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소속 안철수 대선 후보가 국민대학교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배식받고 있다. ⓒ연합뉴스

안철수에 대한 담론의 대다수는 ‘안철수 현상은 무언가 새로운 것의 발현이다’라는 긍정론과 ‘안철수의 지지율엔 실체가 없다’는 회의론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전자는 정보민주주의, IT세대, SNS세대의 소셜 혁명 같은 단어들을 주워섬기며 '시대정신'을 확보하려 하고, 후자는 정당정치의 당위와 양당제라는 정치공학적 현실을 들이밀며 이 현상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안철수 현상, 무성의한 환호와 성급한 회의 사이

그러나 전자의 환호는 한국 사회의 정당정치가 충분히 정착되지 못한 상황에서 그것을 넘어갈 전망을 말한다는 점에서 다소 성급하다. 한국 정치에 문제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노회한 정당정치의 한계가 아니라 정당정치조차 오지 못한 척박한 현실 그 자체일 것이다. 또한 이 시각은 이 현상이 아예 새로운 것이었다면 사람들에게 지각되지도 못했을 거라는 점을 무시한다. 즉 어떤 것이 새롭다는 이유로 환호받는다면, 그것은 기존의 무언가의 적당한 변주여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안철수 현상이 새롭다는 환호는 그 새로움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볼 수 없었던 진정성, 정치 영역에 없던 새로움, 새로운 세대의 지지, 이런 것들은 찬탄의 방식일 뿐 무언가를 설명하는 수식어들은 될 수가 없다.

한편 후자의 한숨은 안철수 현상이 한두 달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일 년여 간을 상수로 존재한 열풍이란 사실을 아예 간과한다. 한국 사회에 정당정치가 착근되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 진단하면서도, 지금의 허약한 정당의 틀에 담겨져 있는 열망만을 분석대상으로 바라본다. 물론 만약 민주당이 일종의 '공천혁명'을 통해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면, 박근혜의 ‘광폭행보’가 과거사와 현실의 인권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상식에 기초했다면 안철수는 링 위에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투사되는 욕망이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면 한국 사회에 실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문제가 있다. 지금 이 순간 안철수에 대한 열망은 적어도 민주당에 대한 기대보다는 훨씬 실체가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 작년 3월 21일 현대중공업에서 열린 정주영 명예회장 10주기 추모식의 모습. 정주영이 정치영역에서 하고자 했던 바는 아들 정몽준의 그것과는 다소 달랐던 것 같다. ⓒ연합뉴스

결국 전자든 후자든 우리가 건너뛰고 있는 건 이 현상을 지탱하는 욕망들이 분출되었던 ‘전례’를 찾아내는 일이다. 비판론자들은 간단하게, 안철수의 행보를 과거 ‘제3주자’들의 것과 비교한다. 그렇게 본다면 그의 미래는 미국에서 ‘제3주자’로 가장 성공한 로스 페로와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정주영 정몽준 부자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옹호론자들은 그렇게 말하기는 싫어서 전례를 찾으려는 시도를 아예 포기한다. 그러나 안철수가 기존의 제3주자들에 비해 새롭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기존에는 정치인이 담당하지 않았던 어떤 부분을 선거국면에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전례에 대한 분석 역시 로스 페로나 정주영만을 말할 게 아니라 원래는 선거 밖에 있었던 것들을 참조하는 것이 합당하다.

2000년 낙선운동을 지탱했던 그 정서

가령 우리 정치사에서 ‘무당파 제3후보’로 가장 빨리 등장한 것은 오늘날엔 '미네르바 사태'와 같은 시국사건의 변호를 맡으려고 애쓰는 변호사 박찬종일 것이다. 그런데 박찬종이 참신한 인물일 수 있었던 맥락은 당시로서는 ‘3김정치’를 벗어나 있다는 데에 있었다. 당시 3김정치는 보스정치, 계파정치, 지역주의 정치로 여겨졌고 사람들은 그러한 특성들을 엮어 구태정치라 불렀다. 박찬종은 박정희 시절 정치권에 입문하고 유신 시절 '여당 내 야당'으로 불리는 인상적인 활동을 펼치다 1980년대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야권 정치를 하였고, 1987년에 야권 후보 단일화를 주장하다 양김과 결별한 후 1988년 13대 국회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는 등 무당파로서 보기 드문 성공을 거두었다. ‘깨끗한 정치’를 말하던 박찬종은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에 이어 4위를 차지하였고 (그는 당시 150만표를 얻어 6.1%의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애석하게도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대선에서 그 정도 지지율도 기록한 적이 없다) 그후 '무균질 우유' 광고에 등장하는 영화를 누린다. 또 그는 1995년에 최초의 민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로서 실시된 서울시장 선거에 나와 초반에 조순에 비해 20% 이상을 앞서 나가다가 정계 복귀한 김대중이 조순을 지지하면서 다시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만약 그 당시 서울시장이 될 수 있었다면 그는 한국 정치사에 보기 드문 전례가 되었을 것이다.

▲ 미네르바 '박대성'의 국가 상대 1억원 위자료 청구 소송의 취지를 설명하는 박찬종 변호사의 모습 ⓒ연합뉴스

노무현의 시대를 지나고 이명박의 시대가 저무는 지금 제3후보의 함의가 그때와 같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가 오늘날 제3후보 안철수를 지지하는 욕망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역시 구태정치에 대한 반감이기는 하나 3김정치라는 특정한 조류에 대한 반감은 아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구태정치에 대해 가지는 상은 ‘이념을 말하지만 실은 사리사욕에 기대어’, ‘타협하지 않고 서로 싸우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이들에 대한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조 당파싸움(좀더 객관적인 용어로는 ‘붕당정치’가 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정치권에 투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정서가 특정한 정치인을 통해서는 아니라도 정치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대중운동으로 분출되었던 경험을 이미 가지고 있다. 바로 2000년 총선 전에 있었던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이 그것이다. 사실 낙천.낙선운동은 평균적인 대한민국 시민들의 탈정치성과 정치허무주의에 기반한 강력한 대중운동이었다. 당시의 실정으로 얘기한다면, 한나라당이 옳은지 민주당이 옳은지, 혹은 정부에 호남 편중 인사가 있는지 없는지, 한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 것은 첨예하게 정치적인 문제다. 하지만 부패하고 게으른 것으로 밝혀진 국회의원들을 공천받지 못하게 하고 당선되지 못하게 하자는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당시의 TV 뉴스 카메라는 “맨날 서로 싸우기만 하는 정치인들(혹은 국회의원들)”에 대한 염증을 표하며 낙선운동을 지지하는 시골 촌부들의 모습을 종종 비추었다. 그들 중 일부는 실제로 ‘당파싸움’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즉 낙선운동에 대한 폭발적 지지 뒤에 숨겨진 것은 오늘날의 안철수 현상의 기반과 비슷한 기성 정치에 대한 염증이었다. 그 반응이 어찌나 폭발적이었던지, 시민단체의 낙천 대상자 명단 발표 때는 네 개의 TV 방송사가 그 실황을 생중계하는 진풍경이 생겨났다.

▲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주역들이 2003년 관련된 소송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후원회를 연 모습. 박원순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 최열 환경재단 상임이사, 지은희 여성부장관 등 참석자들이 '정치개혁'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훗날 서울시장이 되는 박원순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연합뉴스

그랬던 낙천.낙선운동은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과 소설가 이문열 등이 중심이 되어 이 운동으로 수혜를 입는 것은 민주당이며 시민단체들의 뒤에 김대중 정부가 있다는 음모론을 유포한 뒤로 대중성을 상실했다. 일단 영남지방에서부터 총선시민연대를 보는 시선이 싸해졌고 선거 후 대표적인 활동가들이 사법처리 당할 무렵에는 아무도 그들을 신경쓰는 사람이 없었다.

갈등과 냉소의 진자 운동

물론 안철수 현상의 전례로 언급할 만한 사건들이 박찬종과 총선시민연대 두 사건 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사건만 일별하더라도 기성정치에 염증을 느끼는 탈정치적 열망들이 정치 영역에 분출되고 좌초한 방식이 시대에 따라 다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찬종은 지역주의 구태정치에 도전했고 바로 그것에 의해 진압당했다. 반면 총선시민연대는 지역주의와는 상관없는 영역에서 대중의 냉소를 조직했다. 그랬지만 그들도 역시 반DJ 정서의 문법에 맞춘 음모론의 공세에 결이 다른 냉소의 시선을 받으며 좌초되었다.

즉 우리는 기존의 한국 정치에서 갈등의 축이었던 ‘지역’문제에 대한 염증에서 제3후보가 등장했고, 그 갈등이 제대로 된 갈등이 아니라고 일갈하는 차원에서 대중의 냉소도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선 야권의 후보로 등장했으되 노무현 후보 역시 그런 종류의 냉소와 시대정신을 분유하고 있었다. 그는 양당에서 보기 드물게 지역주의에 맞선 정치인이었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갈등을 넘어 ‘21세기 대한민국’을 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지역이라는 갈등축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상황에서 참여정부가 보수세력과 불화한 ‘수구세력vs민주화세력’이란 다른 종류의 갈등축에 짜증을 내는 일군의 대중이다.

▲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활동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매 총선마다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은 있었다. 2004년 총선시민연대의 모습. 훗날 민주통합당 의원이 된 참여연대 김기식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연합뉴스

그렇기에 오늘날 안철수 후보가 일갈하는 정치권의 분열은 참여정부가 만들어낸 모종의 '이념갈등'이다. 이 이념갈등은 수구세력의 공세와 참여정부의 역공세로 구성되었다. 안철수를 정계로 불러낸 게 사실상 오세훈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갈등의 양상은 쉽게 추측이 된다. 무상급식은 찬반 여부를 떠나 그 예산의 크기를 볼 때 정치세력끼리 적당히 조율하면 되는 정도의 정책사안이다. 그러나 무상급식 앞에 ‘보편적 복지’란 단어를 두는 행태를 이념적으로 해석하고 망국의 포퓰리즘을 타파하겠다며 시장 자리까지 도박의 대상으로 거는 오세훈의 ‘오버’에 사람들은 그만 신경질이 났다. 햇볕정책만 추구해도 친북세력이라 부르고 자잘한 복지정책만 말해도 재정파탄을 불러오는 분배론자라 비난하는 수구세력에 대한 반감이다.

어떤 사람들은 소위 개혁세력 측도 반대파에 대해 비슷한 식으로 접근했다고 이해한다. 그럴 법도 하다. 비록 상대적으로 소수파였던 그들은 정치세력의 입장에선 그런 방식을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차원에서는 비슷한 방식의 단순논리를 보여주었다.

안철수에 대한 지지의 이면에 있는 것은 그러한 최근의 정치 조류에 대한 혐오와 냉소다. 강준만은 ‘증오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는 말로 그 냉소를 가장 세련되게 정식화했다. 안철수의 출마선언 기자회견문에 강준만의 흔적이 보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열망에 대한 가장 세련된 논거를 차용한 것이다.

그런데 박찬종과 총선시민연대와 노무현과 비교해 보면, 정치세력이 없는 혈혈단신의 안철수는 노무현보다는 박찬종 쪽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제3후보’ 안철수는 로스 페로나 정주영이 그랬듯 실패할 운명이 아닌가? 당연히 할 수 있을 법한 얘기이지만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데 지금 상황의 특수성이 있다.

‘안철수의 정치공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안철수는 정치 일반에 대한 대중의 냉소에 기대고 있지만, 박찬종에 비하면 굉장히 탄탄한 정치공학에 기대고 있다. 그 정치공학은 일단은 그가 다자구도 2위 정도의 위치만 점한하면 ‘야권 단일화’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정치공학이다. 이명박 정부 시대에 강화된 '반MB 정서/전선'에 기반한 '야권 단일화' 논리는 과거의 '비판적 지지' 담론과는 다르게 종종 민주당을 '물 먹이는' 방식으로 작용해 왔다. 운동권들끼리의 논의였던 '비판적 지지' 담론과는 다르게, 야권 지지층 일반이 '야권 단일화'를 희망한다면 민주당 후보보다 지지율이 높은 소수정당/무소속 후보가 있을 경우 민주당이 양보해야 한다는 것도 감당해야 할 몫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기도지사 선거에서의 유시민으로의 단일화, 안철수가 직접 개입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의 박원순으로의 단일화가 그 예다. 안철수 역시 그 조류에 기대는 상황이다. 만일 단일화가 이루어진다면 안철수는 ‘제3후보’가 아니라 제도권 안에 있는, 당선가능성이 가장 높은 ‘제2후보’가 된다. 이에 대해 '정당정치'를 말하며 무소속 안철수를 질타하는 것이 난망한 이유는, 애초에 정체성이 다른 야권 정당의 후보를 낙마시키라는 야권 단일화 논리 자체가 정당저치에 어긋난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여기까지의 정치공학은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부분은 안철수를 여론조사에서 다자구도 2위로까지 올릴 수 있는 그 동력이다. 박찬종이나 이인제나 문국현의 사례에서 보듯 대부분 정당조직에서 열세인 후보들은 인물론에서 앞서도 다수당 후보를 안정적으로 앞서는 지지율을 확보하지 못했다. 왜 안철수는 그들과는 다른 예외가 될 수 있는 걸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안철수가 ‘친노' 이전의 정치공학에 일정부분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민주당 바깥에서 구민주당의 상징을 재현하려고 한다. 지금의 안철수 지지율은 대중의 정치혐오에만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안철수를 '제3후보'로만 바라보는 이들이 놓치는 부분이 그것이다. 지금의 안철수 지지율의 강력한 동력 중 하나는, 현재의 민주당은 친노가 장악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층인 호남은 그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차라리 안철수를 지지한다는 데에 있다. 호남이 친노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열린우리당 분당 등 참여정부 시기에 있었던 여러 가지 갈등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족할 것이다.

▲ 지난 11일밤 대방동 공군회관에서 열린 전국호남향우회 총연합회 긴급모임에 참석한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경선 정세균 후보의 모습. 호남인들은 대선경선에서 친노에 대한 반감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이 이미 당내에서 친노세력에 맞서는 것을 포기하고 안철수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연합뉴스

그간에 민주당 안에서 작동했던 정치공학은 이렇다. 민주당이 집권하는 데 35% 정도의 유권자가 필요하다고 치자(이 지지율은 투표율을 2002년 16대 대선 때 그랬던 것처럼 70% 정도로 잡고 그중 과반을 확보한다는 전제에서 산출된 것이다. 2007년 17대 대선 때처럼 투표율이 63%에 불과하다면 31%만 확보해도 당선될 수 있지만 전통적 지지층이 결집하는 새누리당을 상대해야 하는 개혁세력은 이것보다는 좀 더 많은 지지율이 필요하다). 이 때에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은 25% 정도를 데려올 수 있을 것이고, 결국엔 대중적 친화성이 있는 친노가 이후 10% 정도를 더 데려올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승부가 나게 된다. 기여하는 지지율만 따진다면 친노의 비중이 적지만 전통적 지지층이 ‘상수’인 상황에서 추가적인 지지율을 가져오는 친노가 발언권을 얻고 당을 리드하던 구조였던 것이다. 그러나 참여정부 집권 이후엔 친노 역시 갈등축의 하나가 되었고, 그들에 대한 ‘안티’도 적지 않다. 그들이 데려올 수 있는 것이 10%가 아니라 5%라면 집권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의 지분으로 25%를 업수이 여기는 것이 친노들의 민주당 전통적 지지층에 대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호남’이란 말로 표현될 수도 있는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층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그들의 입장에서라면, 야권 성향이면서, 자신들을 배제해왔던 친노가 아니며, 또한 중도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특정한 후보에게 몰표를 던지는 쪽이 훨씬 이득이 아닐까? 이런 공학이 작동하는 차원에선 '정당정치를 무시한다'는 항변이 의미를 상실한다. 왜냐하면 민주당 전통적 지지층의 입장에선 친노야말로 민주당의 전통을 파괴하고 정당을 장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정당 바깥 대중의 지지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제도(가령 모바일 투표라든지)를 통해 정당을 장악한 사람들이 그 외부여론에 의한 '안철수 열풍'에 대해 '정당정치에 어긋난다'는 항변을 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이렇게 안철수는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층에게 던져진 하나의 기회였고, 그들은 이 기회를 통해 야권 내에서 민주당 안의 친노를 역포위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재의 정치공학적 현실에서 ‘안철수 현상’이 ‘민주당’보다는 차라리 더 실체를 지닌 이유다. 강준만의 안철수 지지, 박선숙의 안철수 캠프 합류, 안철수와 이헌재의 악수 등은 각각의 사건으로도 비평의 가치가 있지만 이러한 조류를 드러내는 단면들이기도 하다. 즉 안철수는 정치 일반에 대해 냉소하는 대중들의 탈정치주의에 부응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야권 전체를 리드할 수 있는 정치공학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안철수 개인의 전략적 탁월함과도 다소 상관이 없는 차원에서 발생하는, 최근 한국 정치의 어떤 구조적 문제의 집적이 만들어낸 묘한 정치공학의 발현이다.

다시, ‘갈등의 정치’냐 ‘통합의 정치’냐

안철수는 손쉽게 ‘갈등의 정치’와 ‘통합의 정치’를 구분한 후 자신을 후자에 위치시켰다. 정치에 대해 제법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들 이러한 시도를 ‘반(反) 정치적’이라 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록 정치가 갈등을 중재하는 기술이라 하더라도 모든 갈등이 생산적인 것은 아니며, 사람들이 염증을 내는 건 바로 그 비생산적인 갈등이었다는 것이다.

가령 정당정치를 옹호하거나 진보정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3김시대의 지역갈등이나 참여정부 시기의 민주vs반민주 갈등이 아니라 사회경제문제나 계급문제를 중심축으로 하는 갈등이 필요하다고 볼 것이다. 지역주의는 물론이거니와 상대방을 친북세력이나 독재세력으로 규정하는 한국적 이념갈등도 다루는 문제에 비해 지나치게 소모적인 갈등을 양산하는 측면이 있다. 예산조율을 하면 될 정도의 문제를 두고 상대방을 ‘빨갱이’라 부르고 ‘독재정권 부역자’라 부르면서 실제로 내세우는 정책들은 비슷비슷한 것이 한국 정치의 ‘갈등’ 구조다.

정치에 제법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기에 앞으로는 갈등축을 제대로 정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의 갈등이 지겨운 이들은 여기서 통합의 수사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안철수의 맥락이, 혹은 강준만의 맥락이 생긴다. 과거 양비론을 택하는 이들을 거세게 비판하던 김대중주의자 강준만이 ‘증오의 시대’를 끝내자고 말하는 역설이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가 처한 위기들, 부동산이나 교육 문제 / 자살 문제 / 노인 문제 등은 좌우파를 떠나서 어느 정도의 정책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임에도 한국 사회에선 그것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문제제기도 가능하다. 그렇게 볼 때엔 단지 탈정치적인 정치혐오의식을 넘어서도 ‘통합의 정치’를 요구하는 맥락이 생긴다. 때와 방식은 다르지만 참여정부 시절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시했던 대연정과 같은 것이, 국민의 8-90%가 지지하는 독일식 연립정권 같은 것이 출범해야 당면한 어려운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해법이 도출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 후보가 모여서 서약을 하자는 안철수의 제안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결국 대선의 3자구도까지 만들어낸 ‘안철수 현상’은 단지 새로운 세대의 미래를 말하는 이들이나 이 현상이 실체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실체적이고 엄중한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가장 정교한 정치공학을 만들어낸 이 탈정치성을, 그리고 이 탈정치성의 이면에 깔린 통합의 정치에 대한 문제제기를 어떤 식으로든 평가해야만 한다. 안철수에 대한 정치평론은 적어도 이 지점을 이끌어내는 차원에서 이르러서야 현실적 문제를 직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직까지 우리들의 논의는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 국민대학교 학생식당에서 안철수 후보를 찍기 위해 몰려든 학생들의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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