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일 대선출마 선언을 하는 안철수 후보의 기자회견장에 이헌재가 와서 안후보와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안철수 원장이 출마선언을 했다. 옆에 보이는 인물들이 인상적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구에 회자가 많이 된 인물이라면 단연 이헌재 전 장관일 것이다. 벌써부터 진보진영 일각에서 이헌재 장관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그는 모피아의 대부이며, 한국경제를 망친 장본인이고, 신자유주의의 전도사이기 때문에 그와 가까이 지내는 안철수 원장에게 우려의 목소리를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어떨까? 우리에게는 상대를 너무 쉽게 평가하고 쉽게 절하하는 습관이 있다.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이라는 구분법에 익숙한 탓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어떤 전술적 차원에서 상대의 정체를 합리적으로 파악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을 이긴다는 말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일단 이헌재가 누구인지부터 짧게 파악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헌재는 누구인가?

이헌재, 대단한 사람이다. 관료들끼리의 말로는, ‘천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헌재일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헌재는 1944년 생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고 경기고를 졸업했다. 본인 스스로는 문제아였던 전교 1등이라고 말을 한다. 서울대 법대에 진학해 1966년에 졸업을 했다. 졸업 후 술을 먹고 돌아다니다 1967년에 운 좋게 부잣집 딸과 결혼을 했고 5개월 만에 행정고시를 봐 수석 합격을 했다.

MB정부의 실세였던 강만수 전 장관과 세간의 시선을 빌어 잠시 비교를 하자면, 이헌재 44년생-강만수 45년생, 이헌재 서울대 법대 66년 졸업-강만수 서울대 법대 69년 졸업, 이헌재 행시 6회-강만수 행시 8회로 비슷한 시기 비슷한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행시 합격 이후에는 다소 경우가 다른 상황을 맞게 됐는데 강만수가 경주세무서장을 하는 동안 이미 이헌재는 남덕우 장관 체제에서 주목을 받고 초고속 승진을 해 행시 1회 출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 이제는 추억의 인물이 된 강만수 전 장관(현재 KDB금융지주 회장)의 모습 ⓒ연합뉴스

금융정책과장 시절에는 그 유명한 8·3 사채동결조치를 입안했고 그 외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79년 소위 ‘율산사건’으로 인해 공직에서 물러났다. 율산사건이란 쉽게 말하면 방만한 기업 경영 때문에 종업원이 7천여 명에 이르고 계열사를 14개 거느리고 있었던 율산그룹이 무너진 사건이었는데 당시 이 분야에 대한 주무 담당자였다는 이유로 이헌재가 책임을 져야 했던 것이다.

그 후 20년 간 본인 말로 소위 ‘야인’ 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녔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며 군부의 영입 제안을 물리쳤고 이 과정에서 김우중 회장을 만나 대우그룹 계열사에서 기업인 생활을 했다. 이후에는 한국신용평가 대표이사를 하기도 하고 증권관리위원회 상임위원을 하기도 했는데 공직에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은 1997년 대선의 결과로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부터다.

구조조정의 전도사 이헌재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의 책임을 박정희 시대로부터 이어진 국가주도수출중심경제체제와 이를 추진하면서 벌어진 정경유착, 이를 통한 재벌들의 방만한 문어발식 기업 확장으로 돌리며 신자유주의적 개혁조치를 적극 도입해 위기를 타개하려고 했다. 이 과정의 집행 책임자로서 영입한 것이 바로 이헌재이다.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경제 상황의 위기를 관리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기구로서 비상경제대책위원회를 만들고 기획단장 자리에 이헌재를 앉힌 것이다.

이때 그를 영입하기 위해 움직였던 사람들의 명단을 보면 익숙한 이름들이 많다. 정운찬 당시 서울대 교수, 유종근 대통령 특보, 그의 동생인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교수가 그에게 자문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접촉했으며, 정인용 전 부총리, 김용환 당시 비상경제대책위원장, 김민석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 등이 그에게 비상경제대책위원회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고 이헌재는 이를 수락했다. 덕분에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새벽 4시 30분에 이헌재의 보고서를 받아보며 기상을 할 수 있었다.

바로 이 때 이헌재가 김대중 정부 시절 노동계를 어려움에 빠지게 만들었던 구조조정의 원칙을 정부가 확립하게 했으며 이후 금감위원장에 내정되면서 실질적인 구조조정 작업을 진두지휘 하게 됐다. 전부 다 망하게 생긴 은행들을 이리 합치고 저리 합쳐 KB금융지주, 우리금융지주, 하나금융지주, 신한금융지주의 기틀을 만든 것도 이헌재이고, 삼성, LG, 대우의 소위 삼각빅딜 논란에서 주요한 실무 책임을 맡았던 것도 이헌재이며, 나중에 론스타 논란까지 이어지는 정책적 흐름의 시작이었던 제일은행 매각을 정리한 것도 이헌재이다.

위기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된 이후 이헌재는 정치적 판단에 따라 정부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유능한 해결사’ 이미지를 쌓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이헌재라는 이름이 가진 진정한 의미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헌재는 모피아인가?

이런 경력을 검토해보면 그가 특정 시기의 한국경제의 핵심적인 정책들을 좌지우지했던 것은 확실했던 것 같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진보진영에서도 그가 모피아의 핵심이기 때문에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도 진지한 검토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흔히 경제관료를 싸잡아서 모피아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모피아는 ‘재무부 출신의 경제관료’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보통 관료사회에서 모피아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선호하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다니는 특성을 가졌던 재무부 패밀리를 비꼬아 부르는 말이었다. 이 말의 의미는 이 패밀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존재했다는 의미인데, 비교적 이상주의적 신자유주의의 관점에서 국가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일찍부터 주장했던 경제기획원 출신의 관료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 작년 1월 10일자 동아일보 8면 기사에 나온 '이피아'와 '모피아'

이 두 파벌들은 경제관료의 역사를 통틀어 시종일관 암투를 벌여왔는데, 남덕우 장관 시절 재무부의 잘나가던 관료였던 이헌재가 79년에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결국 경제기획원 출신들을 꺾고 ‘대세’를 장악했던 강만수와 같은 모피아들은 97년 외환위기의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이후 경제기획원 출신들이 치고 올라올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된 셈이다.

즉, 이헌재는 분류상으로 재무부 출신의 모피아라고 보는 것이 옳으나 초고속 승진을 하여 내부에서 견제를 받아 주위에 인맥을 쌓을 겨를이 없었다는 점과 79년에 비교적 일찍 공직에서 물러났어야 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모피아의 핵심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도 부담감 없이 이헌재를 기용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안철수가 이헌재를 선택한 이유

여기까지 판단해보면 안철수 원장이 이헌재를 선택한 이유가 보다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안철수 원장을 겨냥한 경제정책에 대한 수많은 제안들이 있지만 이미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는 경제를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은 일개 서생들이 가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즉, 정부에서 경제 정책을 다뤄 본 유능하고 노련한 사령탑이 존재하지 않으면 국가적 차원에서의 경제 정책은 수립될 수 없는 지경에 처한다. 이러한 점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헌재 카드는 ‘안철수가 그저 아마추어는 아니었군!’ 이라는 안정적 메시지를 던지는 데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 작년 12월 14일 박태준 명예회장의 빈소를 찾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모습 ⓒ연합뉴스

인적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아도 안철수 원장이 이헌재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미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서 역할을 수행하면서 맺은 인간관계들이 있다. 당시 청와대 공보실에서 일했던 박선숙 전 의원 같은 경우가 그렇고, 참여정부에서 386 출신 청와대 참모 및 의원들과 정면충돌이 일어났을 때 중재를 섰던 이광재 전 지사와 같은 경우가 그렇다. 심지어 이헌재가 참여정부에서 사의를 표명했을 때 집까지 찾아와 그를 설득했던 사람은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이다. 현재 야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대선과 관련한 정치지형의 이런 저런 측면을 따져볼 때 ‘연결고리’가 없는 것은 아닌 셈이다.

이렇게 보면 일각에서 제기되는 ‘이헌재는 보수적 지지층을 안심시키기 위한 얼굴마담일 뿐’이라는 안철수 원장을 위한 변명에 대해서도 제대로 판단해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철수 원장이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을 때 실제 경제 정책 집행의 주도권을 쥐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간에 언급되고 있는 안철수 캠프의 인사 중 이헌재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정치적으로도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는 수많은 연결고리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오히려 안철수 원장이 ‘멘토’로 삼고 있는 개혁적 인사들의 제안이 아이디어 차원에서 받아들여져 진보적 지지층을 향한 얼굴마담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한 것이다.

이헌재 본인도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이미 오래 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위와 같은 상황에 어울리는 언급을 남겼다. “박정희 경제 모델의 시대는 끝났으며 이제부터는 ‘창의경제’가 한국 경제를 이끌게 될 것”이라며 “젊은이들이 창업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을 통해 사회적 기업 등에 대한 정부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안철수 캠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원재 전 한겨레경제연구소장과의 접점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 이 글은 이헌재 본인의 회고록인 <위기를 쏘다(이헌재가 전하는 대한민국 위기 극복 매뉴얼), 이헌재 저, 중앙북스, 2012. 6.> 을 참고하여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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