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신문에서 조중동은 일제히 ‘김용민 막말’ 파문을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3면에 보도한 후 사설에서 비판했고, 중앙일보는 1면과 5면에 보도한 후 역시 사설을 실었으며, 동아일보는 1면과 4면에 보도 후 사설을 썼다. 그런데 시점이 미심쩍다. 이미 김용민이 3일 오후 트위터에서 사과한 사안을 4일에는 보도하지 않고 오늘에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 오늘자 중앙일보 1면. 흐름을 보면 4일자 신문에서 충분히 보도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물론 4일에 보도하지 않고 5일에 보도한 것 자체가 그렇게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경향신문의 경우 이 사건을 4일 5면에서 보도했지만 한겨레와 한국일보의 경우도 오늘자 신문에 각기 5면·6면에 보도했다. 경향신문의 경우 인터넷상의 논란 및 비판을 기민하게 수용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지점이 있지만, 나머지 신문들의 경우 이 사건이 어느 정도 파장을 가져올지에 대해 ‘간을 보았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수비’의 위치에 처하게 되는 반면 조중동은 ‘공세’에 들어가게 되는 사건이다. 차라리 한겨레나 경향신문이 하루 정도 ‘간을 보는’ 상황은 이해가 가지만 조중동이 곧바로 ‘받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가령 KBS 새노조가 총리실 입수 문건을 공개했을 때 그 공개시간이 저녁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다음날 곧바로 1면 톱과 사설로 '공세‘를 펼쳤고 조중동은 침묵하다가 그 다음날부터 보도를 받기 시작했다. 왜 이번 사건에서는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먼저 가설들을 제기하기 전에 가치평가부터 말하겠다. 기자는 김용민의 막말이 용납하기 어려운 수준이라 생각한다. 비록 그것이 관타나모 사건에 대한 논평이라 하더라도, 연쇄살인마를 풀어 미국 정치인들을 강간하고 죽여야 한다는 얘기를 범상하게 들을 수는 없다. 이것은 음담패설이나 비속어의 문제가 아니라 폭력의 문제인 것이다.

물론 “개그를 다큐로 받는다”는 지적도 있으며 옹호자들은 비교판단의 준거로 욕설이 자주 등장하는 코미디 애니매이션 시리즈인 '사우스파크'나 미국의 장수 예능프로그램 'SNL'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SNL의 경우 그런 종류의 욕설을 한다고 보기 어렵고 사우스파크의 경우 ‘강간’이란 말이 코드화 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사우스파크를 존중하는 것처럼 김용민이 나왔던 프로그램의 컨셉을 존중해달라고 말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런 식으로 ‘장르’를 존중해달라고 말하려면 ‘정치’란 장르의 문법도 존중해야 한다. 사우스파크는 픽션이고 애니매이션이지만 김용민은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발언에 대한 책임이 훨씬 더 엄중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만일 김용민이 영화에 출연해서 그런 대사를 읊었다 하여 사람들이 이토록 흥분했을리는 만무하다. 그 발언에 베인 김용민의 세계관에 경악을 했기 때문에 비판도 있는 것이다.

아마 김용민을 옹호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잘못은 잘못대로 인정하되 오래 전의 발언이었고 지금은 그런 종류의 인권감수성을 많이 개발했으며 더 배워나가는 중이라고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최초의 문제제기에 대한 김용민의 반응은 이 옹호논리를 성립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어쨌든 이 글은 김용민이 사퇴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논하기 위한 글이 아니니 가치평가는 이 정도에서 끝내겠다.

조중동은 왜 4일자 신문에서 김용민에게 공세를 펼치지 않았을까? 복수의 신문기자들에게 물어본 결과 몇 가지 가설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을 모아보면 크게 두 가지 의견이 된다.

첫 번째 가설은 애초에 김용민의 ‘막말’이 지면에 싣고 비판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었는데, 장진수에게 건네진 ‘관봉’ 돈다발 논란을 막기 위해 기사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의 이슈흐름을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 오늘자 조선일보 사설의 “이 밖에도 여성의 신체 부위를 쌍소리로 들먹여가며 늘어놓은 온갖 욕설은 차마 글로 옮길 수가 없다”는 문장을 보면 보수언론이 이 사건의 기사화에 느꼈을 저항감도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러나 이 가설은 조중동이 한 몸이 된 듯 어제는 침묵했다가 오늘에야 대대적인 보도를 한 상황을 설명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다.

▲ 오늘자 조선일보 사설

두 번째 가설은 조중동의 세계관 및 정치감각으로 볼 때, 김용민의 성폭력적·성적 비하 발언들은 그를 공격하기에 효과적인 방책이 아니라고 판단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판단이 바뀐 이유는 김용민의 ‘노인 폄하’ 발언이 추가적으로 공개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강간’에 대한 무감각이나 대응폭력에 대한 추앙 등은 한국 사회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다. 결국 기존에 나온 김용민의 막말은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선 그저 눈살을 찌푸리게 할 욕설이나 비속어 논란일 뿐 폭력의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그 정치적 효과도 제한적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노인 폄하’ 발언의 경우 2004년 총선 당시 정동영 발언을 물고 늘어져 쏠쏠한 효과를 본 만큼 기존 지지층 결집과 중도층 공략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다시 김용민의 ‘막말’들을 가치평가해본다면 ‘강간’ 발언이나 ‘미군살해’ 발언이 “엘리베이터 없애서 노인들 시위 못오게 해야 한다”는 발언보다 훨씬 더 비윤리적이라는 게 기자의 판단이다. 후자 역시 문제가 되지만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정치적 의견의 표출에 관대하지 않은 정서 정도를 드러낼 뿐이다. 이 문제 역시 모든 정치세력에 공히 발견되는데, 그것을 ‘노인 폄하’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지도 의문이 든다. 그러나 조중동에게는 윤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 효과의 측면에서 다르게 생각될 여지가 있었다는 게 이 가설의 주장이다.

▲ 오늘자 조선일보 3면. '노인 폄하' 발언이 메인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가설은 조선일보 3면을 설명하는데는 무척이나 유용하다. 그러나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보도도 그런 판단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속단하기 힘들다. 결국 가장 진실에 가까운 해석은 위 두 가지 가설 및 다른 사정들이 제각각 적당히 작용하여 조중동이 ‘김용민 막말’을 어제가 아닌 오늘 보도하게 되었다는 것일 게다. 그러나 명확한 진실에 대한 판단 여부와는 별개로, 보수세력이 ‘강간’보다 ‘노인 폄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해석이 가능한 한국 사회의 현실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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