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혜인 기자] “모든 게 버겁다” 지난 1월 30일 사망한 이힘찬 스튜디오S 프로듀서가 스스로에게 보낸 마지막 SNS 메시지다. 그의 침대 머리맡에는 제작 중이던 드라마 <소방서 옆 경찰서>의 ‘CG 우선 요청 리스트’가 놓여 있었다.

3일 고 이힘찬 프로듀서의 유가족과 전국언론노동조합 등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SBS와 자회사 스튜디오S에 ‘노사공동 조사위원회’ 구성을 촉구했다. 유가족은 SBS에 오는 8일까지 답변을 줄 것을 요구했다.

고 이힘찬 프로듀서가 카카오톡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남겨놓은 마지막 문구. 유족의 동의를 얻어 공개합니다. (자료제공=유족)

이 프로듀서의 동생 이희 씨는 “입사 이력서에 붙여진 증명사진이 10년의 세월이 흘러 영정이 돼 갑작스레 가족 품에 돌아왔다”며 “형은 과중한 업무를 버티지 못해 촬영이 있던 1월 30일 아침, 자신을 짓누르던 모든 짐을 내려놓고 떠나갔다”고 입을 열었다.

이 프로듀서는 2012년 4월 SBS 제작팀에 입사해 10년간 SBS에서 일했다. 2017년 드라마운영팀으로 전보돼 프로듀서로 직을 변경한 뒤 2020년 드라마본부가 분사에 따라 스튜디오S로 전적했다. 이 프로듀서는 2018년 <사의 찬미>, 2019년 <초면에 사랑합니다>, 2020년 <아무도 모른다> 제작에 참여했다.

이 프로듀서는 연출과 함께 프로그램 제작 전반의 과정을 관리·감독하는 제작부의 수장으로 연출·조연출과 협의해 드라마 예산과 스케줄을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4월 방영 예정인 드라마 <소방서 옆 경찰서> 촬영이 시작된 지 20여 일이 지난 시점에 사망했다. <소방서 옆 경찰서>는 SBS가 OTT 사업자 한 곳과 계약 검토중인 작품으로 극 특성상 화재 촬영 장면이 많았다. 고인의 머리맡에는 '화재 촬영 및 CG 작업 일지'가 놓여 있었다. (▶관련기사 : SBS 드라마 PD, 극단적 선택…"방송환경 바뀌지 않아")

지난달 11일 유가족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전국언론노동조합(이하 언론노조),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등과 함께 공동대책모임을 꾸렸다. 같은 달 18일 스튜디오S와 1차 공식 면담이 열렸다. 유가족은 사측(SBS·스튜디오S)의 조사결과를 청취하고 SBS가 참여하는 ‘노사공동 조사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이후 유가족은 언론노조 SBS본부와 함께 ‘노사공동 조사위원회’ 구성을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했으나 사측은 참여를 거부했다. SBS는 유가족에 '고인은 자회사 직원으로 SBS가 공동조사위에 들어갈 수 없다'고 통보했다. 스튜디오S는 '유가족과 사측이 성실하게 논의할 수 있지만 노조가 참여하는 건 안 된다'고 했다. 이에 유가족은 언론노조 SBS본부와 공동대책위를 구성하고 공개적인 대응에 나섰다.

3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스튜디오S 고 이힘찬 드라마 프로듀서 사망 사건에 대한 유가족 및 대책위 입장 발표 기자회견' (사진=미디어스)

"SBS '프로듀서 일 원래 그렇다' 말해… 유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

유가족에 따르면 스튜디오S가 제시한 조사 자료는 이 프로듀서 주변 동료들의 인터뷰 내용이다. 유가족은 동료들의 증언에서 고인이 평소 업무와 관련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희 씨는 “사측은 유족과의 공식 자리에서 사과보다는 ‘프로듀서가 힘들다 토로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어서 눈치 채지 못했다’, ‘프로듀서 일이 원래 그렇다’고 말했다"며 "유족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고 했다.

이희 씨는 “유족 입장에서 건강하던 형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다”며 “객관적 조사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노사공동 위원회를 꾸려야 할 텐데 사측이 유족의 요구를 모두 거부한 상태”라고 토로했다. 이희 씨는 “사측이 별도로 연락해 온 것은 퇴직금 정산과 관련한 연락뿐”이라고 덧붙였다.

이희 씨는 “남은 이들이 드라마 현장에서 대중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 제작을 이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면서 “사측은 객관적 조사가 완료될 수 있도록 ‘노사공동 조사위원회’ 구성과 참여 요청을 수용해달라”고 촉구했다.

드라마 제작 현장 '구조적 문제' 원인… "사회적 타살 가능성 배제할 수 없어"

윤창현 언론노조 위원장은 유가족에 고개를 숙인 뒤 “또다시 방송제작 현장에서 한 사람의 젊은 청년 노동자를 잃을 수밖에 없는 2022년의 현실이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파악한 바로는 고인의 선택 배경에 드라마 제작 현장의 구조적인 문제가 얽혀 있다"며 "구조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회적 타살 혐의를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윤창현 위원장은 “고인이 우리 곁을 떠난 지 한 달이 훌쩍 지난 시점에서 더 이상 비공개 대응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불가피하게 공동대책위 체제로 전환했다”며 “SBS는 지금이라도 적극적인 진상규명 노력에 동참해달라”고 요구했다.

김유경 돌꽃 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는 “2017년 고 이한빛PD가 안타까운 죽음을 택했다. 당시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는 보고서를 통해 무수한 방송제작 현장 노동자들을 바라보게 됐다"며 "하지만 CJB 청주방송 이재학PD 사망사건이 발생했고, 2년 뒤 이 같은 일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김유경 노무사는 “왜 항상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자들이 모든 고통을 떠안아야 하는지, 스스로 모든 것을 밝히기 위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방송국은 항상 '방송바닥은 원래 그렇다'며 모든 책임을 다했다고 하는지 묻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영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센터장은 “고인이 남긴 업무용 노트북에는 턱없이 부족한 예산을 어떻게 확보할지, 추가 인력이 없는 상태에서 제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등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부분이 남아 있다”며 “고인이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런 죽음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공동대책위는 SBS가 오는 8일까지 공동조사를 거부할 경우 이 프로듀서의 생전 업무 범위, 업무 분담과 제작 시스템, OTT 시장의 구조적 문제 등을 밝혀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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