다른 부담없이 받아들인 박근혜 측이라고 해서 속편한 상황은 아니다. 그간 몇 번이고 이탈을 시사했고 또한 그것을 번복했던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 새누리당에서 나올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김종인은 경제민주화 논쟁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친박 인사에 대한 쇄신을 거부한 박근혜 측에 실망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누리당이 총선 정국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담론을 선점하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김종인이 만일 이탈한다면 박근혜의 리더십도 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총선 당시 새누리당 비대위원이었던 이준석은 한광옥의 인터뷰가 2시로 예정되어 있는 것을 빗대어 “오후 2시에 과거를 영입하고 미래를 내보내면 안된다. 선거에 이기고 지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라고 평했다. 유례없이 팽팽한 3파전의 양상이건만 승부수를 던지는 법이 없는 조용한 세 명 주자들의 소리 없는 레이스 속에서 대선의 시계바늘은 인간이 가장 졸리운 시간이라는 ‘오후 2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