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자 조선일보 4면 기사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애국가’ 관련 발언이 또 다시 인터넷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다. 중앙일간지에서도 민주통합당 문재인 의원의 대선 출사표에 맞먹을 정도의 비중으로 보도가 되었고, 인터넷 보수언론에서는 아예 이석기가 문재인을 제끼고 오늘 최고의 화제인물로 부상했다.

이런 화제의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는 흔히 그 정치인의 행동의 ‘의도’를 추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경우 가장 쉬운 추론은 그가 이 논쟁을 의도적으로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 보수언론들은 이석기가 대한민국을 접수하려는 주체사상파의 사상공세를 시작했다 해석하기도 하고, ‘종북주의 논쟁’을 오래 유지하면 할수록 자신을 색깔론의 피해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행동으로 보기도 한다. 전자를 따른다면 한국 보수가 총궐기해서 이석기 및 통합진보당과 싸워야 할 판이고, 후자를 따른다면 이석기의 하고 많은 문제 중에서 종북의 혐의만 부각시키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진보언론에선 전자를 믿는 사람은 없지만 후자처럼 얘기하는 이들은 분명히 있다.

물론 이보다 좀 더 세련된 해석도 있다. 이석기의 발언이 통합진보당의 당권 선거를 앞두고 NL 진영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의도된 거라는 것이다. ‘일꾼’, ‘현장말’ 등 북한 어휘를 사용하고, 애국가의 권위를 부정하는 행동들은 조중동에게는 경악스러운 것이지만 NL 운동권들에겐 공유되는 문화코드이기에, 이런 지점에서 이석기가 격심한 비판을 받는 것은 대중여론에 휩쓸려 자신들을 비토하는 NL후배들에 대한 마지막 호소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에서 모두 공유될 수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석기의 ‘애국가’ 발언 논란이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기획된 것으로 해석하기에는 의문이 가는 부분도 많다. 혹시 우리는 정치인들의 발언에 대해 지나치게 합리적인 해석을 시도하느라 정치의 맨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설명되지 않는 의문점들을 짚어 보자.

첫 번째 의문 : 한겨레·경향 기자는 왜 그 자리에 없었나

먼저 살펴봐야 하는 정황은 해당 자리에 한겨레와 경향신문 기자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석기 의원이 일간지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진 지난 15일, 비례대표 경선 부정 파문에서부터 구당권파를 일관되게 비판해 온 이청호 통합진보당 부산 금정구의원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이석기의 모임을 전했다. 그는 “몇 일전부터 잡혀 있는 일정이었는데, 어제(14일) CNP 검찰 압수 수색도 있었기에 오늘 일정이 취소되지 않을까 했는데 그대로 강행했다”고 전했다. 또 이 의원은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한겨레와 경향은 빠졌고,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에게도 꼭 참석해달라고 했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두 신문사에 확인해본 결과 한 곳에서는 “일괄적으로 연락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한 기자가 연락을 돌리는 경우도 있는데 왜 참석하지 못했는지 사정을 잘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고 다른 한 곳에서는 “사전에 더 중요한 약속이 있었기에 참석하지 못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석기 측이 진보언론의 보도에 불만을 가져 두 신문사를 배제한 것인지, 아니면 모임의 성격 자체가 보수언론 기자들을 달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석기 의원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진보언론 기자는 “불만이 있는 언론사를 부르지 않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석기 측이 그런 식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하더라도 놀랄 이유는 없다”고 평했다.

만일 이석기 측이 한겨레와 경향신문 기자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라면 앞서 말한 세련된 해석을 지지하는 근거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애국가’ 발언에 대해 조중동 측의 비판을 받는 것이 그 의도를 충족하기에 적절한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엔 왜 이석기 측이 이 모임의 발언을 비보도 요청했는지가 잘 설명이 안 된다. 물론 비보도를 요청하더라도 누군가는 보도를 했을 거라고 자신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석기 측이 비보도를 요청했을 경우 그것을 깨뜨리는 것은 한겨레나 경향신문 기자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누군가가 비보도를 깬다면 그 후엔 한겨레나 경향신문 역시 보도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한겨레와 경향신문 기자를 배제하는 것은 사실상 어떠한 정치적 효과도 없다.

따라서 한겨레와 경향신문 기자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어떤 정치적 기획의 결과라기보다는 이석기 측의 단순한 심술의 반영이거나 정말로 몇 가지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 결과로 해석되는 것이 더 타당할 수 있다.

두 번째 의문 : 너무 정제되지 않은 발언의 내용

두 번째로 드는 의문은 이석기의 발언들이 파장을 일으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던졌다고 보기에는 도대체 앞뒤가 들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의 애국가가 국가로서 부적격하다고 주장하거나, 국가라도 모두에게 강요되는 것은 전체주의적 폭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애국가가 법에 의해 규정된 바 없기 때문에 국가가 아니며 아리랑이 국가에 더 가깝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아리랑 역시 법에 의해 국가로 규정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애국가가 법으로 정해진 바 없다고 말할 때 이석기는 국가 규정의 ‘형식’을 문제삼는다. 하지만 뒤이어 “아리랑 정도가 국가로 적합하다 볼 수 있다”고 말할 때 그는 국가의 ‘내용’을 문제삼는다. 물론 이에 대해선 이석기가 “현재의 애국가는 법으로 정해진 바도 없고, 훨씬 국가에 적합한 아리랑을 법으로 지정해 국가로 사용하자”라고 주장한 것이라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할 경우 이 견해는 국가라도 모두에게 강요되는 것은 전체주의적 폭력이라는 그의 합당한 비판에 조화롭지 못하다.

사실 다른 나라의 국가라도 법으로 규정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국가로 사용된 관습으로 따진다면 우리의 애국가는 일종의 국가주의적 폭력으로 인해 다른 나라의 것보다 훨씬 자주 불려왔고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국가로 인지되고 있다. 작곡자가 친일파라는 비판은 국가의 정당성에 결격사유가 될 수 있겠으나, ‘애국가’란 제목과 그 가사의 연원은 임시정부로까지 올라가며 독재정부가 제멋대로 만든 노래라는 이석기의 발언도 근거가 없다. 만일 이석기가 법으로 규정된 것만 국가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는 전체주의적 폭력을 비판하기는커녕 현존하는 국가(國歌)에 대한 규정보다 훨씬 강도 높은 국가(國家)적 통제를 요구하는 것이 된다.

횡설수설은 이것만이 아니다. 보수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석기는 "17대 때 민주노동당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도 13석을 돌파했다"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17대 때 민주노동당은 10석을 얻었다. 돌파한 13은 아마 13석은 아니고 13%를 의미하는 것일 게다. 혹은 19대 때 통합진보당의 성과인 13석과 헷갈리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치밀한 정치적 기획을 실행하는 이의 발언이라기 보다는 그저 술자리 방담으로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세 번째 의문 : 비보도를 위해 노력한 것 같다는 점

마지막 의문은 이석기 의원 측에서 끝까지 비보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노력 자체가 ‘액션’일 수는 있다. 이석기 측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일간지 기자들을 모아놓고 이런 얘기들을 늘어놓으면서 비보도를 유지할 수 있다 믿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합리적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 바라보면 이런 해석은 결과론일 뿐이다. 조중동 측은 흥미롭게도 비보도 요청을 받아들였고 적어도 자신들이 먼저 그것을 깨뜨리지는 않았다. 15일 모임의 발언에 대해 다음날 1면 보도로 치고 나간 것은 한국일보였다.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동아일보 측도 당일 밤늦게까지 기사화를 검토했으나 이석기 측이 계속해서 비보도의 약속을 환기시키며 보도를 막았다고 한다. 그 결과 조중동 측은 한국일보가 먼저 치고 나간 다음 오늘자 신문에서야 이 사실을 보도할 수 있었다.

▲ 오늘자 동아일보 4면 기사

여기서 뒤집어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한국일보만 다른 생각을 품지 않았다면 이 사안은 비보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가령 한국일보가 통합진보당 문제가 색깔론과 종북주의 논쟁으로 번지는 것을 조금 더 경계했다면? 조중동이라도 한 번 비보도를 유지한 사안에 대해 추후 보도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이석기 ‘애국가’ 발언이 보도된 상황은 “당연히 보도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추론을 제기할 수는 없는 잠정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석기가 이 논란을 의도했을 가능성만큼이나, 혹은 그보다는 훨씬 큰 확률로, 그가 이 상황을 통제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정치인의 행동의 의도에 대한 과잉해석은 향후 정국을 전망하는 데에는 유효한 지점이 있다. 실제로 우리는 이 ‘애국가’ 논란이 추후 진행되는 통합진보당 당권선거에서 구당권파의 결집을 가져올 거라고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그와 비슷한 확률로 그전에는 친소관계에 따라 막연히 구당권파에 투표하던 평당원들이 그들로부터 등을 돌릴 가능성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즉 이런 상황을 분석할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설령 정치인이나 조중동의 편집국장이라 할 지라도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종종 그들은 우리가 상황에 무력한 것만큼이나 펼쳐지는 상황에 대해 무력할 것이다.

‘무의미’의 진실이라는 역설

이석기는 그저 자신을 ‘조져대는’ 보수언론 기자들에게 밥 한 끼 사면서 편한 관계를 유지하려 하다가 논란을 하나 더 만들어낸 것일 수가 있다. 이것이 한국적인 인간관계의 풍경일 것이며, 이석기를 포함한 NL운동권들이 PD운동권들보다 사회운동을 할 때 훨씬 더 대중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장점’은 정치라는 특수한 세계에 대한 적절한 경험이 없을 때는 끔찍한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이석기가 시/구의원만 해봤어도 언론과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가졌을 거라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무의미’의 진실이 이석기 정도의 정치 햇병아리 뿐 아니라 소위 ‘거물’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인은 생활인에 비해 자기 행동의 많은 부분을 통제하겠지만, 그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통제되지 않은 우연들이 겹쳤을 때, 우리가 소위 ‘사건’이라 부르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석기의 문제는 그가 치밀하게 정치적 술수를 부리는 ‘꾼’이 아니라 ‘의원님’이 된 후에도 여전히 중소기업 사장의 마인드로 기자들을 대하는 이라는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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