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과 나라가
夷狄(이적, 일제를 말함)에 팔리우고
國祠(국사, 국가의 제사)에 邪神(사신, 요사스런 신)이
傲然(오연)히(거만하게) 앉은지
죽엄보다 어두운
嗚呼(오호) 三十六年(삼십육년) !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燦爛(찬란)히 돌아오시니!

허울 벗기우고
외오(잘못) 돌아섰던
山(산)하! 이제 바로 돌아지라.
자휘(자리) 잃었던 물
옛 자리로 새소리 흘리어라.
어제 하늘이 아니어니
새론 해가 오르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燦爛(찬란)히 돌아오시니!

밭이랑 문희우고(무너지고)
곡식 앗어가고
이바지 하올 가음(감, 예를 들면 옷감) 마자 없어
錦衣(금의, 비단옷)는 커니와
戰塵(전진, 전쟁터의 먼지) 떨리지 않은
戎衣(융의, 군복의 한 가지) 그대로 뵈일 밖에!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燦爛(찬란)히 돌아오시니!

사오나온(사나운) 말굽에
일가 친척 흐터지고
늙으신 어버이, 어린 오누이
낯 서라 흙에 이름 없이 굴으는 白骨(백골)!

상긔(상기, 아직) 불현듯 기달리는 마을마다
그대 어이 꽃을 밟으시리
가시덤불, 눈물로 헤치시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燦爛(찬란)히 돌아오시니!

‘그대들 돌아오시니’라는 정지용 시인의 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로 시작하는 대중가요 ‘향수’를 쓴 시인. 그를 빼놓고 한국 현대시문학사를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은 곧 정지용 시인의 문학사적 위치를 말해주는 것이다.

▲ 정지용 선생의 캐릭터 ⓒ옥천신문
문장지를 통해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등 청록파 시인을 추천해 문단에 데뷔시켰고, 당대 시인이나 문학 지망생들의 정신적 지주 구실을 했다. 서정주나 이상, 윤동주 시인 등에 끼친 영향이나 문학정신 맥락을 보면 더욱 선명해진다.

그는 그야말로 우리 문학을 더욱 살찌게 하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정지용 시인은 함축된 시어를 통해 풍경을 연상하게 하는 시를 썼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이다.

그런데 위의 시는 평소 절제된 언어와 가다듬은 말로 함축미를 뽐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지용 시인의 시로 보이지 않는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역사적 격변기를 맞아 시적 파탄을 빚는 시’(유성호, 정지용의 이른바 종교시편의 의미)이라고 평가했고, 어떤 이는 ‘감격에 들떠 감출 것도 걸릴 것도 없습니다. 시적 기교를 부릴 필요도 없고 그럴 만큼 한가한 때도 아닙니다. 전 인민이 해방의 기쁨 만끽하며 새로운 나라 세우기의 방향 찾기에 고심하고 있을 이 시기에도 사상과 감정을 배제한 시를 쓰고 있어야 할 것인가, 정지용의 답은 ‘아니다’였습니다.’(김성장, 김성장의 함께 읽는 정지용, 옥천신문 연재)라고 평가했다.

둘의 평가가 다른 것이야 내 뭐라 할 바는 아니고, 다만 나는 정지용 시인이 발표한 ‘그대들 돌아오시니’라는 시가 발표된 공간을 들춰보기 위함이다.

정지용 시인은 일제말 문인들에게 친일행위를 강요하는 상황이 되어서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 1942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국민문학에 발표한 ‘이토’라는 시가 친일시 논란을 벌이기도 했으나 친일시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 상황이다. 정지용은 이 시를 끝으로 붓을 꺾었다. 붓을 꺾음으로써 일제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방식으로 항거한 셈이다.

어찌됐든 ‘그대들 돌아오시니’라는 시는 해방을 맞은 후 1945년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된 혁명동지회가 1945년 12월25일 인쇄하고 1946년 1월1일자로 발행한 ‘혁명’ 잡지에 실렸다.

이 시는 일제하 36년 동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헐벗음과 굶주림을 참아가며 변절하지 않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쳐온 김구 선생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을 환영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헌시이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이 혁명 잡지에 몽양 여운형 선생과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청산면 출신 조동호 선생의 논설도 함께 실려 있다는 것이다. 혁명 잡지에는 김구, 이승만, 여운형, 박헌영 등 당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의 축사가 실렸고,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지난 2005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유정 조동호 선생은 ‘조선혁명의 현단계’라는 논설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숙한 나라를 건설해야 함을 역설했다.

혁명 잡지에 나란히 글이 실린 두 사람의 거두.

한 사람은 한국 시문학계의 거두였고, 한 사람은 해방을 앞두고 일제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은 독립운동의 거두 조동호 선생이었으니,두 사람은 잡지를 내는 과정에서 한 번이라도 만나서 정담을 나누지는 않았을까? 1892년생인 조동호 선생과 1902년생인 정지용 시인과의 연배는 10살 차이였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만은 똑같았으리라.

▲ 2012년 5월, 지용제를 찾은 학생들이 정지용 인형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옥천신문
지난 5월11일부터 3일 동안 옥천읍 하계리 정지용 생가와 관성회관 등 옥천읍 일원에서는 스물 다섯 번째 지용제가 열렸다. 정지용 시인의 시정신을 기리고 문향 옥천을 더욱 알리기 위한 지용제는 월북시인으로 낙인찍혀 그의 작품을 보지 못한 이후 근 40년만인 1988년 시작되었다. 그를 읽는 것이 풀린 덕분이었다.

해금되자마자 정지용 시인을 추앙하는 문학인들은 지용회를 결성하고, 시인을 기리기 위한 지용제를 서울에서 처음 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애초 서울에서 개최했던 것을 그의 고향에서 해야 한다며 옥천으로 끌고 내려온 이가 지용제를 처음 문학축제로 발돋움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박효근 전 옥천문화원장이다.

지용제는 해마다 많은 고민 끝에 개최된다. 그중 가장 큰 고민은 바로 관중 동원 문제다.

지용제가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가졌다고 해도 단지 문학을 좋아하고 시를 흥얼거릴 사람들만의 축제가 되어서는 대중 문화축제로 설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문학축제만의 한계가 분명한 부분인데, 지용제 역시 문학축제로서의 전형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처음부터 그랬다. 정지용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전혀 알지도, 관심도 없는 상황에서 시작된 문학축제인지라, 일부 문학인들의 잔치로 매도되기 일쑤였다.

지금이야 스물다섯 번을 해오면서 일반 주민들에게도 많이 알려졌으나 여전히 축제의 본질인 문학관련 프로그램은 썰렁한 반면 인기가수가 동원되거나 노래자랑에는 많은 주민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한다. 지난해 위생 문제나 소음 등의 민원 때문에 하지 않았던 야시장 개설 문제도 본질적으로 같은 맥락에서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올해 역시 지용제 행사 후 똑같은 지적들이 나왔다. 문학축제의 본질과 정체성을 감안하는 계획을 짜야 한다는 주문도 나오고 있다.

옳은 얘기다. 그러나 현실은 또 현실이다.

독립운동가이면서 일제하인 1930년대 여운형 선생을 사장으로 내세워 조선중앙일보를 운영했던 언론인 조동호 선생이 유족들의 간곡한 노력에도 아직도 널리 알려지기엔 역부족인 상황임을 감안할 때, 혁명 잡지에 함께 이름을 올렸던 정지용 시인은 그보다는 훨씬 많은 관심과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지 않은가.

두 분을 비교하자는 얘기는 아니니 괜한 오해는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정지용 시인을 기리는 일. 일반 주민 참여 수가 부족하고, 프로그램의 다양성이 떨어지고, 우리 고장 전체 주민의 축제로 만드는 일이 어렵더라도, 이제 또다시 머리를 맞대 고민하고 무언가를 만들어가면서 일궈내야 한다는 것이다.

옥천 출신 두 분 선각자가 해방 공간에서 ‘혁명’이란 잡지를 통해 그 정신적 공감을 이루었듯이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 지금부터라도 노력을 기울인다면 성과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싶다.

각자 가슴속에 커다란 소우주를 품고서 ‘소통’하고 ‘공유’하고 싶어합니다. 그 소통과 공유를 바탕으로 연대의 틀을 마련하여 이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바꾸고자 합니다. 이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의 필요성은 두말 할 나위가 없겠죠. ‘작은 언론’입니다. 지역 주민들의 세세한 소식, 아름다운 이야기, 변화에 대한 갈망 등을 귀담아 들으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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