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두환 육사 사열 동영상이 올라오자 사이버스페이스는 발칵 뒤집혔다. ⓒ연합뉴스

국가관 논쟁이 오래 진행되는 것은 소위 진보개혁 세력에게 좋은 상황이 아님이 틀림없다. 그 세력의 지지층은 주로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국가개입의 필요성 때문에 야권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고, 국가관 논쟁을 오래 할수록 이 문제에 관한 논의는 축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현재의 국가관 논쟁이 한국 사회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은 우려되는 부분이다. 이는 이 논쟁 자체가 정치적 적대자들을 손쉽게 매장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일 게다.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과 새누리당은 총선 전부터 하나의 사건을 통해 통합진보당의 정체성을 문제삼은 후, 이를 근거로 야권연대 전체의 정당성을 문제삼는 ‘스리쿠션’ 전략을 취해왔다.

그런데 민주통합당과 한겨레 등의 역공전략, 그리고 북한의 ‘종북 공개 발언’ 으름장에서도 드러났듯이 이 사안은 어느 진영 한쪽에만 적용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는 두 가지 지점에서 그러한데, 첫째는 보수세력 역시 북한이 체제경쟁의 대상이면서 교류협력의 대상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이상 특정 상황에선 ‘친북적인’ 발언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 역시 ‘김정일 개새끼’라고 발화할 수 없고, 방북 상황에서는 모종의 덕담을 나눌 수밖에 없다. 북한의 으름장이 드러내는 부분도 그것일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에 대해 '몸통이 나섰다'고 비꼬았는데, 이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좋은 사람’이니까 ‘나쁜 사람’을 편들어도 외교적 수사일 뿐이고, 너희는 ‘나쁜 사람’이니까 ‘나쁜 사람’을 편들면 ‘나쁜 사람’임을 인증한 것이다”란 수준의 순환논리에 빠져 버린다. 실제로 정치인에게 허용된 적절한 ‘행위’의 기준을 정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사상’을 문제삼은 순간 그들의 문제제기 자체가 처음부터 이러한 순환논리 위에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오늘자 조선일보 1면 팔면봉

둘째는 보수세력 역시 ‘친북’ 못지 않은 아킬레스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친독재’가 그것이고, 전두환의 육사 사열 논란이 보여주는 바다. 공영방송과 보수언론이 이 사건에 침묵하는 이유는 이것이 이슈화하면 할수록 그들에게 불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민주주의’ 자체의 가치에 대해 천착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더라도 제 나라 시민을 대놓고 살해한 이를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은 부담스럽다. 새누리당 내에서도 전두환에 대한 예우는 합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를 피해가는 것은 우리의 국가관 논쟁이 상대방을 정죄하는데 정신이 팔려 근미래도 내다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모순적인 상태로 내버려둬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북한 도발을 비판하면서도 북한과의 교류협력을 추구해야 하는 입장이고, 이 두 가지에 반대표를 던지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런 이견은 그때그때 다수결을 통해 결정되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전두환에 대한 판단의 문제는 결이 다르다. 외교·국방 정책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정책을 결정한 이후에도 이견이 존재하는 상황을 우려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공식적으로 전두환을 어떻게 판단내릴 것인가의 문제는 그 정체성을 규정하는 결정적 순간이라 볼 수 있다. 육사 사열 논란에 분개한 시민들은 전두환을 ‘국헌 문란의 수괴’라 생각했다. 사열을 결정내린 육사 측은 그를 ‘전직 대통령이며 퇴역 장성’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은 상대국을 배려해야 하는 외교적인 문제도 아니며, 공동체가 그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의 문제다. 전두환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훗날 사형을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다시 사면까지 되는 우여곡절을 겪는 상황에서도, 이 사안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재했고 그 합의를 지금도 피하고 있다는 것이 객관적인 현실이다. 지금으로서도 이 사건은 첨예하지만 곧 이보다 더 첨예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가 반으로 쪼개질 것만 같은 진통을 겪게 되는 순간이 온다. 바로 전두환이 사망하는 그 순간이다.

전두환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야 하는가? 유족들이 그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요구할 경우 국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두 질문은 한가한 사고유희가 아니라 멀지 않은 장래에 닥칠 현실적인 문제다. 참고로 기존에 구분되었던 '국장'과 '국민장'은 현재는 2011년 5월 발효된 '국가장법'에서 '국가장'으로 통합된 상태다. 변경된 국가장법 2조를 보면 1. 전직·현직 대통령, 2. 대통령당선인, 3.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 사망한 경우 유족 등의 의견을 고려하여 행정안전부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의 심의를 마친 후 대통령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국가장(國家葬)을 치를 수 있다. 그런데 경제적 예우가 소멸되었을 뿐 1997년 김대중 당선자의 건의로 그가 사면된 후 전두환의 법적인 신분은 전직 대통령이다. 즉 전직 대통령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국가장을 요구할 수 있으며 그 이후엔 사실상 정치적 판단의 문제가 된다. 이승만과 윤보선의 유족의 경우 ‘국민장’ 제의를 거부하고 ‘가족장’을 택했으나 전두환의 경우 개인이 아니라 어떠한 상징이기 때문에 ‘국가장’을 주장하는 이가 나오지 않으란 법이 없다.

'국가장' 문제가 전두환 사후에 대두될 가능성이 큰 이유는 국립묘지 안장문제가 이에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현행법으로 본다면 전직대통령이란 신분만으로 국립묘지에 들어가는 것이 합당하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5조를 보면 대통령직에 있었던 사람은 국립서울현충원이나 국립대전현충원의 안장대상자다. 그러나 올해 2월 개정되고 다음달 1일부터 발효되는 개정안에선, 내란죄나 내란목적 살인죄 등이 국립묘지 안장 불허대상에 포함되게 된다. 현실적으로 두 전직대통령이 이번 달에 사망하지 않는 이상 개정법안에선 그들의 국립묘지 안장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보면 '국가장'을 치른 사람은 자동적으로 국립묘지행이 보장된다. 즉 현실적으로 닥쳐올 상황은 국무회의 심의와 대통령의 결정이 필요한 '국가장' 문제가 사실상 '국립묘지 안장' 문제를 결론내리는 심급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실제로 심각한 정치적 논쟁을 촉발시킬 가능성이 높다.

만약 한국 사회가 이 첨예한 문제에 대한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국가에 대한 존중’ 역시 보편적으로 요구할 수가 없다. 가령 전두환의 장례가 국가장으로 치뤄지고 국립묘지에도 안장되는 쪽으로 이 논쟁이 결론지어진다고 해보자. 만약 그럴 때에 한국 사회의 진보정당이 “전두환이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이 ‘국가’의 국민의례는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이 논리는 진보주의 뿐만이 아니라 ‘어떤 보수주의’의 관점에서도 완벽하게 성립한다. 이 경우 공화국의 이념을 배반한 건 진보정당이 아니라 현존하는 국가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때에도 “친북세력이기에 애국가를 거부한다”고 우길 것인가?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국가관이 전근대적 근왕주의와 다른 무엇이란 점을 증명하려면 결국 이런 문제들을 대면해야 할 것이다. 한가하게 ‘주폭’ 특집이나 하는 동안에도 ‘명부의 시계’는 흐른다. 진보주의자들 역시 이 ‘국가’를 그냥 위에서 뚝 떨어진 폭력적 실체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최소한의 합의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재구축하기 위해서, 장래에 발생할 논쟁에 대한 선행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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