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당권파’들의 생각은 분명하다. 사퇴를 거부한 당선자들이 설사 출당이 되어도, 6월까지만 버티면 전당대회에서 다시 자기들이 당권을 장악하여 얼마든지 복당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다. 그들의 시나리오가 실현되면 이 땅의 진보는 영원히 무덤으로 들어갈 것이다.”
- 진중권, <진보여, 어디로 가는가?> 한겨레 5월 30일

“다시 진보의 고민이 시작되어야 할 지점은 정치공학적인 해결책도, 선거제도의 정비도, 야권연대의 유지도 아니다. 더 이상 특정 세력의 생존이 진보의 전략으로 치환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 이택광, <“고객님, 신제품 할인행사가 있으세요”> 경향신문 6월 1일

위의 칼럼에서 진중권의 현실인식에 동의할지라도 대체 왜 ‘통합진보당의 멸망’을 당연하게도 ‘진보정당 운동의 멸망’, 더 나아가 ‘진보정치의 멸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납득하기 힘들다. 역시, 이택광의 진단에 동의할지라도 ‘통합진보당의 멸망’ 속에서 우리가 무슨 수로 솟아날 구멍을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이미 통합진보당은 진보의 대명사가 되어 있다. 총선 전 진보언론과 지식인들이 ‘진보통합’의 대의를 설파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반대하는 이들은 좌익소아병 환자나 분열주의자가 되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진보당’이란 약칭을 받아들이는 순간 다른 진보정당의 존재는 소거되었다. 곪은 상처를 형형색색 붕대로 덮어두고 그들을 진보의 대명사로 호명했던 이들이 이제 와서 환부의 썩은 냄새에 코를 잡으며 이·김을 준엄하게 비판한다. 민주노동당 분당사태에서 끈덕지게 분당파만을 비판하던 지식인이 “통합진보당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한탄하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을 주장했던 지식인이 “진보신당원들이 그때 따라오지 않아서 정국의 주도권이 유시민에게 갔다”고 한탄한다. 차라리 구당권파만 잘못한 게 아니라고 끈덕지게 우리를 세뇌하려고 하는 한겨레 정치부가 그간에 지켜왔던 일관성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상황은 정확하게 이·김이 진보정치 전체를 인질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 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을 심하게 욕하면 진보정치 전체가 방사피해(splash damage)를 입게 된다는 것, 그것만이 그들에 대한 비판의 자제를 요청할 수 있는 근거다. 이·김이 인질로 잡은 진보정치가 그들이 들이민 과도에 피흘리는 것을 보며 분개하는 것을, 그들은 ‘조중동 프레임’이라 부른다. 남북한 인민을 인질로 잡은 북한정권을 미국에 대항한다는 이유로 옹호하는 것이 그들의 진보이듯, 진보정치와 통합진보당 200만 지지자를 인질로 잡은 그들이 조중동에게 밉보인다고 옹호하는 것이 그들에게 진보여야 한다.

그리고 진보매체들이 일정 부분 그 ‘진보’를 받아들이고 수용한 결과물을 보라.

“민주노동당의 진성당원제는 못된 정파적인 제도였고, 진성당원제의 모범은 아니었다고 본다. 오더 때려서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1만2천표 얻게 하는 게 무슨 진성당원제냐.”
- 유시민의 5월 31일 한겨레 인터뷰

“진보당은 검찰 수사가 회계 부정사건으로 불똥이 튈까 우려하는 분위기다. 진보당은 검찰이 압수해간 하드디스크 자료에 당내 회계 기록이 일부 들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검찰은 이번 진보당 비례대표 경선도 CNP측이 여론조사를 담당한 만큼 수사상 필요할 경우에는 금전 거래 내역 등을 확인해볼 수 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세금이 특정 계파 배불리기에 전횡됐다는 사실이 확인될 경우 진보당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진보당은 2000년 민노당 창당 이후 300억원 가까운 국고보조금을 받아 당을 운영해왔다.”
- 오늘자 조선일보 4면 <진보당 국고보조금 年30억… 유시민 "투명하게 집행되지 않았다">

▲ 오늘자 조선일보 4면

민주노동당 12년 역사가 통째로 구당권파의 것으로 넘어가 잘못된 진성당원제와 회계부정으로 얼룩졌다. 그 자체로 인권침해이며 향후 발생할 인권침해의 크기를 상상하기도 힘든 당원명부 압수에 대한 통합진보당원들의 저항도 회계부정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한 마피아들의 발악이 되었다. 진성당원제는 정치개혁의 유효한 수단이 아니라 진보정당만이 고수하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고, 대의원들이 표찰을 들고 표결하는 행위는 조선노동당의 관습을 따라한 것이 되었다. 굳이 ‘종북’ 문제까지 안 가더라도 민주노동당사는 이미 CNP 사장 이석기가 국고보조금을 삥땅친 역사로 전락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사 자체가 이석기를 위한 대국가·대국민 사기극이 된 것이다.

물론 사실이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통합진보당의 문제를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이어진 것’이라 정리하는 것은 대체로 진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부의 문제제기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이에 절망하고 이탈한 이들을 비판·조롱하던 언론과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이렇게 백일하에 드러나면 조소의 대상이 될 문제들을 진보정당 운동이나 노동자 계급의 ‘대의’를 내세워 외면·은폐해왔다. 그러던 이들이 오늘날 갑자기 비분강개하여 통합진보당을 비판하거나, 그 당을 진보정치의 ‘낙동강 방어선’으로 상정하고 진보시즌2를 외치거나, 아니면 차라리 솔직하게 그간 하던 짓을 계속 하고 있다. 한겨레 지면에다 대고 ‘아큐파이 통진당’에 진보신당원과 녹색당원이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지식인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그는 애초에 진보정당 운동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고, 그보다 훨씬 관심이 많았다고 자처하는 이들도 군소정당원들을 자기 주머니에 들어 있는 패물로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조소를 견뎌내며 밖에 나간 사람들이 받는 방사피해도 누적된다. 한 진보신당 관계자는 “진보언론과 지식인들이 통합진보당의 위기를 진보진영 전체의 위기로 몰아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다. 그러나 현재 통합진보당의 침몰이 진보진영 전체의 몰락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라며 고충을 설명했다. “만일 우리가 대안세력이라고 받아들여진다면 반사이익이라도 있어야 하겠지만 모두 예측하다시피 그런 것은 없다. 어차피 북한에 비판적인 야권세력의 이미지는 안철수가 다 가져간다. 진보신당이 이 사태를 통해 얻은 건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을 구별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이 당사에 건 항의전화, 그리고 번지수를 잘못 찾아 우리 당에 도착한 무수한 통합진보당 탈당계 뿐이다”라며 씁쓸해 했다. 그 관계자는 “연립정부론과 무원칙한 야권연대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지만 기자가 “야권연대를 원칙있게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연립정부론이 없었거나, 야권연대를 다르게 했거나, 혹은 아예 야권연대를 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달랐을까?”라고 묻자 말을 잇지 못했다.

주어진 상황이 엄혹한 것은 분명하고 통합진보당을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공허한 만큼이나 진보신당에 힘을 실어야 한다거나 아예 새로운 운동을 하자는 말 역시 공허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날 진보정치·진보정당 운동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된 이유 중 큰 부분이 진보언론과 지식인의 무원칙하고 정치공학에 휩쓸리는 태도에 있었다는 것이다. 강기갑은 큰 절이라도 하지만, 언론과 매체에서 이 문제에 대해 자성하는 태도를 찾기는 힘들다. 오히려 보수언론과 보수정당의 관계보다 훨씬 가까운 진보진영 내 ‘커넥션’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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