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quence #1. 병원 가는 걸 무지하게 싫어하는 한 남자. 그 남자의 과거는?

종합병원 1층 수술실에서 태어난 덕분인지, 태생적으로 병원이 싫었다. 7살 때인가 뼈에 금이 갔을 때도 병원보다 용하다는 접골원을 찾았고, 공을 차다 인대가 끊어져도 한의원에서 침 몇 번 맞으면 툭툭 털고 일어났다.

▲ 영화 식코(Sicko) 포스터
초등학교 5학년, 동네 아줌마들과의 수다에 혹한 엄마가 "우리 아들 하루라도 어릴 때 해줘야 좋다"며 멀리 봉천동의 한 외과로 데려가 (동네 아줌마들의 평에 의하면) 포경수술의 최고 권위자라는 나이 지긋한 원장 손에 내 물건을 맡길 때는 정말 끔찍했다. 수술이 끝난 원장이 엄마를 수술실로 부르며 건넨 첫 마디는 "아주 예쁘게 잘 됐습니다"였다. 진정 권위자스런 발언이 아닐 수 없었고, 유감스럽게도 머리가 굵어진 후에야 "아주 예쁘다"고 순진하게 믿었던 자신을 자책했다.

중학교 때는 우연히 받은 피검사에서 백혈구 수치가 적다는 이유로 젊은 여의사의 "백혈병이 의심된다"는 오판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무시무시한 골수검사를 받을 뻔 했고, 과민성 비염으로 중고등학교 시절 이비인후과에 출퇴근하며 엉덩이에 멍 자국이 가시지 않을 정도로 주사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차도가 없자, 결국 수술에 재수술까지 받아도 상태는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의사의 결론은 놀랍게도 "과민성 비염은 청정지역에서 살지 않는 한 완치될 수 없다"였다.

숨기고 싶은 과거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잠시 비행(?)을 저지르다 앞니가 부러져 임플란트 치료를 받은 후 몇 년간은 새로 해박은 이가 다시 부러지는 악몽에 시달렸으며 대학교 2학년 때, 기상과 함께 위에서 식도를 거쳐 입으로 피를 역류시킨 술에 대한 애정은 의사의 "죽고 싶으면 계속 마셔라"는 협박으로 인해 마감됐고, 군 제대를 한 달 앞두고 다친 후유증으로 인해 고대하던 말년휴가는 병원에서 MRI를 찍으며 허무하게 보내기도 했다. 역시나 디스크에 권위자라던 한 종합병원의 할아버지 의사는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고, 노련하게도 "디스크는 신품이네"라고 내 허리의 건강함을 칭찬하며 일종의 신경통이라고 황급히 결론지었다.

나열해보니 꽤 많은 것 같기도 하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딱히 병원이란 곳은 가본 적도,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 내면에는 의사에 대한 불신은 물론이고, 부담스러운 검사비용을 동반한 무지막지한 양의 투약 때문이기도 했다. 간단한 증상은 신비로운 인체의 자연치유력이 약보다 가격대비 월등한 효과를 보였고, 의심되는 증상은 묵혀도 별 탈 없었다. 딱히 건강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잔병치례가 많은 것도 아니었기에 그럭저럭 20대를 마감할 수 있었다.

Sequence #2. 그 남자, 이제는 병원에 가야할 때. 허나 민영의료보험 활성화가 웬 말?

30대에 접어든 따뜻한 어느 날, 새로 발급받은 한 카드사에서 걸려온 전화한통은 내 마음에 균열을 일으켰다. 회원들에게만 제공되는, 월 2만 원대로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보험 상품 안내 전화에 "이젠 혹시 모르니까"싶었고, "건강을 챙길 때가 됐는데 병원비에 약값까지 나온다"며 스스로의 변심을 정당화했다.

▲ 영화 식코(Sicko) 스틸컷

<식코> 시사회 직후,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한 월간지 여기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무시무시한 의료보험 민영화의 실태에 슬며시 걱정이 든 건 당연했고, 영화에서 예를 든 캐나다, 영국, 프랑스, 쿠바 같은 나라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한국 의료보험의 실태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판국에,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완화와 민영의료보험 활성화는 그야말로 재앙처럼 다가왔다. 한반도 대운하는 어느새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보험 상품에 가입한지 3년이 넘었지만, 올 겨울 편도염으로 이비인후과에서 며칠 통원 치료한 것을 제외하면 역시 병원 갈일은 없었다. 그동안 꼬박꼬박 납부한 보험료가 아까워 큰맘 먹고 병원을 찾았을 뿐이고, 그나마도 귀찮아서 보험료 청구를 미룬 상태라 실질적인 혜택을 받은 것은 전무했다. 단순 진료라서 그런지, 내 돈 내고 병원 간 것이 처음이어서인지, 건강보험만으로도 생각보다 치료비와 약값은 저렴했다. 큰 혜택을 받지 않는 한 보험은 말 그대로 보험일 뿐이었다. 소멸식이 아닌 환급식에 가입할 걸 그랬나, 후회와 함께 나름대로 건강보험도 쓸 만하다고 느낀 건 전적으로 <식코> 탓이었다.

Sequence #3. 그 남자의 선택. 일종의 보험? 혹은 저항?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명박 정부가 공약을 실천하기 전까지, 앞으로 몇 십년간 문제없을 정도로 지금부터 병원에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몸을 만들어놓는 수밖에. 그동안 국가의료보험제도가 의료의 질을 떨어뜨리기에 어쩔 수 없이 의료진에 대한 불신을 낳았을지라도, 앞으로 민영의료보험제도가 활성화되면 의료진의 실력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향상될지라도, 현재의 저렴한(?) 비용에 만족하며 그동안 불신했던 권위자들에게 머리 숙이고 조언을 구해야한다. 그나마 지금 내 몸에 투자하는데 소요될 목돈이 앞으로 어마어마하게 부과될 치료비 혹은 의료거부로 인한 신체의 고장보다는 훨씬 남는 장사일게 분명하니까.

▲ 영화 식코(Sicko) 스틸컷

▲ 서정환 조이씨네 편집장

한 네티즌은 포털사이트를 통해 '대통령님, 국민들과 함께 '식코'를 관람해주세요'라는 제목으로 서명운동을 발의해 현재 6700명이 넘는 네티즌들이 서명에 참가한 판국에 무슨 헛소리냐고. 물론 민영의료보험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약소하나마 개인적인 힘을 보탤 거다. 하지만 미래에 한국판 <식코>가 제작되지 말란 법도 없고, 혹시 친분 있는 감독이 연출을 맡아 나에게 의료보험제도 폐해의 사례로 출연해달라고 부탁하지 말란 법도 없다. 스스로 내 자신에게 투자하는 일종의 '의료보험'이자, 한국판 <식코>를 보고 싶지 않은 일종의 저항이라면 그것도 비겁한 변명일까. 당장이라도, 검은 가죽점퍼에 빨간 야구모자를 걸치고 이명박 대통령을 찾아가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다. "이명박 대통령님, 진정 미래의 한국판 <식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싶으신가요? 저와 함께 <식코>를 관람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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