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호 MBC 기자회장이 30일 인사위원회에서 두 번째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미디어스>는 MBC노동조합의 동의를 얻어 박성호 기자가 두 번째 해고를 맞아 쓴 편지 전문을 게재합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가족입니다. 무슨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해고 결정 소식을 접한 시각, 장인어른의 암수술이 잘 끝났다는 소식도 함께 들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다행입니다. 아내가 병원에 붙어있는 동안 저는 두 아이의 하교와 식사를 챙기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결과를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아내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당신이 대세야. 언젠가 복귀될 텐데 긴 휴가라 생각해. 측은한 건 그들이야. 맘 편히 가지자.”

▲ ⓒMBC 뉴스투데이 화면 캡처
지난주 인사위 회부 이후 많은 분들이 해고를 기정사실화했지만, 저는 속으로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회사가 내세운 사유로는 제가 17년간 열정을 바쳐온 일자리를 잃게 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석 달 사이 두 번의 해고라는 기록이 MBC는 고사하고 국내에 선례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해고에서 정직 6개월로 감경됐으니 얌전히 몸 사릴 것이지, 왜 혼자 앞장서 계속 총대를 멨냐는 타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간의 현실은 끊임없이 기자들로 하여금 울분을 토로할 수밖에 없게 했고, 직능단체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계약직 기자, 시용 기자 투입. 이에 대한 반대는 파업에 불참중인 논설위원 선배들까지 가세하신, 파업 투쟁과는 차원이 다른 본질적인 저항이었습니다. 저를 해고시키는데 앞장서신 권재홍 선배께 묻습니다. 성명서를 내도 대답 없는 메아리였고 농성을 해도 자리를 피하셨고, 그래서 뉴스 하러 들어가시는 복도에 서서 피 터지는 심정으로 구호를 외쳤습니다. 무시하셨습니다. 문제의 5월 16일 밤엔 기자총회를 못하게 보도국을 철문으로 봉쇄하셨죠. 슬펐고 답답했습니다. 어딜 가면 뵐 수 있나 동선마다 기다렸지만 피하셨고 그래서 기다리다 퇴근하실 때 몰려갔습니다. 기자들에게서 구호가 끊임없이 나온 건 당연했습니다. 처음에 눈 부릅뜨고 앞에 서서 권 선배를 가로막았을 때 저 역시 머리와 가슴이 아팠습니다. 인간적으로 괴로웠습니다. 선배는 지금 괴로우실까요? 뉴스 진행을 3시간도 남겨놓지 않으셨을 텐데. 저한테서 배신감을 느끼셨다면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저와 제 가족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시는 겁니까? 후배들은 힘이 없습니다. 시용기자 채용을 막을 수도 없었고 막지도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피켓 들고 항의나 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저항하면 해고당하는 곳이 MBC입니까? 물리적 타격만이 폭력은 아닙니다.

저는 이번 해고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에 대한 회사의 대응이 과연 제 행위에 비례하는 상당한 것이었는지,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기본권을 회사의 사규로 짓밟아 버린 건 아닌지 시민의 입장과 헌법적 견지에서 답을 찾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절차를 밟아 제자리로 돌아오겠습니다. 꼭 돌아오겠습니다.

저는 화가 많이 나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오늘을 잊지 않고, 이런 상황을 주도한 이들을 끝까지 응징하고픈 마음이 앞섭니다. 그런데 그들을 평생 미워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미워할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니고 지금은 생각이 달라 대결하고 있지만, 언젠가 그들과 눈물로라도 화해할 수 있겠지 하는 어리석다면 어리석은 믿음이 제 마음 한 구석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누군가를 미워하면 마음이 불편해서 혼자 삭이고 푸는 편입니다. 그런 내가 누군가를 오래도록 증오하며 살아야 한다면 결국은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며칠 잠을 설쳤습니다. 결국 증오와 복수심이 늘 한 켠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제가 바라는 인생은 아닙니다. 저는 투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합니다.

“꼭 돌아오자. 꺾이지 말자. 불의에 무릎 꿇지 말자. 하지만 나는 비록 오늘 증오의 칼을 내리치는 그들에게 목을 내놓지만,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지는 말자. 애써 용서할 필요는 없어도, 증오의 감정을 유지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오로지 이기는 데만 집중하자. 그래서 훗날 ‘정의의 구현’과 ‘증오의 칼춤’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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