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만 광주에 있고, 마음은 연일 서울 청계천과 인터넷으로 향해 있다. 오월을 맞는 광주에도 '쇠고기 반란'은 단연 화제다. '반란'이라는 표현은 정부측 시각이지만, 정부가 느꼈을 충격을 감안하면 무리한 단어도 아니겠다. 지난 2004년 '노무현 탄핵 반대' 집회 이후 4년 만에 보는 대규모 촛불의 물결은 반갑다.

정치적 편향의 문제가 아니다. 한나라당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에 제동이 걸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이미 끝난 게임'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이들에겐 일종의 쾌감도 주는 듯하다. 덕분에 정치권의 싸움도 간만에 싸움답게 펼쳐질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 탄핵' 온라인 서명 100만명이 가져온 질적 변화다.

그런데 역사는 묘하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를 돌이켜보면, '격세지감' '새옹지마' 등의 단어가 떠오른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면서도, 다른 한편 어딘지 과거와 뒤바뀐 모습들을 찾는 재미가 있다. 4년 만에 다시 등장한 '대통령 탄핵'이 그렇다. 당시 탄핵하자고 열을 올리던 한나라당이, 이번엔 탄핵 대상쪽에 서 있으니 말이다.

▲ 5월 2일 저녁 서울 청계천 광장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규탄 촛불문화제' ⓒ미디어스 서정은
청계천은 아이러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당시 최고의 치적으로 자랑해 마지 않던 청계천이, 이제 그를 탄핵하자는 목소리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어떤 학자는 이를 '청계천 민주주의'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현실에 적극 개입하는 모습이 관심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중고등학생들이 집단적으로 현실정치에 뛰어든 게 언제였던가.

가장 최근이래야 1989년 전교조 출범 당시 참교육운동일 게다. 그로부터 19년 만에 휴대전화와 인터넷으로 무장한 이들이, 바로 이번 쇠고기 반란의 주역들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0교시, 자립형사립고, 사교육, 우열반' 등 수많은 논란에 휘둘려온 그들은, 자신들의 주식인 학교급식과 햄버거, 라면 등에 대한 위협 앞에서 폭발하고 있다.

음식에 대한 단순한 '동물적 반발'에 그치지 않는다. 나름 논리도 있다. 미디어다음에 '이명박 탄핵 청원'을 처음 제안했던 고등학생은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광우병은 잠복기가 수십 년인데, 지금 광우병 소를 먹고 수십 년 뒤에 병이 나면 이미 죽고 없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어떻게 따지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대입논술이 이렇게 쓰일 줄 어른들은 몰랐을 게다. 한바탕 대통령을 향해 쓴소리를 쏟아 부은 그 학생은, 인터뷰가 끝난 뒤 입시학원으로 총총히 사라진다.

'초딩'으로 치부되던, 초등학생들의 반란도 심상찮다. 역시 대한민국 역사 이래 초등학생들이 현실에 뛰어든 건, 60년 4·19 이후 처음으로 기록될 일이다. 이들의 주요 활동무대는 청와대 홈페이지 '어린이 청와대'이다. 대통령을 향해 '명바기'라며 막말도 불사한다.

"명박씨 난 어린 나이에 미쳐서 죽고 싶지 않아요"라는 글은 점잖은 축에 속한다. 노무현 정권 때 시작된 '전 국민의 놀이'가 떠오를 정도다. 가히 '명바기 놀이' 수준이다.

집권당이나 보수언론 눈에는 걱정스럽고 한심하고 연예인들의 한마디에 휩쓸리는 철없는 짓으로 보일 게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일방통행과 강요된 침묵 속에서 자랄 수 없음에 기대를 건다.

▲ 2013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의 개최지 선정을 위해 국제대학스포츠연맹 실사단이 광주를 찾은 지난 1일 저녁, 이들의 숙소인 광주 무등산 자락 호텔 앞에 광주시내 한 사립여고 1학년 전체 450명 학생들이 환영단으로 동원됐다. ⓒ 광주드림
그런데 간만에 '말 풍년'이 일고 있는 서울이나 인터넷과 달리 광주는 조용하다. 물론 광주에서도 학생들 사이에 문자메시지들이 퍼지고 있긴 하다. 네티즌들은 오는 주말에야 금남로에 모이자고 제안해 놓은 상태다. 서울 첫 촛불집회에 비해 보름 가량이 늦은 셈이다. 서울과 지방의 차이만은 아닌 것 같다.

미디어다음의 토론광장에선 '민주인권의 도시' 광주에서 촛불집회가 타 도시에 비해 늦은 이유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한 네티즌은 이렇게 답했다. "유니버시아드대회 때문에 바빠서"라고. 최근 광주시가 추진 중인 2013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U대회) 유치전을 두고 한 말이다. 뒤늦게 유치경쟁에 뛰어든 광주시는 '시민학생 총동원령'을 비장의 카드로 꺼냈다. 이에 따라 대회 유치 실사단의 환영·환송행사를 위해 광주시내 학생 3만명을 동원하기로 했다. 민선시대 전무한 일이었다. 그러나 학부모단체와 일부 언론이 문제제기에 나섰고, 결국 '동원'에서 '자발적 참여'로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끝내 한 사립여고 1학년 전체 450명이 동원됐다. U대회 유치위원회에 참가하고 있던 이 학교 재단이사장의 '결단' 덕이다. 학생들은 실사단 방문 첫날 저녁 호텔 숙소 앞에 배치됐고, 도로변에 배치돼 있던 어른들 수천 명보다 훨씬 뜨거운 환영열기를 뿜어냈다.

현장에 있던 한 시청 공무원은 "역시 학생들이 있어야 분위기가 산다"라고 흡족해 했다. 서로 얼굴만 마주봐도 마냥 즐거운 세대. 어른들이 원한 건 '통제 가능한' 젊은 그들의 열정이었다. 학생들은 행사가 끝난 뒤 야간 자율학습을 위해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이들 중간고사 1주일 전이었다.

하지만 이튿날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광주에서 찾기 힘들었다. 전국이 '쇠고기 반란'으로 떠들썩할 때, 오월에 접어든 '민주인권의 도시' 광주가 유독 조용했던 배경과 무관치 않다.

광주지역 일간신문 광주드림 행정팀 기자입니다. 기자생활 초기엔 지역 언론에 대한 감시자 역할을 주로 했는데, 당시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많이 절감했구요. 몇 년 전부턴 김광석의 노래가사 중 "인정함이 많을수록 새로움은 점점 더 멀어진다"는 말을 새기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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