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일 손학규 의원이 세종대왕상 앞에서 대선후보 출마선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통합당 손학규 의원이 14일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지난 12일 김두관 경남지사가 출판기념회를 통해 사실상 출정식을 가진 상황 이후의 일이다. 문재인 고문 역시 17일 서대문 독립공원 앞에서 출정선언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고문 측 역시 출정식 장소로 세종대왕 동상 앞을 탐냈으나, 손학규 의원 측이 선수를 친 후 장소를 변경했다고 한다.

손학규 의원은 본인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민주, 민생, 통합의 적임자라 주장한다. 그는 국민과 소통하는 소통령, 중소기업 살리고 중산층을 넓히는 중통령, 국민통합과 남북대통합을 이루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는데, 여기서 소통령, 중통령, 대통령이란 키워드는 각기 민주, 민생, 통합이란 키워드와 연결된다.

진보정당을 '멘붕'시킨 손학규의 '저녁 있는 삶'

또한 그가 내세운 대선 기치는 ‘함께 잘사는 대한민국’으로, 실천공약으론 ‘진보적 성장’을 통한 ‘완전고용’이 제시됐다. 구체적 공약으로는 2020년까지 70% 이상의 고용률 달성, 사회적 대타협을 통한 노동시간 단축으로 ‘저녁이 있는 삶’ 보장, 비정규직을 위한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준수, 종업원지주제 도입, 0세부터 18세까지 연금을 부으면 정부가 대학등록금이나 창업자금을 지원하는 ‘청춘연금제도’ 도입, 환자의 본인부담 상한제(100만원) 실시, 서울대와 지방국립대 간 공동학위제, 정부 책임형 사립대 도입 등이 제시되었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패배 후 민주당으로 넘어온 전력과 그간의 발언을 통해, 당초 문재인이나 김두관보다 중도보수층 공략에 치중할 것으로 여겨졌던 손학규 의원이었기에 이와 같은 공약은 참신하게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손학규 의원의 대선 기치와 실천공약에서 노동문제의 비중이 높아진 데 대해서는 ‘손낙구의 작품’으로 보는 시선이 많다. 손낙구는 민주노총 정책국장 출신이며, 17대 국회 당시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 보좌관을 역임한 사람이다. 그는 17대 국회 임기가 끝난 이후 나름의 독자행보를 벌였다. 심상정 의원 보좌관 당시 행정부에 요청해 얻은 자료로 <부동산 계급사회>(2008)와 <대한민국 정치 사회지도>(2010) 등의 저술을 후마니타스에서 출판했다. 그런데 ‘정책역량에서 진보진영 내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듣던 그가 작년부터 민주당 손학규 의원의 정책보좌관을 하고 있다.

▲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에서 활동한 손낙구 보좌관은 진보진영의 대표적인 정책통 중 하나였는데, 현재 손학규 의원의 정책보좌관으로 일한다.

손낙구 보좌관을 아는 한 관계자는 “가계의 어려움에 대한 고민으로 그 길을 선택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한 진보정당 관계자 역시 “손낙구 선배가 후마니타스 출판사와 관계를 맺었고 후마니타스 출판사와 인연이 깊은 최장집 교수가 손학규의 후원회장이라는 정도의 관계는 있지만, 민주당에서 하필 손학규 측에 투신한 것 자체에 무슨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는 반대로 손학규 의원 측의 생각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어떤 식의 접촉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왜 손낙구 선배를 받아들였겠는가. 이번의 대선공약과 같은, 진보진영의 노동 쪽 정책공약의 역량을 흡수할 필요성을 느낀 것 아니겠느냐”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러한 설명에선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들이 처한 어려움이 드러난다. 한 진보정당 관계자는 “현재의 구도 자체가 그렇다. 진보정당들은 힘을 잃고, 현장노동자들도 민주당 주자들에게 기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만일 내가 노동자이고 후원금을 낼 수 있다면 나라도 민주당 주자들에게 더 주목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잘 만들어진 노동공약을 내세우는 것은 후보 본인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다른 진보정당 관계자는, “사실 엄청나게 쪽팔린 얘기다. 진보정당 측에서 내세우고 띄웠어야 하는 이슈다. 노동시간 단축을 현장에서도 진보정당에서도 오랫동안 얘기를 했는데, 왜 중심적으로 배치하지 못했나. 내부권력 투쟁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민주노총의 눈치를 본 측면도 있다. 민주노총의 대주주인 금속노조를 보라. 노동시간 단축을 공약으로 내거는 노조위원장은 무조건 낙선한다. 금속노조를 구성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잔업수당과 특근수당을 받지 않으면 자신들의 소득수준을 유지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성을 알면서도 앞에 내세우지 못하고 눈치를 봤던 측면이 있는데, 이것을 손학규가 가져가 버렸다.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다”며 지리멸렬한 진보정당 운동의 상황을 비판했다.

그러나 손학규 의원의 경우 정동영 의원처럼 ‘좌클릭’만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또한 흥미로운 부분이다. 일례로 그는 한미 FTA에 대해서는 원칙적 반대론자라기 보다는 재협상론자에 가깝다. 노동공약 역시 ‘진보적 성장’이란 구호 아래 있는데, 이러한 배치는 “진보도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면 중도층도 진보에게 정권을 맡긴다”는 착상을 기반으로 한다. 말하자면 손학규 의원의 전술은 총선 후 민주당의 노선논쟁에서 문제가 된 ‘좌클릭’vs‘중도공략’을 대립항으로 보고 있지 않는다는 점에 그 탁월함이 있다.

'좌클릭'vs'중도공략'을 뛰어넘는 손학규의 정치전략

가령 문재인 고문의 경우 이명박 정부 기간 동안 훼손된 민주주의의 문제를 지적하고 이를 참여정부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는 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출정식을 하게 된 서대문 독립공원이라는 공간의 상징성도 이러한 이미지를 뒷받침할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당 출신인 손학규보다 진보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민주주의’라는 구호는 ‘저녁이 있는 삶’이란 구호보다 보수적이다. 물론 민주주의는 진보 보수를 떠나 공유해야 하는 문제이긴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현재 한국 사회의 진보적 과제가 그것에 국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라는 구호는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구호에 비해 중도친화적이지도 않다. 현재 중도층은 이명박 정부가 약속했던 경제성장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자신들의 삶을 개선할 다른 방법으로서 복지정책에 주목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컨텐츠의 측면에서는 문재인이 손학규에 대해 좌클릭과 중도공략 모두에서 밀리는 상황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손학규 의원이 문재인 고문과 김두관 지사를 관통하는 ‘PK대망론’의 실체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컨텐츠가 없는 ‘PK대망론’은 수도권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골자다.

▲ 오늘자 경향신문 8면에 실린 손학규 의원 인터뷰

그렇다면 현재 손학규의 전략은 손낙구 등의 진보정당 출신 인사를 활용해 정책의 측면에선 왼쪽을 공략하고 ‘성장 중시’와 ‘행정경험’이란 프레임의 측면에선 중도를 공략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한 진보정당 관계자는 이에 대해 “정책의 좌경화와 프레임의 연성화, 이것이 김대중 시절 민주당을 규정하는 정체성이 아니었나? 손학규가 'DJ 같은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게 전혀 생뚱맞은 얘기는 아닌 거다”라고 평가한다.

한편 손학규를 오래 전부터 경험한 한 기자는 “손학규는 일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경기도지사를 할 때도 의원을 할 때도 기자들에게 평판이 좋았다. 노동공약을 만들려면 제대로 만들 것이고 중도층 공략을 하겠다 하면 그것도 꼼꼼하게 할 것이다. 좌클릭과 중도공략을 대비시키는 게 아니라 본인이 이것도 저것도 잘 할 수 있는 위인이란 걸 강조하려 할 것이다”고 말한다. 진보정당 관계자 역시 “손학규는 '쇼’와 ‘진정성’의 경계를 잘 타는 사람이다. 정동영이 지난 몇 년간 무지막지한 활동으로 진정성을 증명해 왔다면 손학규는 또 다르다. 더 세련되었지만 얄미운 수준은 또 아니다. 가령 눈을 치우기 시작하면 금방 사진이 찍힐 텐데, 찍힌 후에도 몇 시간 정도는 더 치운다. 노조집회에 지지방문을 가면 그냥 가도 되는데 취재기자들을 한 트럭을 싣고 온다. 그럼 본인이 정동영처럼 집회에 헌신하진 않더라도 집회 자체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겠나.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그런 부분에서 평가를 받는 부분이 있다”고 설명한다. 손학규를 아는 복수의 기자들은 이런 식의 행동패턴이 한나라당 시절 민생대장정 때부터 그의 중요한 장점이었다 설명한다.

진보정당의 존립의의와 야권 PK대망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때

물론 손학규의 전략이 좋은 방향으로 잡혔다고 해서 그가 마냥 승승장구할 거라 기대할 수는 없다. 한 기자는 “이미 경기도지사와 의원 시절부터 역량이 뛰어나다는 평이 자자했던 그가 지난 몇 년 간 지지부진했던 걸 보면 대중성의 측면에선 명확한 한계가 있는 것 같다”고 진단한다. 진보정당 관계자 역시 “손학규의 행동은, 손학규 개인을 넘어 현재 민주당이 진보정당의 과제를 잠식하고 있는 차원에서, 진보정당엔 분명한 위협이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문재인이나 김두관을 넘을 수 있을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설명했다. PK대망론에 대한 비판은 타당할지라도, 그 대안으로 겨우 자신이 승리한 분당 보궐선거를 예시로 들어 ‘분당 구도’를 말하는 그의 모습은 아직 대중적인 감각의 차원에선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손학규의 전략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예언하기 위함은 아니다. 손학규가 내세우는 프레임과 정책공약이 독자적 진보정당 운동의 존속의의에 대한 회의를 던지고 있고, ‘민주주의’란 대의와 ‘PK대망론’이란 정치공학에만 갇힌 민주당의 주류 대권전략에 대한 대안책 내지는 수정보완책을 제시한다는 점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그런 점에선, 비록 그를 대선후보로 지지하진 않더라도. 그가 어느 정도는 화제가 되기를 바라야 할 이유가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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